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카일은 배낭을 내려 두고 휴식을 취했다. 다른 이들도 교대로 당번을 정해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인님. 주인님.”
카일은 아리시아가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예. 아무래도 8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목적인가 봅니다.”
“그래, 그렇군.”
카일은 일어나서 무기를 챙겼다. 그리고 다른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손님이 온다. 모두 일어나서 준비해.”
카일의 말에 일행은 능숙하게 일어나서 자리를 잡았다.
“내 이름은 오웬이다. 10인조 파티를 이끌고 있는 파티장이다. 그쪽에 용무가 있어서 접근하고 있다.”
상대편은 던전에서의 암묵적인 규칙에 충실하게 멀리서 외쳤다.
카일 역시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내 이름은 카일. 15인조 파티를 이끌고 있다. 무슨 용건으로 오고 있는 건가?”
그러자 상대편에서도 대답이 돌아왔다
“8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목적이다. 괜찮다면 접근을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려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다. 그동안 기다려 달라.”
그러나 상대편이 말했다
“우리는 입구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회복한 후에 내려가려고 한다. 가능하면 휴식처를 공유했으면 한다.”
입구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음 층으로 내려간다. 라는 전략을 선태한 건 카일만이 아니었다. 저 오웬이라는 모험가도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카일은 순간 내키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양보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독점한다고 하면 싸움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좋다. 대신 서로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했으면 한다.”
“상관없다. 그럼 지금부터 천천히 접근하겠다.”
그리고 멀리서 상대편이 천천히 다가왔다.
오웬이라는 모험가를 필두로 나타난 열 명의 모험가들은 딱 봐도 한 가닥씩 하게 생겼다.
‘7층을 주 무대로 활동한다는 것은 저 치들도 트롤을 잡을 수 있는 힘 정도는 있다는 거겠지.’
카일은 방심하지 않았다.
숫자는 이쪽이 많았지만 카일의 파티에 있는 열 명은 모험가라기보다는 아직 짐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편에는 제법 무장이 좋은 전사들에 노련해 보이는 도적과 아처, 그리고 마법사도 있었다.
그중에서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터프한 이미지의 남자가 카일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오웬이다. 휴식처를 공유해 줘서 고맙다.”
“카일이다. 별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파티원들 간에 불필요한 접촉은 피하도록 하지.”
“물론이다.”
그렇게 양쪽 모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했다.
* * *
휴식을 취하는 도중 오웬은 카일의 파티에 수녀인 레이나가 있는 것을 보더니 인상을 폈다.
“제대로 된 파티로군.”
“믿음이 가는 건가?”
“적어도 신관이 포함된 인간 사냥꾼 같은 것은 없지 않나?”
오웬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파티에 신관이 있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득 중에 하나였다. 파티에 대한 신뢰도.
신관이라고 모두 선량하고 순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켜야 할 계율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신관을 데리고 노골적인 살인 강도질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카일은 오웬이 자신을 믿어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반대로 카일이 오웬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그때 오웬이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말했다.
“스톰 클랜의 오웬이다. 이거면 내 신용도 조금은 올라가려나?”
“아, 클랜 소속원이셨군요.”
카일은 말을 살짝 높였다.
스톰 클랜은 바이에른을 꽉 잡고 있는 대형 클랜이며 이 던전의 최하층을 공략하는 명문 클랜이기도 하다.
대형 클랜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조금은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대하면 곤란한 상대라는 거지.’
그래서 카일은 겉으로나마 경계를 푸는 모습을 보여 줬다.
“내가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아 보이는데 말을 좀 편하게 하지. 괜찮나?”
“상관없습니다.”
던전에서 모르는 파티를 만났을 때는 우선 경계하고 얕잡아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말도 최대한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말하는 법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만난 사신처럼 말이다.
바꿔 말하면 양쪽의 파티장이 서로 말을 편하게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대편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덕분에 양쪽 파티의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고 카일은 오웬과 한쪽에서 대화를 나눴다.
“스톰 클랜은 지금 최하층을 개척 중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응? 그거야 얼마 전의 일이지. 작년 말에 돌아와서 지금은 재정비 기간을 가지고 있지.”
“작년 말이라면 제가 마침 영지를 비울 때로군요.”
“그랬었군.”
“던전 개척의 공략은 성과가 있었습니까? 틀림없이 지금 공략하고 있는 게 15층이었죠?”
“그렇지. 뭐……. 자세한 말 못해 주겠지만 역시 15층은 어렵더군. 이번 원정도 실패했어.”
“스톰 클랜의 힘으로도 공략이 실패했단 말입니까?”
“그래. 자세한 사정은 말해 줄 수 없지만, 뭐, 15층은 역시 만만치 않다고만 알아두게.”
“대단하군요.”
지금 바이에른의 던전은 스톰 클랜이 최하층을 개척하고 있고 현재는 15층을 뚫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수많은 인력과 우수한 인재를 다수 보유한 스톰 클랜에서도 던전의 최하층을 돌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네도 제법이군. 지금 나이가 몇이지?”
“해가 지났으니 이제 열여덟입니다.”
“하하하.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는데 벌써 파티를 이끌고 7층까지 내려오다니. 아주 제법이야. 장래가 기대되는걸?”
“제가 아니라 파티원들이 유능하기 때문이죠.”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파티장의 능력이지. 모험가에게는 실적이 전부라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일과 오웬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상대편의 파티원들은 자꾸만 카일의 파티를 흘깃흘깃 바라봤다.
“와아…. 진짜 너무하네.”
“너무 심하게 비교 되지?”
“진짜 다 때려치우고 파티 바꾸고 싶다.”
명문 클랜인 스톰 클랜에 소속되어서 지하 7층까지 내려올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파티를 바꾸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누가 제일 나아?”
“나는 붉은 머리에 여기사 타입의 여자. 완전 섹시해.”
“난 금발에 늘씬한 궁수 여자. 진짜 인간이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거냐?”
“난 옆에 귀여운 수녀님. 어쩜 사람이 저렇게 귀엽고 깜찍하지?”
“뭘 모르네. 저기 붉은 머리 언니를 봐라. 도발적이고 고고한 분위기의 여자. 저런 여자가 일단 사랑에 빠져서 나한테만 상냥하고 부드럽게 다가와 주면 얼마나 행복하겠냐?”
“다 필요 없다. 저기 저 궁수 아가씨 보이냐? 그냥 다 필요 없고 예쁨의 화신 같아. 맹세코 내가 태어나서 본 여자 중에서 제일 예쁘다.”
“나는 무조건 수녀님. 진짜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막 보호해 주고 싶어. 저 수녀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산채로 오거한테 씹혀도 좋아.”
오웬 쪽의 파티는 완벽한 남탕이었다.
남자 전사, 남자 도적, 남자 궁수, 남자 마법사.
그야말로 남자에 남자를 더한 남자들만의 파티였다.
스톰 클랜에 여자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간부 중에도 유능한 여자 모험가들이 있다. 하지만 오웬이 이끌고 있는 이 파티는 슬프게도 남자들뿐이었다.
그런 이들이 앞에 아리시아와 발레리아 그리고 레이나까지 포함된 카일의 파티는 로망을 넘어서 그야말로 판타지였다.
뭐, 보는 건 자유다.
보고 망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행복해 하는 것도 역시 자유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카일과 오웬이 좀 일상적으로 대화를 하는 사이 그들 중에 누군가가 아리시아에게 다가갔다.
“저기, 안녕하십니까? 저는 스톰 클랜에 정규 멤버인 라이언이라고 합니다.”
“예. 그러시군요.”
아리시아는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 아리시아의 표정에서 이미 철벽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남자는 용감하게 들이댔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던전 공략이 끝나고 나서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눈에 반했…….”
“죄송하지만 저는 주인님의 노예입니다.”
아리시아는 상대방의 말을 싹둑 잘라버리고 덤으로 희망도 잘라 벌렸다.
“노, 노예…시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 모두 주인님에게 귀속된 노예입니다.”
아리시아는 몹시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고 그런 아리시아의 행동에 오히려 말을 건 남자가 당황했다
‘노예가 그렇게 기쁠 일인가? 아니 그보다……. 무슨 노예가 이렇게 당당하지. 비굴한 기색이 일절 없잖아?’
노예를 던전에서 보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다. 스톰 클랜 안에서도 전투 노예로 이뤄진 부대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예는 아무리 강하고 유능하다고 해도 노예 티가 난다. 어딘지 모르게 소극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에 무엇보다 눈빛부터가 비굴하다.
그러나 아리시아의 눈빛은 몹시 당당했다.
자신이 노예라는 것에 당당한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당황한 그는 쩔쩔매다가 말했다
“그, 그러시군요. 실례했습니다.”
라이언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정중하게 아리시아에게 사과했다.
아리시아가 노예라고는 하지만 막연하게 깔보고 무시할 수는 없다. 자신이 소유한 노예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노예일 경우 싸움의 단초가 된다.
만약 카일이 아리시아를 평범한 노예 이상으로 아끼고 있는 경우 다른 사람이 아리시아를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에 날카롭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아끼고 사랑하겠지. 저렇게 아름다운 노예라니……. 귀족들 애첩을 봐도 저만큼은 아니었는데.’
라이언은 다시 한번 아리시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그냥 얼굴이나 몸매가 완벽한 걸 넘어서 분위기마저도 아름다운 느낌이 들었다. 이 어두컴컴한 던전에 한 떨기 꽃이 피어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노예라면…….
‘아아… 진짜 오랜만에 부럽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간 라이언은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동료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너네 왜 그래?”
“그러는 너는?”
“너희들이야말로 왜 그러는데?”
“왜긴 왜야? 뻔하지.”
“하아아… 전멸이구나.”
“그런 모양이다.”
셋은 서로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동료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언이 먼저 아리시아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은 다른 두 명의 동료들도 발레리아와 레이나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뻔했다.
“저 아가씨 노예래. 와아… 어떻게 저런 미모의 노예를 던전에 데리고 왔지? 나라면 집에 꽁꽁 숨겨 두고 밖에 보내지도 않겠다.”
라이언이 먼저 고백을 하자 다른 두 명이 깜짝 놀랐다.
“저 아가씨도?”
“저 아가씨도?”
두 명이 동시에 하는 말을 듣고 라이언은 깜짝 놀랐다.
“야, 설마 너희들도……?”
“저기 붉은 머리 아가씨도 노예라고 하던데? 원래 기사 출신이 아니냐고 물어봤는데 기사 출신이 맞고 지금은 노예래.”
“허어어… 그럼 저기 수녀님은? 수녀님이 노예일 리는 없잖아?”
“아니, 노예 맞다던데?”
“뭐?”
“뭐라고 하더라? 큰 은혜를 입고 신의 뜻에 따라서 노예로서 주인님을 섬기기로 했다고 하던가. 어쨌든 노예 맞데.”
“…세 명다 노예라고?”
“그렇게 되겠지.”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들을 세 명이나 거…느리고 있는데 모두 노예라고 그럼… 그럼 저기 저 카일이라는 파티장은…….”
“복 터져 죽일 놈인 거지.”
“이미 인생의 승자인 거지.”
“제길, 부럽다.”
“큭, 말하지 마. 남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처지만 더 비참해지는 그런 말을 그만 해.”
“네가 말 걸었잖아. 이 미친놈아!”
“맞아. 다 이 새끼 때문이야.”
“잡아. 거꾸로 매달아서 주리를 틀어버리게.”
그렇게 오웬의 파티는 부러움에 몸서리치면서 절망했고, 애꿎은 동료 한 명만 족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