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카일이 한 말은 사실상 인사치레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오웬은 그렇게 듣지 않은 모양이다.
“자네 정도의 실력과 실적이 있으면 내가 추천서만 넣어주면 바로 정규 클랜원으로 입단할 수 있네.”
“정규 클랜원? 그럼 비정규 클랜원도 있다는 말입니까?”
“음, 우리는 준클랜원, 혹은 예비 인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오웬은 찻잔을 들어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자네가 보기에 우리 클랜의 숫자는 몇 명이나 있는 것 같나?”
“길드를 통해서 듣기로는 5천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정식으로 등록된 숫자지. 하지만 우리 클랜에 들어오고 싶어서 대기 중인 사람들만 해도 7천 명이 넘는다네.”
“7천……. 그게 다 준클랜원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우리 클랜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클랜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클랜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공적을 세워야 하니 결국 우리가 시키는 일을 하거나 우리하고 같이 던전에 들어가는 식으로 활동을 하는 법이야.”
“그렇군요. 그럼 스톰 클랜이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모험가의 숫자는 1만 2천이라는 말이군요.”
“아니, 사실 내가 다 파악한 건 아니지만 마음먹으면 3만 정도는 움직일 수 있을 거야.”
“3만? 아니… 어떻게 그런 숫자가 나옵니까?”
“음, 그건 말이지.”
깜짝 놀라는 카일에게 오웬이 펜과 종이를 가져와서 적으면서 설명했다.
“일단 우리 클랜의 구조는 대강 이래.”
클랜장―1인
간부―11인
파티장―50~60인
클랜원―5,000인 이상
준 클랜원―7,000인 이상
“클랜장 직속의 감춰진 간부나 부서가 있을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정도는 이렇다네.”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하군요.”
거의 하나의 군벌이라고 해도 좋았다.
‘오웬 씨의 직함은 파티장이라고 했지. 생각보다 높은 사람이었군.’
이 거대한 조직에서 오십에서 육십 명 안에 들어갈 정도로 높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 남자가 제법 거물이라는 증거였다.
오웬은 종이에 클랜의 규모를 쓰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클랜이 제법 크긴 크지?”
“예. 정말 대단합니다. 이 정도면 사실 어지간한 시골 영지의 귀족 따위는 비교할 거리도 못 되는군요.”
카일은 자신의 친부인 루트비안 자작을 떠올리며 말했다.
오웬은 그런 카일의 말에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여기서 더 대단한 건 우리 클랜의 산하 병력이야.”
“산하? 외부에 클랜을 따라는 병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우리 스톰 클랜은 바이에른을 꽉 잡고 있는 대형 클랜이야. 순수하게 모험가에 대한 영향력만 비교해도 이 바이에른 안에서는 길드와 대등할걸?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보호를 받고자 하는 작은 규모의 클랜이나 모험가들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어. 그렇지 않나?”
“그렇군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카일은 오웬이 외부인인 자신에게 이렇게 상세한 내부 정보를 가르쳐 주는 이유도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자고로 사람은 배를 타도 큰 배를 타야 하는 법이야. 그 사실을 얼마나 젊은 시절에 빨리 깨닫느냐가 10년 후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봐도 좋지.”
“그렇군요.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크흠, 그래서 말인데…….”
오웬은 카일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가? 자네도 우리 클랜에 들어올 생각이 없나?”
“클랜 가입은 좀 갑작스럽군요.”
“그렇다면 외부 세력, 그러니까 산하 파티로 활동하는 건 어떤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다리를 놔주겠네.”
카일은 우선 대답 없이 뜸을 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를 들어서 입에 가져가고 조금 머금은 다음 삼키고 다시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간단한 동작을 최대한 어색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 천천히 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산하라……. 클랜 산하 세력이라…….’
카일은 찻잔을 내려놓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말씀을 하셔도 잘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클랜의 산하 세력으로 들어가면 제가 어떤 의무를 가지게 되고 또 어떤 해택을 누리게 되는 겁니까?”
“흠, 생각보다 따지는 게 많군.”
“역할과 책임조차 알지 못하면서 무책임하게 대답하는 무례를 범할 수는 없으니까요?”
“…뭐, 그렇기는 하지.”
오웬은 조금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우선 산하 세력이라는 건 절대 공식적인 건 아니야. 아무래도 모험가의 숫자가 만 단위를 넘어가면 국가나 귀족들도 슬슬 견제를 하는 법이거든.”
“‘어디 가서 내 뒤에 스톰 클랜이 있다.’라고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자네는 이해가 참 빨라.”
“스톰 클랜의 이름을 쓸 수도 없는데 스톰 클랜의 산하에 들어가는 게 의미가 있나요?”
“크흠, 물론이지. 예를 들어서 ‘내 뒤에 스톰 클랜이 있다.’ 라고는 말 못해도 ‘내 뒤에 스톰 클랜의 파티장인 오웬이 있다.’ 라고는 말할 수 있거든.”
“…예?”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하는 카일에게 오웬이 웃으며 말했다.
“뭐, 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같기는 하지. 하지만 이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허락되는 범위야. 다시 말하면 자네 뒤에 있는 건 스톰 클랜이 아니라 스톰 클랜의 파티장인 나와 개인적인 연결이라는 거지.”
“…….”
카일은 이게 단순히 국가권력이나 귀족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미봉책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이것이야 말로 지금 대화의 핵심일 수 있었다.
“그 말은 저는 오웬 씨를 통해서 스톰 클랜의 위광을 빌리거나 해택을 입을 수 있다는 거군요.”
“맞아. 바로 그거지.”
“다른 파티장님들도 그렇게 하는 겁니까? 저 혼자만 그런 특혜를 누려서 눈엣 가시로 찍히는 건 좀 그런데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파티장쯤 되면 다 하는 일이야. 간부들은 훨씬 더 하지. 지금 파티장들 중에 상당수는 간부들의 산하 세력이었다가 클랜으로 합류한 굴러온 돌들이야. 귀찮은 것들이지.”
‘역시…….’
카일은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영입 제안이 아니다.’
이건, 스톰 클랜 내부의 권력 다툼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설령 같은 편이라고 해도 열 명만 모이면 편을 가르게 되어 있다.
좋게 말하면 발전을 위한 건전한 경쟁.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출세를 위한 경쟁자 밀어내기 식으로 표현 할 수 있다.
스톰 클랜 같이 거대한 조직에서 그런 경쟁이 없을 리가 없다.
경쟁자를 밀어내고 더 높은 자리로 출세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할게 뻔하다. 외부인을 산하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클랜 내부에서 자기 사람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져서 클랜 외부에도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 여차할 때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오웬은 스톰 클랜의 정규 멤버가 5천인데 산하 병력을 다 포함하면 수만 명이 움직인다고 했다.
그렇게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이유는 클랜의 파티장이나 간부들이 내부 경쟁에서 더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서 산하 세력을 필사적으로 늘려 왔다는 증거다.
‘머릿수를 늘리기만 하는 거라면 무한정 늘릴 수 있겠지. 어쩌면 진짜 이 클랜의 위상은 바이에른 안에서는 길드 못지않을지도 모르겠어.’
카일은 오웬을 보면서 말했다.
“직설적으로 제가 오웬 씨를 통해서 스톰 클랜의 산하로 들어간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쎄, 그건 자네가 정해야지.”
“제가 말인가요?”
“그래. 솔직히 말해서…….”
오웬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파티장이나 간부 중에는 외부인을 강제로 산하로 들인다거나 더러운 일을 맡기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막 나가지는 않아?”
“그런 걸 저에게 막 말해도 됩니까? 저는 아직 외부인입니다.”
“뭐, 어차피 아는 놈들은 다 아는 일인걸.”
“…….”
“나도 뭐, 아주 깨끗하고 청렴한 인간이라고 하지는 못하겠어. 하지만 적어도 자네에게 더러운 명령을 내리지는 않겠어.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고 말이야. 나는 더러운 짓이 필요하면 내가 직접 하는 타입이라서 말이야.”
“…….”
“그러니, 먼저 선택권을 주지. 내가 자네 뒤를 지켜 준다면 자네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나?”
“후우우… 고민하게 하시는군요.”
“인생은 원래 고민의 연속이야. 하지만 한 가지 충고를 해도 되겠나?”
“말씀하시죠.”
“자네가 두각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우리 클랜의 간부들이나 다른 클랜에서 자네를 주목할 거야. 그리고 그때 자네에게 접근하는 인간들이 나처럼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놈일지는 모를 일이지.”
“…….”
“내가 그 인간들의 방패막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자네에게는 큰 이득일 거야.”
“그렇군요.”
충고라기에는 반쯤은 협박에 가깝기도 했지만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방패막이는 필요해. 이건 사실이다.’
카일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드의 지부장에게 끈을 대고 있었고 말이다.
이전에 폐기장을 전소시켰을 때도 지부장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사태를 무마할 수 있었다.
그런 연줄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생각하며 이건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돈은 어떻습니까? 일정한 금액의 상납금을 바친다거나 하는 형식으로…….”
“나쁘지 않군. 돈이야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니 말이야. 얼마나 줄 수 있나?”
“매달 200골드 정도면 어떨까요?”
“자네 성직자를 데리고 9층에서 활동하지? 그럼 한 번 들어갈 때마다 최소 500골드는 벌 텐데?”
“던전은 한 달에 많아야 두 번 정도 들어갈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수입의 20%를 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사실 카일이 이번에 9층에서 올린 수익은 890골드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아니, 애초에 말하면 바보다.
“흐음, 달에 200골드라…….”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대형 클랜의 파티장인 오웬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큰돈도 아니었다.
그냥 쏠쏠한 부수입 정도?
그 정도 돈으로 자신의 이름을 빌려 주고 산하로 받아들이는 건 좀 애매했다.
그런 오웬에게 카일이 말했다.
“200골드에 더해서 오웬 씨의 요청이나 일감이 있다면 어지간하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지간 하면이라는 말을 참 편리하게 써먹는군.”
“저에게 더러운 일은 시키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그 더러움의 기준을 판단할 권리는 저에게도 주셨으면 합니다.”
“…….”
“오웬 씨의 말에 거짓이 없었다면 그렇게 불합리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네. 그럼 월 200골드. 그리고 가끔 내가 맡기는 사소한 일을 좀 처리해 주는 정도로 자네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그 ‘사소한’의 기준이 부디 적절하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거부권은 있지 않나?”
“제 나름의 보험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둘은 서로 가는 실을 붙잡고 미묘하게 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거래를 이어갔다.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둘 다 이 실이 끊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자각하고 있는 카일이 말했다
“제 쪽의 카드는 공개했습니다. 오웬 씨는 저에게 무엇을 지불하시겠습니까?”
“우선, 자네가 주 무대로 활동하는 9층의 지도를 공개하지. 길드에서 파는 허접한 지도가 아닌 우리 클랜에서 직접 만든 우수한 것이야.”
“그건 9층 이상도 공개되어 있다는 겁니까?”
“뭐, 그건 앞으로 자네 하는걸 봐서…….”
“…….”
“당연한 말이지만 지도의 정보를 외부에 공개한다거나 판매하는 행위는 금하겠네. 내 몰래 그런 짓을 하다가 발각이 되면 좋은 일은 생기기 않을 거야.”
“명심하죠. 하지만 9층의 지형 지도 하나만으로 월 200골드는 좀 폭리라고 생각되는데요?”
“9층 이하의 지형 지도도 공개해 주지. 1층부터 8층까지 전부, 그리고 우리 클랜에서 운영하는 상단에서 내 이름을 대면 우대받을 수 있을 거야. 또, 무엇보다 앞으로 외부인과 트러블이 생긴다면 내 이름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자네를 지켜 주지.”
사실 가장 큰 핵심은 뒤의 말이다.
‘200골드짜리 백이군. 나쁘지 않아.’
카일의 입장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호의보다는 확실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받아내는 보호가 더 좋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웬 파티장님.”
“오랫동안 함께했으면 좋겠군.”
그렇게 둘은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