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귀찮은 듯한 기색이 역력한 마르크와 달리 카일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생기는 흔들림을 감추기 위한 포커페이스 스마일이었다.
그 상태로 카일이 말했다.
“상단주님에게 사업 얘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사업? 모험가인 당신이 말입니까?”
마르크는 황당하다 못해 귀엽다는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말을 이었다.
“제가 마르크 씨에게 하고 싶은 제안은 투자 제안입니다.”
“투자라……. 제가 카일 씨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돈이 궁하지는 않습니다만?”
“돈이 궁하다고 해서 빌리는 건 하수죠. 진짜 상인이라면 필요해서 돈을 빌리는 겁니다.”
“…….”
카일의 말이 의외였는지 마르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식한 모험가 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말도 할 줄 아는군.’
마르크는 일단 들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크흠, 계속 말씀해 보시죠.”
“예. 간단한 얘기입니다. 저는 마르크 씨에게 돈을 투자하고 그 투자금에 걸 맞는 돈, 그러니까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당금? 그건 뭡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거죠. 마르크 씨가 지금 진행하는 사업, 예를 들어서 A라는 도시에 가서 밀을 사와서 여기 바이에른에 풀어야 하는 상행이 있다고 칩시다.”
“실제로 곧 보리를 매입하기 위해서 출발할 계획은 있습니다. 어디인지는 말해 줄 수 없지만요.”
어느 영지에 소출이 좋았고, 어느 영지의 소출이 나빴다. 등등의 정보는 곡물을 취급하는 상인들에게 생명과 같은 정보다.
카일도 어차피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예. 그 계획에 필요한 돈이 예를 들어 10,000골드라고 치죠. 거기에 제가 1,000골드를 투자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 돈은 9,000골드만 들거나, 그게 아니면 11,000골드를 가지고 가서 곡물을 구입하겠죠.”
“맞습니다. 제가 투자한 돈이 전체 사업의 10%라면 증서를 써주십시오. 제가 이번 상행위에 10%의 금액을 투자했고, 거기에 대한 이익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증서 말이죠. 뭐, 편의상 이걸 주식이라고 합시다.”
“주식… 주식이라…….”
마르크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해졌다. 그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로 복잡한 계산을 하는 듯 했다.
‘주식이라는 말에서 뭔가 느낀 모양이군. 확실히 유능한 사람이야.’
카일은 그런 마르크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가 유능한 상인이면 상인일수록 투자에 대한 안전성과 수익성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가능하면 이 마르크라는 상단 자체에 투자금을 넣고 배당을 받아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시대가 무리다.
‘상단에서 장부를 약간만 조작해도 주주에게 배당금을 덜 주거나 안 주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지.’
기업의 건전성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법적 보장이 없는 이 세계에서 상단 자체에 대한 주식 투자를 하는 것은 아직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의 상행위나 사업에 대해서 투자를 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그것도 속이려고 하면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확인하기가 좀 쉽다. 거래된 물량과 가격을 확인하면 어느 정도는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식이라……. 사업에 대한 투자와 거기에 대한 지분, 그리고 배당금… 흐음…….”
마르크는 계속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고, 그때 밖에서는 마르크 상단의 직원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주인 어르신, 코르트 백작님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다리라고 그래. 지금 중요한 상담 중이다.”
“예? 하지만 코르트 백작님이…….”
“꺼져!”
“예. 알겠습니다.”
그는 날카롭게 외치며 직원을 쫓아냈다. 처음에 카일에게 10분의 시간밖에 주지 않겠다고 한 사람 치고는 태도가 꽤 많이 변했다.
이윽고 생각의 정리를 마친 그는 카일을 보더니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하지만 저는 이미 자금 동원력이 충분한데, 굳이 투자금을 받고 제 이득을 나눠 줘야 할까요?”
“마르크 씨 정도 되는 상인이라면 알 겁니다. 돈은 굴리는 규모가 커야 수익도 더 커진다는 것을요. 10,000골드가 1,000골드를 벌어주는 사업에 10만 골드를 투자하면 30,000골드를 벌수도 있는 법이죠. 독점까지 가능할 정도로 지분을 넓힌다면 수익은 덕 커질 겁니다.”
“일 리가 있군요. 하지만 일개 모험가인 카일 씨가 아니라 다른 재력가에게 그렇게 투자를 받아서 사업을 계획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투자자는 얼마든지 받아도 좋죠. 더 많은 투자금은 결국 자금 동원력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제 투자금을 안 받을 이유가 있나요?”
“그거야…….”
“막말로 제가 여기를 나가서 다른 상단에 똑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아마 그들도 좋은 생각이라고 동참할 테고 상단들 사이에서 투자자 유치를 위한 경쟁이 벌어질 테죠. 그때는 진짜 모험가 주머니의 푼돈도 아까워질 겁니다.”
“…….”
마르크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카일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르크 씨, 더 이상 저를 시험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푼돈에 눈이 멀어서 마르크 씨에게 사기를 치려는 애송이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투자를 하기 위해서 바이에른 최고의 곡물 상인인 당신을 찾아온 겁니다.”
카일의 말에 마르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카일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제가 귀한 분을 몰라봤군요. 제 무례함을 드립니다.”
“별것 아닙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업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앞에서 말했지만 투자자는 더 모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투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익도 늘어날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사업에 대한 주식과 배당금이라는 것을 설명하기가 난해하군요. 카일 씨 정도의 식견이 없는 사람이라면 제가 사기꾼 취급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서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투자를 유치해 보십시오.”
“사업 계획서?”
“예. 어디서 무엇을 얼마에 사서 어디에서 얼마를 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어떤 필요 경비가 필요하며, 얼마의 수익이 날 것으로 예상한다는 것까지 적은 계획서죠.”
“그래서야 제 사업 계획이 외부로 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만 공개하라는 겁니다. 그래도 소문이 퍼지면 알아서 돈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이들은 있을 겁니다. 이건 저보다 마르크 씨가 더 잘 알 테죠?”
“하긴, 돈 냄새는 대륙 끝에서 퍼져도 맡을 사람은 맡는 법이죠.”
“뭐, 저야 스스로 찾아왔으니 할 말이 없고, 정 불안하면 투자 계획서의 내용을 외부로 발설하지 못하도록 계약서에 명시하십시오. 정보를 누설할 경우 피해 보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고도 명시하시고요.”
“…….”
카일의 설명을 들은 마르크는 멍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카일 씨는 진짜 모험가이신가요? 어디 상단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거나 다년간의 실무를 경험하신 것 아니고요?”
“저는 이제 열여덟이고 그저 모험가일 뿐입니다.”
“놀랍군요. 당신은 상인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군요.”
“저희 상단의 간부직으로 들어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수입은 지금의 두 배, 아니 세 배를 약속드리죠.”
“아까운 제안이지만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상단에 취직할 생각은 없는 카일이었다. 훗날 직접 운영할 계획은 있었지만 말이다.
마르크는 카일에게 끈질기게 영입 제안을 했지만 카일은 일관되게 거절했다.
그 대신 미래를 위한 한 마디를 남기고 마르크 상단을 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서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을 공유하도록 하죠.”
상단을 나온 카일은 옷깃을 바로 고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끈질기군.”
그런 카일의 뒤에서 검은 바람이 은은히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큼 주인님이 대단하시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주인님과 마르크라는 남자의 대화를 반도 이해 못했습니다.”
“별것 아니야. 그냥 조금…….”
투자와 배당이라는 시스템을 카일이 알고 있는 건 전생의 지식 때문이다. 그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게 투자라는 개념의 전부인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획기적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냥 조금 아이디어가 좋았을 뿐이야.”
카일은 그냥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게 대단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주인님이 상인으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됐다. 그보다 다음 약속 장소는 어디지?”
“페릭턴 상단과 코비치 상단입니다.”
“좋아. 지금 가자.”
카일이 약속을 잡은 건 마르크 상단만이 아니었다. 도시 건설에 필요한 건축 자재를 공수하는 페릭턴 상단과 가죽과 각종 의류 원단을 취급하는 코비치 상단.
이 두 개의 상단과도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자고로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게 아니지.’
이것도 투자의 철칙 중에 하나였다.
결국 카일은 세 개의 상단에 자신의 여유 자금을 대거 투입했다.
마르크 상단에 1,000 골드
코비치 상단에 500골드.
페릭턴 상단에 500골드.
그들에게 이 돈을 투자하고 각각 사업에 대한 지분과 배당금을 약속받았다.
여기서도 스톰 길드의 오웬의 이름을 댔고 계약서의 공증인 란에는 길드의 지부장의 이름을 써냈다.
“진짜 길드의 지부장의 도장을 받아 왔군요.”
“그 편이 계약서의 공신력이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일개 모험가로 보고 돈을 때먹거나 사기 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렇게 계약을 마치고 마르크와 악수를 하며 카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씨앗은 뿌렸다. 결과는 기다려 보자.’
상단에 자금을 투자한 후로 카일이 한 것은 부지런히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원래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들어가지만 카일은 세 번 이상을 들어갔다.
한 번 들어가면 보통 일주일 이상은 머물렀으니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던전에서 보낸 것이다.
갑자기 빡빡해진 스케줄에 부하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단에 투자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여유 자금을 거의 다 썼고, 이제 매달 200골드씩 오웬에게 지불해야 할 상납금도 있으니 돈은 꾸준하게 벌어야 했다.
던전 안에 들어가서도 레이나의 코어를 한계까지 꾸준하게 컨트롤 하면서 수련을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 * *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지났다.
슬슬 무더위가 느껴지는 여름이 되었고 카일의 노력은 서서히 성과를 드러냈다.
아직 레이나의 능력은 각성하지 않았지만 대신 카일 본인의 초능력이 강해진 것이다.
“흡!”
싸이코 키네시스로 인해서 카일의 눈앞에 있는 단검이 공중에 떠올랐다. 들어 올린 단검은 카일과 좀 떨어진 거리에 있는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퍼어억!
“손으로 던지는 것 정도의 위력은 나오는군.”
두 달 전에 동전 하나도 간신힌 움직이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역시 싸이코 키네시스의 훈련을 하고 안 하고는 천지차이였다.
그리고 중요한 각성 능력도 조금씩 발전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 하루에 초능력 코어를 세 시간 가까이 활성화시켜도 괜찮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두 명 이상을 키워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두 명 이상을 각성시켜도 꾸준하게 관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른 노예를 사와서 초능력을 각성시켜볼까 싶었지만 잘못하면 지금 키우고 있는 레이나의 능력 각성에 실패할 것 같아서 일단 참았다.
초능력이 강해지는 만큼 카일의 전투력도 올라갔다. 최근 던전에서는 카일 혼자서 트롤을 상대해 보기도 했다.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혼자서 트롤을 상대로 30분 넘게 버티는 기염을 통하기도 했다.
검에 익스퍼트의 오러가 없어서 트롤의 가죽을 뚫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지 신체적인 파워와 전투 능력 자체는 트롤을 상대로도 충분히 할 만하다는 검은 바람의 평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강해진 것은 카일 만이 아니었다.
카일의 측근 노예들도 초능력의 단련에 더 비중을 두고 열심히 수련한 결과 전체적인 능력이 향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