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부하들이 불안함에 수근 거리는 소리는 카일에게도 들렸다. 카일은 불안함이 더 커지기 전에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에게 시켜서 잡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럴 것도 없이 호크가 알아서 자기 동료들을 관리하자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크도 이제 제법 형태가 잡혔군.”
카일의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검은 바람도 말했다.
“예. 이제 저나 발레리아가 나설 것도 없이 호크가 알아서 애들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많이 편해졌습니다.”
호크가 중간에서 적절하게 정리를 해주기 때문에 교관 역할인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가 적게 나설 수 있었다.
중간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실력은 어때? 여전이 유저 중급인가?”
“예. 하지만 곧 상급으로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제법이군.”
순수한 검의 경지로는 카일하고 한 단계 차이라는 뜻이다.
검을 시작한 나이가 스무 살이 넘어서라는 것을 시작하면 꽤 괜찮은 성과였다.
“호크의 재능은 평범하지만 노력은 보통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래. 위에 올라가면 제대로 된 역할을 맡겨 봐야겠다.”
“분명 크게 기뻐할 겁니다.”
“뭐, 그것도 나가고 나서의 일이지.”
이런저런 말을 하는 와중에 카일의 파티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른 구멍과 달리 확연하게 커다란 구멍이 밑으로 비스듬하게 이어져 있는 이곳이 바로 10층의 입구였다.
“돌입한다.”
“예. 주인님.”
카일은 망설임 없이 파티를 이끌고 10층으로 내려갔다.
10층에 도착한 카일이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넓다는 것이었다.
발밑에는 스노우의 가슴까지 올라올 정도로 큰 갈대가 가득했고, 앞을 바라봐도 횃불이 비치는 범위 안에서 벽이 보이지를 않았다.
“아리시아 어때? 네 눈에는 벽이 보이니?”
“아니요. 저한테도 보이지 않아요.”
아리시아는 밤눈이 밝아서 가시거리가 200걸음 정도 된다. 그런 아리시아의 눈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그만큼 이 동공의 넓이가 넓다는 것이다.
이렇게 넓은 지역을 횃불에만 의존해서 이동하는 것은 무리다. 빛이 비치는 범위는 좁은데 멀리서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몬스터나 적이 발견하고 표적으로 삼기 쉽다.
잘못하면 수백 마리의 하이오크에게 둘러싸여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험가들이 10층부터 사용하는 도구가 있었다.
“모두 시약을 먹어라.”
“예. 주인님.”
카일과 파티원은 품안에서 손가락만한 작은 약병을 꺼내서 마셨다.
문 라이트라는 연금술 길드에서 만든 시약으로 칠흑처럼 어두운 던전에서도 앞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시약을 먹고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니 카일은 눈앞의 광경이 제법 선명하게 보였다.
흔들리는 갈대와 드문드문 솟구쳐 있는 바위,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숲 같은 것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좋아, 누가 부작용이 있는 사람 있나?”
“없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주인님.”
파티원 모두가 괜찮다고 했다. 사실 문 라이트는 성능이 충분히 검증된 시약이었고 연금술사 길드의 주요 판매 상품 중에 하나인 만큼 부작용은 없다. 만약 무슨 부작용이 생긴다면 그건 약품 자체가 가짜이거나 불량품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좋은 물약이지만 한 가지 단점을 꼽으라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문 라이트는 소모품인데도 불구하고 하나에 3골드나 한다. 파티원 전원이 이것을 먹으면 45골드나 소비된다는 것이다.
약물의 효과는 이틀에서 사흘 정도 유지되는데 효과가 끝나가려고 하면 또 약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이 효과가 좋은 약을 위층에서는 써먹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10층부터는 문 라이트는 필수품이다.
“횃불은 모두 끄고 천천히 이동한다.”
“예. 주인님.”
카일은 파티원을 이끌고 지도를 보며 천천히 이동했다.
오웬에게 받은 지도가 무척 정확해서 이동하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저 숲을 지나서 똑바로 통과하면 다른 동공으로 이동하는 길이 나온다. 그곳에 하이오크족의 부락이 있다고 하니 조심하도록.”
“예. 주인님.”
카일이 처음 목표로 삼은 건 하이 오크였다.
어차피 10층에서 주로 활동하다 보면 다른 몬스터들과도 엮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이 오크족을 택한 건 놈들이 오우거가 즐겨 먹는 먹잇감이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운이 좋으면 빨리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카일은 하이오크족의 부락이 있는 곳으로 파티를 이끌었다.
파티를 이끌고 숲으로 들어가는 길. 그곳에서 카일의 파티원들이 만난 것은 뜻밖의 생명체였다.
“키이이이!”
“키륵 키륵!”
“고블린?”
“저놈들이 10층에서도 나오네?”
그건 던전의 1,2층에서 주로 나오는 고블린과 홉고블린이었다.
사실 고블린은 1층과 2층에서 자주 나오지만 10층에서도 제법 있다고 알고 있다. 다만 10층까지 내려오는 모험가라면 고블린은 더 이상 몬스터라고 말하기도 뭐한 수준이라서 신경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호크, 애들 데리고 가서 처리해.”
“예. 교관님. 가자.”
검은 바람의 한 마디에 호크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고블린을 처리하러 나갔다.
“키에에에엑!”
“키르륵.”
고블린 정도는 사실 문제도 되지 않았다.
사지 멀쩡한 성인 남자라면 고블린은 맨손으로도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놈들이니 말이다.
그래도 모두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된 장비를 이용해서 고블린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했다.
호크는 그중에서 그나마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홉고블린을 상대했고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키에에엑!”
마지막 한 마리까지 깔끔하게 처리한 부하들은 익숙하게 고블린의 심장을 갈라서 마석을 확인했다
“이 약해 빠진 놈들이 10층에서 어떻게 살아남는 거지?”
“글쎄, 번식력?”
“하긴, 정력과 성욕 하나는 끝내 주는 놈들이라고 들었으니까…….”
사실 먹이 사슬의 하위층에 있는 대부분의 동물은 번식력이 왕성하다. 고블린 역시 마찬가지로 한 번 새끼를 낳으면 열 마리 이상 낳을뿐더러 임신 기간도 한 달이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근친교배로 인한 열성 유전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먹이만 풍부하다면 고블린 한 쌍은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수백 마리로 불어날 수도 있었다.
죽이기는 쉬어도 전멸시키기는 어려운 몬스터.
그게 10층에서 그런 고블린을 먹잇감 삼아서 활동하는 몬스터가 바로 하이 오크다.
“역시 꽝……. 으윽!”
푹!
고블린의 심장을 갈라서 마석을 확인하던 부하 하나가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쓰러진 놈의 어깨에는 작은 화살이 돋아나 있었다.
“방패 들어!”
발레리아가 화급하게 외쳤고 호크와 그 동료들은 빠르게 타워 실드를 들어 올려서 머리와 몸을 숨겼다.
팅! 티팅! 팅팅!
그리고 방패 위로 몇 발의 화살이 더 부딪혔는데 그 방패를 쏜 곳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제법 큰 거구의 오크들이 활을 들고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하이 오크다! 방패 세워서 벽부터 쳐!”
카일이 빠르게 명령했고 부하들은 그 명령대로 방패를 세워서 빠르게 벽을 만들었다.
두 명이 화살을 막고 다쳤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방패를 겹쳐서 벽을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벽의 안으로 카일과 아리시아 그리고 레이나가 들어왔다.
“발레리아는 대기, 검은 바람은 공격해라. 아리시아 엄호해.”
“예. 주인님.”
“알겠습니다.”
카일의 지시대로 검은 바람은 맹렬하게 돌진을 시작했고 아리시아는 벽 뒤에 숨어서 활로 그런 검은 바람을 엄호했다.
“취익! 취이익!”
검은 바람이 단신으로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하이 오크들은 활을 검은 바람에게 겨눴다.
어차피 검은 바람이 저런 화살에 맞을 리는 없겠지만 그걸 그냥 지켜보고 있을 아리시아가 아니었다.
“어딜 감히!”
티티티티팅!
순간 그녀의 손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고 그녀의 화살은 빛살처럼 날아갔다.
시간 가속 능력으로 인해서 연사 속도는 물론이고 화살 자체의 속도마저 빨라진 그녀의 화살은 정확하게 오크들을 저격했다.
“쿠웨에엑!”
“꿰에엑!”
얼굴과 눈 같이 아픈 부위에만 화살을 맞은 하이 오크족은 모두 비명을 질렀다.
놈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검은 바람이 놈들의 간격에 도착하고 말았다.
“다 쓸어 주마!”
검은 바람은 순식간에 몸을 두 배로 불리더니 대도를 휘둘렀다.
촤아악!
한 칼에 세 마리의 하이 오크가 반토막 났다.
딱히 대도에 오러도 두르지 않았지만 거대화가 만들어낸 질량의 파워가 오크를 양단한 것이다.
사실 검은 바람이 몸을 두 배로 키우면 커다란 덩치의 오크도 고블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검은 바람의 실력이면 반토막으로 썰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흐으읍!”
남은 적은 세 마리 검은 바람은 이놈들도 한 칼에 썰어 버리기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카아앙!
오크 놈들 중에 한 놈이 검은 바람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퀴이이익!”
비록 그 공격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5미터 넘게 날아간 후 나뒹굴었지만 검은 바람의 공격에 처음으로 버텨낸 오크가 나온 것이다.
“호오오… 놀라운 걸?”
“역시 하이 오크라는 이름답게 보통 오크와는 다르군요.”
카일은 놀랐고 그 옆에서 지켜보던 발레리아도 은은하게 감탄했다.
검은 바람의 공격을 막아 낸 그 오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동료들에게 뭐라고 외쳤다.
“취익! 취익 취익!”
그러자 남은 동료 두 명은 재빨리 후퇴하기 시작했고 놈은 검은 바람을 보며 투지를 불태웠다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 남은 걸까요?”
“그렇다면 적이지만 칭찬할 만한 투지긴 하군. 하지만…….”
입장상 카일은 저 투지와 동료애를 용인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동료를 불러서 왕창 몰려오면 피곤하지 않은가?
“아리시아. 잡아.”
“예. 주인님.”
카일의 명령을 받은 아리시아는 방패 위로 올라가더니 활에 화살을 매겼다.
“못 도망가.”
그 짧은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고속으로 움직였다.
티티티티티티티티티팅!
마치 소나기가 유창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이런 걸까?
아리시아의 손에서 수십 발의 화살이 빠르게 발사 되었다.
원래도 빠른 속사가 장기인 그녀가 시간 가속 능력을 최대치로 올리면 초당 10발의 화살을 쏘는 것도 가능하다.
이쯤 되면 연사 속도는 활보다는 기관총에 가깝다고 해도 좋았다.
“퀴이이익!”
“꾸웨엑!”
도망가던 오크 두 마리는 등에 화살을 가득 꽂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추 봐도 일인당 화살을 열 발은 넘게 맞은 것 같았다.
화살 한두 발 정도는 버텨내는 터프함을 지니고 있는 오크족이지만 저렇게 등판이 걸레짝이 될 정도로 맞으면 버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주인님, 잡았어요.”
“그래, 잘했다.”
아리시아가 자랑스럽게 말했고 카일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헤.”
그녀는 그게 기분이 좋은지 순수하게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카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그녀는 조금 전에 하이 오크 두 마리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린 굉장한 궁수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다른 부하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세히 보면 아리시아님도 보통은 아니야.’
‘저런 사람이 한번 화나면 가장 무서울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