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카일은 파티원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계획의 대부분은 카일이 혼자 결정하고 노예들은 그저 따를 뿐이지만 그래도 같은 일을 해도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8층이 까다롭고 힘든 곳인 건 알지만 모두 충분히 알고 준비해 주기 바란다. 가능하면 8층에서 머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레이나.”
“예. 주인님.”
“수녀인 네가 던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비가 필요하지?”
그런 카일의 말에 레이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실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신성력은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신성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성구가 있는 편이 좋습니다.”
“성구라……. 그건 어디서 구하지?”
“신전에 가서 신도들에게 파는 로자리오를 구입해 오면 됩니다.”
“그렇군. 바이에른에 레테 여신의 신전이 있었던가?”
“바이에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차로 이틀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영지에 가면 레테 여신의 신전이 있습니다.”
“좋아. 그럼 사람을 보내서 구입해 오도록 해. 레이나, 혹시 직접 가서 물건을 보고 와야 하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축복을 받은 성구이기만 하면 뭐든지 상관없습니다.”
“좋아. 검은 바람.”
“예. 애들을 보내겠습니다.”
다른 영지까지 가서 물건을 사오는 심부름이라면 서로 못가서 안달일 것이다. 적어도 그 동안은 지옥 훈련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성구 이외에 필요한 건 딱히 없다고 했지?”
“예. 주인님.”
“흐음, 혹시 모르니 옷 안에 받쳐 입을 수 있는 체인 메일 정도는 걸치는 게 좋겠군.”
“갑옷이… 필요할까요?”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나아. 걸을 때 체력이 좀 소모되기는 하겠지만 만약의 순간 목숨을 구할 수도 있어.”
“예. 그렇다면 주인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무기는… 필요 없을까?”
“준다고 해도 다루는 방법을 모릅니다.”
레이나의 말에 카일은 검은 바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단련시킬 수 있겠어?”
“글쎄요. 흐음…….”
검은 바람은 레이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관찰하다가 말했다.
“주인님의 은총 덕분에 골격의 균형은 완벽하게 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단련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근육량도 부족해 보이고요.”
“전투에 관해서는 재능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군.”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설령 단련해도 제대로 된 병사 한 사람 몫을 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검은 바람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리아를 바라봤다.
“네 소견은 어때?”
“저 역시 검은 바람과 같은 생각입니다. 사실, 무술에 소양이 있었다면 진작 신전에서 그녀를 팔라딘이나 몽크 같은 쪽으로 발탁했을 겁니다. 그러지 않았다는 말은 애초에 무술 쪽으로는 재능이 없다는 말이겠죠.”
발레리아의 말에 레이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치라는 말은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어요. 청소하다가 화병 같은 것도 많이 깨 먹었고…….”
아무래도 레이나에게 실질적인 전투 능력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최대한 보호하면서 움직여야겠군.’
카일은 그녀에게 반드시 체인 메일을 입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 같아서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히고 싶었지만 그걸 입히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 * *
며칠 후, 카일은 레이나의 장비를 모두 맞췄다.
레테 여신의 신전에서 받은 성구 로자리오를 가슴에 걸고 안에는 얇은 체인 메일을 걸치고 그 위에 연한 검정색의 수녀복을 입혔다.
그렇게 입히고 나자 그녀는 영락없는 신관의 모습이 되었다.
“잘 어울리는군.”
“감사합니다. 주인님.”
레이나는 오랜만에 입어 보는 수녀복이 어색한지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장비를 다 챙기고 파티원은 던전에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
카일은 파티원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말했다.
“계획은 이렇다. 첫날에는 7층까지 내려간다. 그리고 8층으로 가는 입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다음 날 8층으로 진입하여 그날 안에 9층으로 내려간다.”
“주인님. 그렇게 하면 9층으로 내려가는데 이틀의 시간이 걸리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체력이 떨어진 시점에서 8층의 늪지대를 헤매다가 곤란함을 겪는 것보다는 낫다.”
“올라올 때도 같은 페이스로 이틀에 나눠서 올라가는 겁니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알겠습니다.”
카일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 던전에서 목표는 9층의 듀라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녀인 레이나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행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레이나에게 쏠렸고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두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일행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보통 신관이나 마법사라고 하면 특권 직업이라고 할 정도로 귀중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오만한 성격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레이나의 경우 원래 성격이 착하기도 하고 신분도 자신들과 같은 카일의 노예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대하기가 한결 쉬웠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수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녀님이 걸림돌이 될 리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혹시 위험하더라도 던전 안에서는 저희가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파티원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대로 레이나는 최우선 보호 대상이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만큼 그녀의 보호 순위는 나 이상이다.”
“주인님 이상으로 말입니까?”
“그래. 예를 들어서 나와 레이나가 동시에 위험에 빠진다면 레이나를 우선해서 구해라.”
카일의 말에 아리시아가 당황해서 말했다.
“주인님 그건 너무…….”
“아니, 그렇게 해라. 그게 옳다.”
“어째서죠?”
“만약 내가 부상에 당하고 레이나가 멀쩡하다면 레이나가 회복 능력으로 나를 치료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레이나가 다치면 일행 중에 누구도 그녀를 치료해 줄 수가 없다.”
“으음…….”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는 힐러를 최후까지 보호할 것. 이건 지금부터 내 파티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특수한 예외 상황이 아닌 이상 모두 염두에 두고 행동하도록.”
“예. 주인님.”
“예. 주인님.”
카일은 파티원들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다른 질문이 없다면 출발하겠다. 질문은… 없나 보군. 스노우.”
카일은 마지막으로 한쪽에 앉아 있는 스노우까지 불렀다. 최근 먹고 교미하고, 먹고 교미하고만 반복했던 스노우는 오랜만에 던전에 들어가는 것을 아는지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좋아. 가자.”
그렇게 오랜만에 카일이 던전으로 들어갔다.
총 인원 15인 하고도 한 마리의 규모였다.
* * *
일단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1층과 2층까지는 간부들은 나서지도 않고 열 명의 파티원들만이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호크 분대장님. 앞에 홉고블린 두 마리입니다.”
“벽으로 둘러싸. 포위해서 없애버려.”
“예.”
카일이 없는 동안 발레리아가 열심히 훈련시킨 성과가 있는 걸까? 열 명의 부하들 중에 다섯 명은 전방에 서고 다섯 명은 후방에 섰는데 앞에 서있는 다섯 명만으로도 2층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타워 실드를 서로 겹쳐서 벽을 만들고 적을 압박하면서 중심이 무너지면 숏 소드로 찔러 죽이는,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전술을 잘 구사하고 있었다.
원래는 그냥 일꾼 노예였던 이들을 이렇게 훌륭한 병사로까지 훈련시키는 과정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훌륭하군. 수고가 많았어, 발레리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카일은 발레리아의 공적을 알아줬고 그녀는 자신의 주인인 카일의 칭찬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3층의 코볼트 부터는 검은 바람이 앞으로 나섰다.
부하들이라고 해도 코볼트를 감당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전열을 갖추고 침착하게 싸운다면 코볼트를 상대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다만, 고블린이나 홉고블린에 비해서는 시간이 좀 걸렸다. 훈련이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서 검은 바람이 가장 앞에 서서 그냥 다 쓸어버린 것이다. 그저 앞에서 태도를 몇 번 휘두르기만 하면 사나운 코볼트도 짚단처럼 쓰러져갔다.
“검은 바람 씨는 정말 강하군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이걸 처음 보는 레이나는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 이 둘이 우리 파티의 에이스지.”
“에이스?”
“실력이 좋다는 말이야.”
“아아… 그렇군요.”
레이나의 입장에서 카일은 가끔 이해 못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4층.
별로 힘들건 없었지만 그래도 짜증나는 악취 때문에 힘든 장소였다. 그런 힘겨운 공간에서, 레이나는 태연히 자신의 로자리오를 양손으로 잡고 짧게 기도했다.
“퓨어.”
화아아악―
그 순간 레이나의 몸을 중심으로 은은한 빛이 번져 나갔고 코를 찌르던 악취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레이나 이건?”
“간단한 정화입니다. 보통 시체가 많은 묘지에 가끔씩 걸어 주는 축복이죠.”
“효과는 뭐지?”
“여신의 섭리로 더럽고 부정한 것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 버립니다.”
“썩은 냄새가 사라진 건 왜지? 탈취 효과도 있나?”
“음, 아마도 언데드에게 근원한 사취이기 때문일 겁니다.”
“호오오… 이거 좋군.”
카일은 상당히 좋아했다.
이거면 레이나가 축복을 유지하는 동안은 4층의 구울 따위는 접근도 못한다는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코를 찌르는 썩은 냄새가 사라지는 것만 해도 상당했다. 지금은 카일도 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진짜 토할 것처럼 역겨운 냄새였다.
“다행이군. 이 축복은 얼마나 유지할 수 있지?”
“하급의 축복이니 두 시간은 갑니다. 그리고 하루에 다섯 번은 쓸 수 있어요.”
“충분하군.”
일행은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4층을 돌파했다.
레이나 한 명이 있음으로 인해서 4층은 사실상 프리패스나 다름없이 통과한 것이다.
5층.
“여기서부터는 긴장해, 레이나.”
“예. 주인님.”
카일은 레이나에게 주의시킨 후 부하들 중에서도 분대장을 맡긴 호크에게 말했다
“호크.”
“예. 주인님.”
“다섯, 아니 여섯 명을 동원해서 레이나를 감싸 철저하게 보호해라.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된다.”
“예. 주인님.”
“검은 바람은 전방, 발레리아는 후방. 아리시아는 나와 함께 행동한다.”
“예. 주인님.”
일행은 익숙하게 대열을 정비하고 전진했다.
사실 레이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조금 더 신경 써서 움직이는 것을 빼면 항상 다니던 5층일 뿐이다.
“취이이익! 취익!”
오크들은 거칠게 달려들었지만 검은 바람의 입장에서는 오크나 코볼트나 그게 그거였다.
그냥 써는 맛이 조금 더 있다는 약간의 느낌 차이가 있었을 뿐.
“레이나 잘 따라오고 있어? 체력은 어때? 더 걸을 수 있겠어?”
“예. 아직 괜찮아요. 주인님.”
“좋아. 검은 바람 좀 더 이동 페이스를 올린다.”
“예. 주인님.”
검은 바람은 착실하게 전방에 서서 적을 정리했고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어서 6층을 돌파하고 일행은 7층까지 도달했다. 4층을 편하게 통과해서 그런지 이전보다 이동 속도가 더 빨랐다.
7층에 도착하고 나서는 이전에 찾아 놨던 8층으로 내려가는 입구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에 스노우가 한 번 트롤을 찾았는지 격렬하게 반응했다.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그냥 지나치기는 아깝지. 가보자.”
“예. 주인님.”
일행은 잠깐 경로를 이탈해서 스노우가 이끄는 대로 트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컹컹! 컹컹!
컹컹! 컹!
발길을 돌린 방향에서 스노우뿐만 아니라 다른 개의 짓는 소리도 아련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 소리와 트롤의 괴성까지 들렸다.
“이런, 늦었나?”
카일이 안타까워하자 옆에서 발레리아가 말했다.
“최근 7층에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탐색이 빠르고 편해진 만큼 겹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거죠.”
“쯧, 어쩔 수 없군. 물러나자.”
결국 카일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중간에 조금 시간을 허비하기는 했지만 일행은 8층으로 내려가는 입구까지 도착했다.
여기가 첫날에 정해 둔 목적지인 것이다.
“좋아. 여기서 휴식을 취한다.”
카일의 말에 일행은 짐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부하들은 경계를 위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까지 횃불을 걸어 두고 소리가 울리는 트랩까지 설치했다.
이 모든 과정을 예전에는 검은 바람과 카일 둘이서 해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참 편해졌어.’
확실히 머릿수가 늘어나니 탐색이 많이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