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고통이 끝났다
레이나는 카일의 노예가 된 것을 후회할 정도로 진저리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아리시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이… 이런 짓을 해서 도대체 무슨…….”
“어머, 정말 예뻐지셨네요.”
“…무슨?”
“거울 보여드릴게요.”
아리시아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손거울로 레이나를 비춰 줬다.
“아… 아아…….”
레이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곳에는 나병에 걸리기 전의 자신.
아니, 그때의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하고 촉촉한 피부.
벌꿀색의 진한 금발의 머리카락.
초여름의 신록을 떠올리는 초록색의 눈동자.
천사라고 착각할 것처럼 맑고 청아한 이목구비까지…….
그녀는 거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워진 모습을 보고 넋을 잃었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물부터 좀 드세요. 땀을 많이 흘렸네요. 아! 옷도 벗으세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갈아입을 옷도 가지고 왔어요.”
아리시아는 레이나를 착실하게 돌봐 주면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 주었다.
* * *
“잘 된 모양이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막사 밖에서 카일과 검은 바람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막사에서 들리던 고통스런 신음이 끝나고 아리시아가 들어가서 둘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검은 바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의 능력은 정말 놀랍고 훌륭하지만 저 각성시의 고통만큼은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어지간히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또 겪을 일은 없다. 안심해.”
“어지간히 드문 경우로 겪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2차 각성이라고 해서 코어가 하나 더 생기는 경우가 있지. 그럴 경우 한 번 더 각성함으로 인해서 두 가지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크흠… 저는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잘 갈고 닦아서 주인님에게 힘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성의 고통은 강건한 전사인 검은 바람조차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검은 바람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뭐가 말이야?”
“레이나 양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말이죠. 주인님의 능력은 병과 부상을 치료하기도 하지만 외형조차 아름답게 바꿔주지 않습니까?”
“최적의 상태로 바꿔주는 거지. 뭐, 인체의 골격에서 어긋남이나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잡고 체지방량이나 근육량도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주니까… 그렇게 되다 보니 결과적으로 아름다워지는 것뿐이야.”
“얼굴도 바뀌던데요?”
“안면 골격도 골격이니까.”
“흠, 그렇군요. 어쨌든 레이나 양도 아름다워져서 나오겠군요. 주인님 입장에서는 좋은 일 아닙니까?”
검은 바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카일은 아니었다.
아리시아나 발레리아가 아름다워져서 누구보다 많은 이득과 행복을 얻고 있는 건 카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일은 검은 바람의 말에 마냥 긍정하지 않았다.
“이미 내 성적인 욕구는 아리시아와 발레리아가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고 있다.”
“그런가요? 둘이 미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들을 보면 눈이 가는 게 남자의 본능이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렇겠지. 하지만 내 경우를 생각해 봐. 아리시아는 청초하면서도 가녀리며 아름답지. 발레리아는 건강하면서도 탄력 있고 섹시하지.”
“확실히 서로 상반된 느낌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둘이긴 하죠.”
“그래. 난 이 둘을 통해서 여자의 매력이라는 것은 이미 다 충족된 느낌이야.”
사실 카일은 길에서 예쁜 여자를 봐도 드는 대부분의 생각은 아리시아가 더 예쁜데, 발레리아가 더 매력적인데 같은 생각뿐이었다.
“뭐, 주인님이 그렇게 만족하신다면야…….”
“그래. 이미 나에게 여자는 충분해. 지금 필요한 건 유능한 동료다.”
카일과 검은 바람이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아리시아가 레이나를 데리고 나왔다.
“주인님, 레이나 씨가 나왔어요.”
벌꿀색의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트린 채 아리시아의 어깨 정도까지 오는 조금 작은 키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 뽀얀 얼굴……. 레이나는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카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우우…….”
‘귀엽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타입의 미녀라니 이런 건 또 다르잖아.’
역시 여자는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 매력이 있는 법인 모양이다.
레이나는 아름다워졌다.
아니, 그보다는 예쁘고 귀여워졌다는 말이 맞을 것 같았다.
발레리아나 아리시아에 비해서 키가 조금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자의 평균쯤은 되었다. 오히려 다른 두 명이 여자 치고는 큰 편이었는데 레이나는 보통 여자들하고 비슷한 수준이었다.
레이나는 작은 키에 비해서 몸매는 또 월등해서 아리시아가 제법 품이 큰 옷을 입혔는데도 몸의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같은 금발이라고 해도 아리시아의 연한 금발과 달리 그녀의 금발은 색이 좀 더 진했다. 진한 벌꿀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뺨에 귀엽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카일을 보자마자 말했다
“주인님. 제 병을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리시아가 설명을 잘 해준 모양이군.”
“예. 주인님이 검은 바람 씨나 아리시아 양도 이렇게 고쳐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그리고 여기는 없지만 한 명 더 있지.”
“어떻게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나병은 신성력으로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인데.”
“내 고유 능력이야. 뭐, 자세한 건 비밀이니 너무 물어보지 마.”
“비밀인가요?”
“그래.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절대 비밀이야. 내 파티원이 전원 나와 노예 계약을 하고 있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카일의 사정이 그렇다면 너무 깊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보다 레이나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이렇게 치료해 준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할 뿐이었다.
카일은 이제 중요한 것을 확인해야했다.
“신성력은 어때?”
“신성력은…….”
레이나는 자신의 손을 뻗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끝에 은은한 순백색의 빛이 서렸다.
“아…….”
그녀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
한때 그녀의 자긍심이자 신앙심의 증거였던 신의 기적이 다시 자신의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 여신이시여.”
그녀는 양손을 가슴으로 모아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신성력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카일로서도 다행이었다.
사실 그녀의 병을 치료한다고 신성력이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저 병이 원인이었으니 치료하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그녀를 선택했던 것뿐이다.
만약 신성력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범하게 수련을 받으면서 초능력이 각성할 때까지 비전력 대기인원으로 취급해야 했을 것이다.
‘이걸로 다 잘됐군.’
던전을 공략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구하기 어려우면서도 가장 인기 있는 직종 둘을 꼽으라면 마법사과 신관이다. 평범한 파티에 쓸 만한 마법사나 신관이 들어가기만 하면 순식간에 파티의 전력이 확 오른다.
예전에 제스터라는 남자가 이끌던 파티가 트롤을 사냥할 수 있었던 것도 파티에 4서클 마법사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5층 정도가 적합한 수준의 파티원들을 단숨에 7층까지 데려가 준 것이 마법사라는 존재다.
그렇다면 신관은 어느 정도의 능력이 될까?
카일은 우선 그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가장 대표적인 능력은 치료와 정화입니다.”
“치료는 알겠는데, 정화는 뭐지?”
“정화는 삿되고 그릇된 존재들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리는 능력입니다. 언데드를 다시 시체로 되돌리고 마족에게도 대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그렇군. 그 외에는 어떤 능력이 있지?”
“축복으로 강화를 할 수 있습니다. 체력을 회복시킨다거나 졸음을 쫒아낸다거나 하는 식이죠. 아! 무기에 축복을 할 경우 언데드나 마족을 상대로 강력한 정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일반 몬스터를 상대로 공격적인 능력은 없나?”
“몽크나 팔라딘 같은 분들은 신성력으로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검사들의 오러와 같이요. 하지만 저는….”
“못 하는 건가?”
“예. 중급 수녀인 저로서는 무리입니다. 상급 수녀가 된다면 자기희생 공격 정도는 가능합니다만.”
“그런 찝찝한 능력은 됐어. 즉, 가능한 건 회복, 정화 그리고 축복 정도인가?”
“예. 제 힘이 미력해서 죄송합니다.”
“아, 그렇지는 않아.”
미력하다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카일의 파티에 전투력은 충분했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만 해도 7층에서 트롤을 간단하게 상대했고, 거기다 아리시아의 궁술도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 카일 본인도 오크 두세 마리 정도는 너끈하게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고 말이다.
이 시점에서 레이나가 합류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게 분명했다. 원래 노렸던 해적 출신의 노예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상황이었다.
‘될 놈은 된다는 게 이런 말이지.’
카일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레이나.”
레이나는 진심으로 카일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 * *
카일은 눈으로 소복하게 덥힌 바이에른의 전경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길었다.”
“이제 도착했군요.”
칸테나로 가기 위해서 바이에른을 출발했던 것이 대륙력 523년 11월이었다.
그리고 지금 지금은 해가 바뀌어서 대륙력 524년 1월이다. 카일도 이 정도로 일정이 길어질 줄은 몰랐다.
“정말 길었군.”
“하지만 성과가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레이나를 노예로 구입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을 넘어서 천운이었다.
보통 신관을 파티로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신관을 종속 마법으로 엮어서 노예로 들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신관 자체가 노예로 잘 떨어지지 않은 이들이기에 더욱더 그랬다.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상당히 특수한 경우였다.
일행은 바이에른에 도착하고 마차에서 내려다
“다 왔습니다. 도착이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카일이 인사를 하고 레이나도 내리면서 마부에게 성호를 긋고 인사했다.
“레테 여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수녀님.”
마부는 레이나의 축복에 감사를 넘어서 황송해했다. 비록 레이나가 카일의 노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일반인에게 신관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카일은 중간부터 좀 더 편하게 객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칸테나를 출발할 때는 태워 주는 사람이 없어서 곤란했었지만, 그 후에는 오히려 일행에 신관이 있다고 하니 고객으로서의 신뢰도가 확 올라갔다.
이 세계에서 장거리 마차를 운행하는 이들은 보통 모험가나 용병을 태우기를 꺼려하는 습관이 있다. 그들이 인적이 드문 곳에서 강도로 돌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신원이 확실한 이들을 태우고, 그렇지 않을 경우 운임을 왕창 비싸게 부른다.
그러나 일행에 신관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행에 대한 신뢰도가 확 올라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행길에 안전도 올라가니 환영하는 것이다.
덕분에 카일은 꽤 저렴한 가격에 좋은 객 마차를 잡아서 이동할 수 있었다.
“역시 어디를 가도 집만 한 곳은 없지. 집으로 가자.”
“예. 주인님.”
“레이나 씨, 이쪽이에요.”
“예. 알았어요.”
카일은 일행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