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돈 따위는 필요 없어요. 우리는 주인님만 있으면 돼요.’라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네 명을 보고 생각했다.
‘안 되겠군. 돈 쓰는 방법을 좀 가르쳐 줘야겠어.’
물론 의식주 전반은 부족함 없이 챙길 것이고 던전 공략에 필요한 장비도 충실하게 챙겨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아쉽지 않을 리가 있는가?
그저 노예로 오래 있다 보니 쓰는 방법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카일은 우선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검은 바람, 너는 왜 돈이 남았지?”
“그거야… 딱히 쓸 일이 없었습니다. 주인님. 제가 돈을 쓰면 어디 쓰겠습니까?”
“네가 원한다면 네 마음에 드는 술 정도는 사서 마실 수 있지 않나?”
“어… 예, 그렇게 쓸 수도 있기는 하겠군요.”
“내 술을 마시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는데 그래도 네 마음에 드는 술을 사서 마시는 정도의 자유는 누려도 되지 않겠냐?”
다만 카일은 그다지 애주가가 아니었기에 그냥 평범한 맥주나 버본 정도를 사놓고 가끔 홀짝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검은 바람은 상당히 애주가다. 그리고 애주(愛酒)라는 취미는 생각보다 돈이 들어가는 취미다.
“그렇게 써도… 되겠습니까?”
“네 돈이다. 일상생활에 지장 없을 정도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마셔라.”
“감사합니다.”
검은 바람은 카일의 허락을 받은 이상 내일 당장이라도 상회를 찾아가서 자신이 원하는 술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발레리아, 너도 집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지 않았나?”
“예. 그렇기는 합니다.”
발레리아는 독서가 취미다.
원래 귀족 출신이라서 그런지 역사, 문학, 예술, 철학 등등 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좋아했다. 카일도 이 세계에서는 딱히 즐길 거리가 없어서 책을 구입했지만 발레리아의 독서욕을 충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발레리아는 자연스럽게 읽은 책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네가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얼마든지 구입해도 좋다.”
“괜찮을까요? 책은 부피를 꽤 차지하는 물건입니다.”
“네 방에 다 들어갈 정도라면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발레리아도 은근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카일은 세 번째 목표로 아리시아를 바라봤다.
“아리시아, 너는 전에 받은 돈을 어디다 썼지?”
“방에 놔뒀어요.”
“방에?”
“예. 주인님이 주신 소중한 돈이니 한 푼도 쓰지 않고 소중하게 모아 두려고 해요.”
“…….”
카일이 보기에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무슨 기념주화냐?’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라. 뭔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은 없나?”
“제 개인적으로는…….”
아리시아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그게 뭐지?”
“그건…….”
아리시아는 카일에게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인님이 더 귀여워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결국 기승전‘카일’인 아리시아였다.
‘그건 돈 없어도 되는 거잖아? 거기다 너무 내 위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잠깐… 그렇다면?’
카일은 생각을 바꿨다.
“나한테 더 귀여움을 받고 싶니?”
“예. 주인님.”
카일은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미용이나 패션에 돈을 써보는 건 어때?”
“어…….”
아리시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런 그녀에게 카일이 말했다.
“미용 용품이라던가… 예쁜 옷이나 화장도 좋지. 그런 것들로 너 자신을 예쁘게 꾸미면 만족도가 올라가지 않을까?”
사실 화장 하나 하지 않아도 아리시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작정하고 꾸미고 외모를 가꾸면 어떻게 될까?
“제가 더 예쁘게 꾸미면 주인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너 스스로를 돌보고 가꾸면서 자기애를 좀 키우고 말이야.’
본심은 뒤에 살짝 숨기는 카일이었다.
카일의 말에 아리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주인님. 최선을 다해서 더 예뻐질게요.”
“그래. 열심히 해봐.”
힘겹게 아리시아까지 소비 활동에 참가시킨 카일은 마지막으로 레이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심 자신 있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주인님. 저는 성직자로서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정말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카일이 보기에는 그녀가 가장 쉬웠다.
“레이나.”
“예. 주인님.”
“칸테나의 아이들.”
“…아.”
카일의 한 마디에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카일은 웃으면서 말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긴 했지만 수시로 상단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이라도 하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겠어?”
“그렇…죠.”
안 그래도 아이들의 근황이 궁금한 레이나였다.
카일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근황을 확인하는 과정에 편지도 보내고, 편지를 보내는 김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옷이라던가, 신발이라던가 그런 물건도 보내면 애들이 참 좋아하겠지? 아이들 입장에서도 원장 선생님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 얼마나…….”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레이나는 단번에 넘어와서 내밀었던 포상금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렇게 간부들에게 포상금을 지불한 후 카일은 그걸 부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호크.”
“예. 주인님.”
부하들 중에서 리더를 맡긴 호크가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
원래 이름은 촉새였지만 부하들 중에 가장 먼저 싹이 보여서 호크라는 이름과 함께 부하들의 리더를 맡은 남자였다.
카일은 그에게 20골드짜리 돈주머니를 주며 말했다.
“1인당 2골드씩이다. 공평하게 나눠 주고 잘 쓰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호크가 포상금이 든 주머니를 가져 가자 열 명의 부하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오오!”
“감사합니다. 주인님.”
“평생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종속 계약으로 평생 따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훈련이 고되고 던전이라는 위험한 장소에 들어가야 하기는 했지만 그 이외에는 카일만큼 좋은 주인은 또 없었다.
노예를 사적으로 때리지도 않고 굶기지도 않고 오히려 잘 먹이고 잘 재웠다. 옷이나 신발 같은 생필품은 물론이고 의식주 전반을 빈틈없이 제공하고 있었다. 거기다 가끔은 오늘처럼 술과 고기를 베풀어 주었고 포상금까지 줬다.
이런 주인은 좀처럼 없었다.
“야아… 이걸로 뭘 하지?”
“크으으… 진짜 좋다. 진짜 좋아.”
“돈이라. 얼마 만에 만져 보는 거야?”
“난 골드는 처음이야.”
카일에게 2골드는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2골드는 거금이다.
어느 정도의 거금이냐 하면 이전에 호크가 부하 노예들 중에 리더가 되면서 받은 1골드도 아직 다 사용하지 못했을 정도다.
잡화점에 가서 작은 캔디를 한 꾸러미 사 와서 조금씩 아껴 먹는 호크였는데 그것만 해도 그에게는 큰 사치였다.
행복해하는 노예들을 보는 카일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흘러갔으면 좋겠네.’
* * *
던전에서 두둑한 수익을 올린 카일은 한동안 휴식을 취했다.
훈련은 쉬지 않고 매일 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발레리아와 서점에 간다거나 아리시아와 쇼핑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지부장이 키우고 있는 아우레나가 새끼를 낳았다. 무려 다섯 마리나 말이다.
그중에서 한 마리를 얻어서 가져오니 레이나가 난리를 쳤다.
“주인님. 너무 귀여워요.”
“우리가 계속 키울 건 아니야. 오웬 씨가 올라올 때까지 일단 맡아만 두는 거지.”
“그래도…그래도 너무 귀여워요.”
레이나는 작은 강아지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걸 보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귀여워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작고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모양이다. 정작 카일의 눈에는 그런 그녀가 가장 귀여웠지만 말이다.
그렇게 며칠 정도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사람이 찾아왔다.
“카일 씨죠? 저는 오웬 파티장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 그렇군요. 오웬 씨가 던전에서 올라오신 모양입니다.”
“예. 바로 어제 올라왔습니다. 약속을 언제 지킬 수 있는지 물어 보시더군요.”
“오늘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카일의 말에 안내를 맡은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저하고 같이 오웬 파티장님에게 가주실 수 있을까요?”
“예. 지금 어디에 계시죠?”
“아마 클랜 본부에 계실 겁니다.”
“바로 준비하죠.”
그렇게 해서 카일은 강아지를 데리고 오웬을 찾아서 스톰 클랜의 본부로 찾아가기로 했다.
“잘 가. 가서 건강해야 돼. 꼬마야.”
레이나는 강아지와 헤어지는 게 몹시 섭섭해 보였지만 애써 웃으며 이별했다.
카일은 그 모습에 쓰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스노우에게 말했다
“스노우, 너도 새끼가 가는데 섭섭하냐?”
컹!
스노우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개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도록 하자.
스톰 클랜으로 안내를 받은 카일은 바이에른의 도시 성벽 밖으로까지 나가 버렸다.
수천 명의 클랜원을 거느리고 있는 스톰 클랜이 다 머물기에는 도시 안은 너무 작았기 때문에 그들은 도시 밖에 자신들의 요새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클랜원들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해서 카일이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었다.
요새를 빙 둘러싸고 있는 높은 목책과 그 사이에 만들어져 있는 보초용 망루. 목책 바로 앞에 도착해서 보니 해자도 파여 있었다.
입구에 도착하니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이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군사 요새 수준인데?’
신원을 체크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펼쳐진 것은 더 놀라운 광경이었다.
공용 기숙사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몇 개나 지어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축구를 해도 괜찮을 정도로 커다란 연병장이 몇 개나 있었다.
그곳에는 클랜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개인 훈련을 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수백 명의 병력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훈련도 있었다.
진짜 군사시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굉장하군요. 생각하던 것 이상의 규모입니다.”
카일이 감탄하자 안내를 맡은 남자가 말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바이에른 최강의 클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이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에는 강한 자부심이 보였다.
카일이 안내받아서 도착한 곳은 오웬의 사무실이었다.
“오웬 파티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들어와.”
그리고 카일이 들어가자 오웬은 반갑게 맞이했다.
“오, 자네군.”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카일은 고개 숙여서 인사 했고 오웬은 그런 카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피차일반이지. 그래. 9층에서는 재미 좀 봤나?”
“예. 덕분에 괜찮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앉지. 음료는 뭘 마실 텐가?”
“뭐든 상관없습니다.”
“음, 홍차 두 잔 가져와.”
“예. 파티장님.”
그 사이에 카일은 일단 거래를 마쳤다.
“이 녀석이 전에 말씀 드렸던 스노우의 새끼입니다.”
“호오오, 그래? 어디 보자.”
오웬은 강아지를 손에 들고 살펴봤다.
강아지는 조금 불편한지 버둥버둥 거리다가 이윽고 오웬의 손가락을 깨물며 반항했다. 그래 봐야 아프기는커녕 가렵지도 않았지만 카일은 혹시 몰라서 바로 변호를 했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활발한 녀석이더군요. 탐색견으로서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흠, 그렇군. 이 녀석 엄마가 길드 지부장의 개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잘 알겠네.”
그건 그것대로 작은 인연으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오웬은 생각했다. 사실 지부장이 자기 개를 끔찍하게 아끼는 팔불출 개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작은 인연 정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강아지의 이름은 지었나?”
“아직입니다. 오웬 씨가 주인이 될 테지 직접 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군. 차차 생각해 보겠네.”
그리고 오웬이 강아지를 내려놓자 강아지는 방안을 뽈뽈거리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카펫을 질겅질겅 물기 시작하는 놈을 보고 오웬은 피식 웃었다.
“호기심은 진짜 왕성하군.”
“그렇죠. 아! 훈련 방법이 적힌 책자도 가져왔습니다. 부하에게 시켜도 되지만 가능하면 직접 하시기를 권합니다.”
“알겠네.”
이것으로 거래는 모두 마쳤다.
이제 볼일은 끝난 샘이지만, 그렇다고 바로 헤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카일은 오웬과 자리를 마주하고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클랜의 규모가 대단하군요.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새삼 감탄했습니다.”
“하하하. 그렇지? 바이에른 최고라는 간판은 허투루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을 운용하려면 상당한 돈이 들 텐데, 던전에 대규모로 들어가면 그렇게 많은 수익을 올리는 겁니까?”
“뭐, 던전에서 올리는 수익도 있지만 용병길드에도 등록 되어 있으니 거기서 올리는 수입도 있지. 그리고 운영하는 상단도 좀 있고, 그 외에 자잘한 사업도 꽤 하는 걸로 알고 있네.”
“안 하는 게 없다는 말이군요.”
“하하하. 그렇지 덩치가 커지면 아무래도 여기저기 손을 많이 뻗게 되는 것 같아.”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손 안 대는 분야가 없는 대기업 같은 건가?’
대강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납득할 수 있었다.
“스톰 클랜은 정말 대단합니다. 언젠가 저도 이런 클랜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