87화
“많이 지루했지?”
마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카일은 아리시아와 레이나에게 말했다.
“아니요. 주인님.”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 주인님과 저희가 머물 집을 보는 거잖아요? 오히려 즐거웠어요.”
“맞아요. 주인님. 빨리 여기서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대답하는 둘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낀 카일은 손을 잡고 끌어 당겼다.
객마차 안에서 뭘 할 수는 없겠지만 둘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키스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주인님.”
“부끄러워요.”
아리시아는 카일의 키스에 깊은 한숨과 몽롱한 눈빛을 하며 더 애원했고 레이나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지만 결코 싫지 않은 것처럼 손을 뻗어서 카일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어찌 됐든 두 사람 모두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오늘은 다른 볼일 보지 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카일이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 * *
20일 동안 카일은 부지런히 지상에서 볼일을 해결했다.
믹을 만나서 건설 현장을 체크하고, 상인들을 만나서 사업 투자에 관한 얘기를 하고, 은행에 가서 계좌에 돈을 이체하고, 지부장과 스톰 길드의 파티장인 오웬을 만나서 인맥 관리도 했다.
그리고 오우거에 대한 사냥을 준비하기 위해서 연금술사에게 무언가를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오우거에게 통하는 독이라? 그런 게 있으면 올해의 연금술사 상이죠.”
“역시 무리인가요?”
“오우거는 썩은 고기나 독을 먹어도 태연하게 소화하는 놈이요. 그런 게 있으면 다른 모험가들도 써먹었겠죠.”
“역시 그렇군요.”
오우거를 보다 쉽게 사냥하기 위해서 독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지만 그건 무리였다. 하지만 독이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렇다면…….”
카일이 무언가를 말하고 그 말을 들은 연금술사 길드의 직원은 눈을 반짝였다.
“그건… 좀 재미있는 생각이군요.”
“가능할 것 같습니까?”
“예. 그건 아마도 가능할 겁니다. 아니, 가능한가? 그보다 오우거에게도 그게 먹히려나?”
“아무도 해본 적 없나요?”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누가 해봤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군. 알겠소. 길드 차원에서 연구해서 물건을 만들어 드리죠. 그 대신…….”
연금술사 길드는 카일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우거에게 그것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제게 꼭 알려주시기 바라오. 이거 학술적인 궁금함이 생기는군.”
“물론입니다.”
그리고 카일은 며칠 후에 연금술사 길드에서 무언가를 받아서 가지고 왔다.
‘이게 과연 먹힐까?’
카일 스스로도 된다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뭐, 안 되면 말고라는 생각으로 준비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것을 던전 탐색을 위한 짐 속에 챙겼다.
이제 다시 10층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다.
* * *
뭐든지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어려운 일도 두 번 세 번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익숙해진다.
10층에 두 번째 내려가는 길은 처음에 갈 때보다 훨씬 더 수월했다. 이제 부하들도 한 번 가 봤던 길이라서 그런지 10층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는 10층에 가서 오우거를 꼭 잡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지고 있었다.
‘오우거 없이 와도 포상금으로 4골드나 주셨지?’
‘만약 오우거까지 잡으면 얼마나 주실까?’
‘후후후. 6골드? 아니 어쩌면 7골드는 주실지도 몰라.’
‘밤거리에 열 번은 놀러 갈 수 있겠네.’
부하들도 이제 완전히 돈 맛을 알아버렸다.
사실 카일로서는 좋은 일이다.
측근 노예들만큼 맹목적인 충성심이 없다면 돈이라는 포상을 목적으로 능동적인 행동을 유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카일이 이끄는 파티는 이틀에 걸쳐서 던전을 이동했고 마침내 본래의 목적지인 10층에 도착했다.
다시 도착한 10층.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더 충실한 준비를 하고 내려왔다.
‘이번에야 말로 잡아 보겠어.’
카일은 전에 활동했던 오크 부락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을 목적으로 하고 파티를 이끌었다.
그 과정에 다수의 하이 오크무리와 웨어 울프들과 마주쳤지만 이제는 한결 더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 아리시아, 레이나 등의 측근 노예들이 활약 하는 건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버텨라. 버텨.”
“무너지지 마. 우리는 버티기만 해.”
“교관님들이 이길 때까지 버텨!”
바로 부하들의 활약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발레리아와 검은 바람이 제대로 훈련을 시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하들의 충실하게 자기 몫을 해냈다.
한 명씩 개별적으로 떨어트려 놓으면 하이 오크를 상대로 3분도 버티지 못할 만큼 약하지만 단체로 뭉쳐서 장비와 작전을 충실하게 활용하기 시작하면 이들은 자기 두 배가 넘는 하이 오크의 공격을 막아 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이 안정적으로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측근 노예들은 더 과감한 전투가 가능했다. 아리시아가 아슬아슬한 간격에서 활을 쏴서 견제한다거나 레이나가 뒤편에서 안심하고 축복을 영창 한다거나…….
그뿐만 아니라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의 활동 범위도 조금 더 멀리까지 늘어난다.
덕분에 카일은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목소리로 지시만 내려도 일행은 하이 오크나 웨어 울프를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사냥은 편해졌고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냥을 할 수 있었다.
‘느낌이 좋군. 아주 좋아.’
10층에 진입하고 열흘 후.
카일은 다섯 개의 동공을 지나서 10층의 꽤 깊숙한 지역까지 돌입했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이 오크나 웨어 울프의 강함도 조금씩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직 파티의 여력은 충분했다.
그러던 중.
파티를 이끌고 이동하던 중 카일은 전방에서 아스라이 들리는 폭음과 괴성에 발을 멈췄다.
“전원 정지. 아리시아. 무슨 일인지 알아봐.”
“예. 주인님.”
아리시아는 근방에서 가장 높은 바위까지 한걸음에 올라가서 망원경을 꺼냈다. 그리고 현장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주인님. 전방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리가 꽤 큰데? 다른 모험가인가?”
“아닙니다. 저건……. 몬스터 간의 전투로 보입니다.”
“몬스터 간의 전투라고 저게?”
전투의 폭음에는 몬스터의 괴성도 들렸지만 마법으로 보이는 폭발과 불꽃도 은근히 보이고 있었다.
그런 카일에게 아리시아가 말했다.
“오크 샤먼이 보입니다. 그리고 상대하는 쪽은…….”
“뭐지? 혹시 오우거인가?”
카일이 기대감을 가지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정답은 아니었다.
“웨어 울프입니다. 다만, 숫자가 많아 보입니다. 열 마리가 넘어 보입니다.”
“웨어 울프가 열 마리?”
카일도 이 말에는 꽤 놀랐다.
보통 둘에서 셋 정도로 뭉쳐 다니는 웨어 울프가 열 마리가 넘게 뭉쳐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카일은 몰랐겠지만 단독 생활을 하는 몬스터들도 예외적으로 힘을 합치는 경우가 있었다. 강한 적의 침략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킬 때가 바로 그렇다.
지금 카일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전투는 이 동공의 지배권을 다투고 있는 오크 부족과 웨어 울프들 간의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카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전쟁은…….
“아주 잘 됐군. 전원 대기해라. 아리시아. 전투 상황이 막바지에 이르면 말해라.”
“예. 주인님.”
카일의 입장에서는 개꿀이었다.
양쪽의 전투가 끝나갈 무렵에 끼어들면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카일의 파티는 차분하게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오오오오오오!
마침내 높은 톤의 하울링이 울려 퍼졌고 아리시아가 말했다.
“주인님. 전투가 끝났습니다. 웨어 울프가 오크 샤먼을 죽였습니다. 남은 하이 오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웨어 울프 쪽의 피해는?”
“열 마리 중에 일곱 마리가 죽었고 남은 세 마리 중에서도 두 마리는 중상입니다.”
“딱 좋군.”
기회를 노린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었다.
“가자. 전원 전진!”
“예!”
“검은 바람. 너는 먼저 가서 웨어 울프를 잡아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 후의 전투는 그야말로 쉬웠다.
카일이 부하들을 이끌고 도착하기도 전에 검은 바람유일하게 남은 웨어 울프는 그래도 근성을 보이며 검은 바람과 싸웠지만 이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검은 바람과 승부가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신창이 상태에서도 투지를 보이는 웨어 울프가 검은 바람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었나 보나.
“훌륭하다. 그 투지에 내 전력으로 보답하여 주마.”
검은 바람의 몸이 순식간에 3.5배로 거대해졌다.
“으와아아…….”
“교관님 저 정도로 거대화 할 수 있었던 건가?”
“트롤보다 훨씬 크잖아?”
3.5배 이상 거대화한 검은 바람을 본 순간 부하들은 입을 쩍 벌렸고 투지를 보이던 웨어 울프 역시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하앗!”
콰지직!
결국 웨어 울프는 검은 바람의 진심을 담은 일격에 그놈은 그대로 박살 나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카일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저러면 가죽 상하는데.”
“모처럼 흥이 났나 봅니다.”
발레리아의 대답에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애들아 현장 정리해라.”
“예. 주인님.”
부하들이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카일은 검은 바람을 불러서 말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할 상대는 아니었잖아?”
“죄송합니다. 적이지만 훌륭한 투지를 보이다 보니 저 자신도 그만 고양되고 말았습니다.”
“뭐, 그런 투쟁심이 네 장점이니 억누르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다음에는 가죽이 상하지 않는 형태로 죽여.”
“예. 명심하겠습니다. 주인님.”
부하들은 사방에 쓰러져 있는 오크와 웨어 울프의 시체를 수습하며 마석과 부산물을 챙겼다.
“이 녀석 가죽은 못 쓰겠지?”
“으음, 다 타버렸잖아? 이걸 어떻게 써.”
“쯧, 아깝게 한 마리 버려야겠네.”
“그래도 심장은 갈라 봐. 마석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 맞다.”
부하들은 제법 익숙하게 현장을 정리했다.
규모가 상당히 큰 전투였는지 쓰러져 있는 오크의 숫자만 해도 200마리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웨어 울프 열 마리와 마찬가지로 코볼트의 시체도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이 정도면 거의 전쟁 규모였군.”
카일은 현장을 둘러보다가 오크 샤먼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녀석이 오크 샤먼이군. 척 봐도 보통 오크와는 다르긴 달라.”
오크 샤먼은 보통 오크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신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체격 자체는 꽤 슬림했다. 어쩌면 체형만 놓고 보면 그냥 키가 약간 큰 인간하고 비슷한 정도였다.
하지만 얼굴과 피부색은 틀림없는 오크였고 온 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신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오크 샤먼의 사체를 살펴보니 오른손에는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고, 그 지팡이의 위에는 사람의 해골이 몇 개인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돈 될 만한 장비는 하나도 없는 건가?’
카일은 마석이나 챙겨서 갈 생각으로 직접 심장을 가르려고 했다. 그런데 오크 샤먼의 가슴에 무언가 작은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뭐지? 마석? 아니 마석하고는 좀 다른 것 같은데?”
마석은 푸른 색상에 은은한 빛이 난다.
그런데 이건 연한 녹색에 안에는 맑은 물이 출렁거리는 듯한 빛이 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챙겨 보자.”
던전에서 정체 모를 물건을 보면 일단 챙기는 게 상식이었다. 99%는 쓰레기일 확률이 컸지만 개중에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기도 했다.
카일은 정체불명의 보석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챙기고 오크 샤먼의 심장을 갈라서 마석을 챙겼다.
상급의 마석이 나와서 무척 만족스러운 채집이었다..
오크와 웨어 울프의 전쟁으로 어부지리로 큰 이득을 챙겼다. 싸우지도 않고 대량의 마석과 부산물을 손에 넣었으니 부하들은 몹시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생각을 달리 했다.
‘여기서 더 들어가는 건 위험하겠어.’
오크 샤먼이 수백의 오크 군단을 끌고 다수의 웨어 울프와 싸웠다. 결과적으로 카일에게 좋은 결과가 되기는 했지만 카일은 리더로서 이런 현상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하고 고민해야 했다.
‘놈들이 전력을 증강시켜서 다닌 이유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겠지. 즉, 이 지역에 놈들이 감당하기 힘든 강적이 있다는 말이야.’
10층에서 웨어 울프가 수십 마리 뭉쳐서 다녀야 할 강적은 뭐가 있을까?
답은 하나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우거는 이 지역 어딘가에 있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카일은 측근들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내일부터는 이 지역 일대를 꼼꼼하게 수색하고 순찰한다.”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척하면 척이라고 측근들은 카일의 지시에서 이미 대강의 사정을 꿰뚫었다.
‘오우거가 이 근방에 있다고 판단하신거야.’
‘본격적으로 긴장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