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컹! 컹컹!
집으로 돌아간 카일을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은 어느새 완전히 성견이 된 스노우였다.
“오오, 이 녀석 덩치 커진 것 좀 봐.”
카일은 반갑게 달려드는 스노우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일이 떠날 무렵에는 진돗개 정도의 중형견 사이즈였는데 이제는 일어서면 카일의 어깨에 앞발이 닿을 정도의 대형견이 되었다.
‘이게 다 큰 사이즈인가? 더 크면 좀 곤란한데 말이야.’
지금 스노우의 크기는 지구의 개로 치면 말라뮤트와 그레이트 덴의 중간 정도 되었다. 하지만 하얀 털이 풍성하게 나있어서 실제로는 더 크게 느껴졌다.
카일이 스노우를 귀여워해 주고 있는 사이 다른 이들도 카일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오, 주인님 오셨군요.”
“주인님, 드디어… 드디어 오셨군요.”
하나둘씩 나타나는 이들은 열 명의 신입 노예들이었다.
‘호오, 얼굴들이 제법 다부져졌어. 이제는 신입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었어요.”
“정말, 정말… 힘들었어요.”
“주인님.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니, 실제 죽을 뻔하기도 했어요.”
좀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카일에게 신입들의 하소연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그동안 발레리아가 제법 혹독하게 굴린 모양이다.
뒤이어 집안의 문이 열리더니 드디어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기사가 등장했다.
“무슨 소란들이야. 자율 수련이라고 너무… 주인님?”
“다녀왔어.”
카일이 말하기 무섭게 발레리아는 한걸음에 달려와서 카일의 품에 안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걱정했잖아요!”
“두 달 정도였잖아?”
“해가 변했다고요. 그런 말은 못 들었단 말이에요!”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발레리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초행길이라서 이 정도로 오래 걸릴 줄은 몰랐거든.”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이에요…….”
발레리아는 카일이 없는 동안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카일이 없는 나날이 길어지자 외로움에 지쳐가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카일이 나타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부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주변의 부하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발레리아 교관 맞아?’
‘혹시 우리한테 숨겨둔 쌍둥이 자매가 있었나?’
그런 이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발레리아는 카일의 품안에 안겨서 떨어지지 않았다.
“크흠, 오랜만이군. 발레리아.”
그런 발레리아가 카일의 품에서 떨어진 것은 검은 바람이 말을 건 후였다.
“음… 으음, 자네도 오랜만이군. 잘 다녀왔나. 검은 바람.”
그제야 그녀는 카일의 품안에서 나와서 평소와 다름없는 기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래 봤자 이미 주변의 부하들은 실실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뭐 하고 있어? 이 자식들아! 주인님이 오셨는데 빠져 가지고……. 짐부터 들어 드려!”
“예…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쪽으로 주십시오.”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그런 노예들을 보고 카일은 웃으며 말했다.
“목욕 후 식사부터 해야지 그 전에…….”
카일은 그제까지 검은 바람의 뒤편에 가려져 있던 레이나를 전면에 내세우고 말했다
“레이나라고 한다. 앞으로 우리의 동료가 될 거고, 중급 수녀이다.”
“안녕하세요. 레이나라고 합니다. 자애와 조화의 여신 레테님을 모시고 있는 수녀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특히 발레리아는 크게 놀라서 말했다
“주인님, 해적 출신 중에 노예를 구하기 위해서 가신게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예정이 좀 바뀌어서 말이야.”
어떻게 예정이 바뀌면 해적 노예가 수녀로 변할 수 있는 걸까?
카일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녀는 수녀이지만 일단 내 노예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다. 파티 내에서의 서열은 검은 바람과 동열의 간부로 한다.”
카일의 말에 다른 이들은 모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연약하고 귀여운 소녀로 보이는 레이나였지만 그녀가 수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신관인 그녀가 자신들보다 늦게 들어왔다고 신참 취급을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좀 씻고 싶군. 식사는 그 후다.”
“예, 주인님. 애들아. 욕탕에 물 받아 놔라.”
“예, 교관님!”
“수녀님의 방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임시로 아리시아와 같은 방을 쓰고, 차후에 다시 생각해 보자.”
“예. 주인님.”
* * *
“하아아아아…….”
오랜만에 자신의 집에 돌아와서 욕탕에 몸을 담구니 카일은 전신이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원래 아리시아나 발레리아가 욕실에서 카일의 시중을 들어주고자 했지만, 오늘은 모두 거절했다.
‘그 둘이 들어오면 휴식으로는 안 끝나니까 말이야.’
지금은 그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구고 쉬고 싶었다.
그래도 너무 오래는 씻지 않았다. 뒤에 다른 사람들의 차례도 있으니 말이다.
10분 정도 몸을 탕에 담구고 있던 카일은 그 후에 간단하게 몸을 씻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 썼다. 이제 욕실 써도 돼.”
“예, 주인님.”
카일 다음에는 검은 바람이 들어갔다.
“너희들이 먼저 사용해도 되는데 말이지.”
“저희는 한 번 들어가면 오래 걸리거든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마.”
그렇게 검은 바람이 탕에 들어가고 역시 10분 만에 나왔다.
그리고 이 후에 들어간 아리시아와 레이나는…….
“하아아아… 이건, 정말 좋군요.”
“예. 저도 집을 떠나서 이게 가장 그리웠어요.”
두 사람은 말 그래도 뜨거운 욕탕 안에서 녹고 있었다.
레이나는 수녀로 살 때도 목욕은 거의 한 적 없었다. 필요하면 씻을 수는 있었지만 대부분 차가운 우물을 몸에 끼얹는 정도였다.
겨울에는 그럴 수 없어서 물을 뜨겁게 데워 사용하기는 했지만,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좀처럼 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뜨거운 물을 몸을 커다란 욕조에 담아서 그 안에 몸을 담구고 피로를 푸는 것은 사실 이 세계에서는 꽤 큰 사치였다.
“후우우… 주인님하고 오라버니는 먼저 했으니 우리는 천천히 즐기죠.”
“그래요. 그럼 모처럼이니…….”
레이나는 따뜻한 온수가 전신을 감싸주는 나른함에 취해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그렇게 실컷 목욕을 즐긴 후 둘은 욕실을 나왔다
“이리 오세요. 머리 말려 드릴게요.”
“고마워요, 아리시아”
여자들은 다 씻고 나서도 손이 많이 갔다.
드라이어도 없는 세계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엉키지 않게 빗질을 하는 것만 해도 꽤 정성이 들어간다.
아리시아는 레이나의 벌꿀색의 금발을 정성껏 관리해 주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머리카락에 빛을 반사하는 것 같아요.”
“무슨… 아리시아야 말로 나보다 훨씬 예쁜걸요.”
“고마워요.”
아리시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여자로서의 가치가 올라가고 그게 주인인 카일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면 그녀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카일의 위주로 생각하는 아리시아이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리시아이기에…….
“오늘은 잘 부탁해요. 주인님은 특별히 이상한 취향은 없으시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응해 주세요.”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빗어 주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시아의 말에 레이나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꼭… 그래야 하나요?”
“당연하죠. 딱히 레테 여신의 신관님은 결혼이나 연애가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아니긴 하죠.”
신관이라고 해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질 수는 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사실 레이나 역시 노예 계약을 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놨었다.
카일이 원한다면 자신의 몸을 카일에게 바치는 것도 이미 각오한 바였다. 자신을 원한다고 한 마디만 하면 언제라도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님은 저한테 이성적으로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시는데요? 오는 내내 손도 대지 않으셨잖아요…….”
그렇다 오는 길 내내 카일은 아리시아와는 가벼운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하는 식으로 스킨십을 했지만 레이나에게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매너를 지키며 일정 거리를 두고 대하는 모습은 훌륭한 신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래서 레이나는 생각했다.
“주인님은 저한테 여자로서 무언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 수녀로서의 능력만 바라시는 것 같아요. 어쩌면 아리시아나 조금 전에 봤던 발레리아 씨에 비하면 제가 매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말에 레이나는 웃으며 말했다.
“설마요. 레이나 씨는 저나 발레리아 씨에게는 없는 매력이 있는걸요. 틀림없이 주인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오면서 저에게는 일절… 음.”
말을 하던 레이나는 두피에 통증을 느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던 아리시아의 부드러운 손길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잠, 잠깐만요. 아리시아. 제 머리카락이 아파요. 아리시아……?”
그러나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아리시아의 손은 점점 힘이 들어갔고 레이나의 고개가 서서히 위로 젖혀졌다. 레이나의 눈과 아리시아의 눈이 마주치고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설마 레이나 씨, 주인님을 배신하려는 건 아니죠? 그렇죠?”
“배신이라뇨? 아리시아, 무슨……. 앗, 아파… 아… 아파요……. 좀 놔주세… 으읏…….”
레이나는 아프다고 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꽉 쥐고 있는 아리시아의 손을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이 들어갔고 레이나는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리시아는 그런 레이나의 찡그린 표정을 마주하며 말했다.
“설마하니 당신의 인생을 나락에서 구원해 주신 주인님의 은혜를 잊고, 주인님의 자상함에 기대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아까워진 건 아니죠? 그렇죠? 절대 아니죠?”
“아리… 시아…….”
“그건 배신이에요. 주인님의 은혜를 몰라보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건 배신이죠. 나는 그런 어리석은 인물을 본 적 없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 배신자가 내 앞에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배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것이 될까요?”
“…….”
레이나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아리시아의 눈을 마주친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위, 위험해. 이 아가씨… 정상이 아니야.’
그녀가 마주친 아리시아의 눈에는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분노도 증오도 보이지 않는 그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레이나는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광신도 같아.’
아주 어린 시절.
레이나는 수녀원에서 잘못된 사교도에 발을 디뎌 광신도가 된 이들을 본적이 있었다.
자신의 믿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타인의 말은 절대 듣지 않은 채, 오로지 믿음과 광기만으로 가득한 그들의 눈빛.
화형으로 불에 타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자신들이 믿는 사교도를 향해서 믿음을 부르짖던 그들의 광기 어린 눈빛과 목소리.
지금 아리시아의 눈빛에서 그때의 광신도들과 비슷한 광기가 보였다.
‘무… 무서워.’
레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아리시아는 레이나를 향해서 계속 말했다.
“생각해 봐요. 주인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주셨잖아요? 인생을 다시 살게 해주셨고, 새로운 기회를 내려 주셨어요. 무엇보다 그렇게 큰 은혜를 내려 주셨는데도 우리를 노예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고 계세요. 이렇게 훌륭한 분은 세상에 또 없을 거예요.”
“나도… 나도 알아요. 카일 주인님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좋은 주인님이세요.”
그 부분에 동감하는 것은 레이나 역시 진심이었다. 그러자 아리시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역시 레이나 씨도 잘 알고 계셨군요.”
감정이 텅 비어 있던 것 같은 아리시아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레이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 주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오해했나 봐요. 생각해 보면 레이나 씨는 처음인데 조금 두려울 수는 있겠죠. 이해해요.”
“예… 고마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주인님은 자애롭고, 위대하고, 훌륭한 분이세요. 그런 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어요.”
“…그렇죠.”
“저라면 제 생명, 영혼, 육체 무엇이든지 다 바칠 수 있어요. 주인님이 바라신다면 무엇이든지요. 오라버니나 발레리아 씨도 같은 마음이죠.”
“…….”
“물론 레이나 씨도 그렇죠?”
“그…래요.”
“후후후. 맞아요. 그러니…….”
아리시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레이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예정대로 오늘밤은 레이나 씨가 주인님을 모시도록 하세요.”
“…예.”
“후후후. 좋아요. 여자로서 주인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주인님의 오른팔인 검은 바람 오라버니도 할 수 없는 영광이랍니다.”
“…예.”
“발레리아 씨도 아마 오늘밤 주인님을 모시고 싶으시겠지만, 제가 잘 설득할게요. 그러니 오늘은 레이나 씨가 모시면 돼요.”
“예.”
레이나는 오직 긍정밖에 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다듬어 주는 아리시아가 무서운 것이다.
카일을 향한 그녀의 마음에서는 충성심을 넘어선 어떠한 광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