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레이나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막막했던 절망이 카일이 나서니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해결되어 버린 것이다.
카일이 시킨 대로 양아치들은 경비대에 자수해서 이번 사건과 그 전에 사채업자가 저지른 수많은 비리들까지 모두 털어놨다.
이번 기회에 아주 끝까지 보내 버릴 심산인 것처럼 10년도 더 지난 과거의 범죄까지 모두 털어놨다. 사채업자는 감옥에 들어갔고 곧 종신 노예형을 선고받을 예정이었다.
당연히 천사의 고아원이 지고 있던 빚은 사라졌고 100골드는 다시 그녀의 손에 돌아왔다.
거기다 카일은 고아원이 자립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고아원에서 졸업한 원생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부를 했던 인물을 찾아가서 그에게 고아원의 사정을 설명하고는 고아원의 관리를 부탁했다.
“자금은 지원해 줄 수 있지만 역시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거기는 저에게도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는 고아원을 졸업하고 항구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최근 들어서 작은 옷가게를 운영할 정도로 성공했었다.
원장 수녀의 죽음과 고아원의 사정을 안 그는 눈물을 흘리며 꼭 자신이 고아원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어머님의 뜻을 기려서 반드시 동생들이 훌륭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두고 봐야 안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보기에 그의 마음은 진실되어 보였다.
카일은 레이나에게 말해서 고아원의 상황을 그에게 인수인계 하게 했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끝났다.
카일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 이상의 것을 지켜 주었다.
공증에 적힌 계약대로라면 그저 100골드만 주고 모른 척 해도 됐을 텐데 카일은 그러지 않았다.
카일은 레이나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천사의 고아원을 지켜 주었다.
그것은 원래 둘 사이의 계약에 없던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레이나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작별.
어른도 어린애도 헤어짐이 힘든 것은 똑같다.
레이나가 고아원을 떠난다는 사실을 듣자 어린애들은 바로 울음을 터트리면서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애원했다.
“으아앙! 선생님… 가지 마요…….”
“우리하고 쭉 같이 살아요… 네……?”
“으아아앙… 선생님 가는 거 싫어!”
아이들은 레이나가 떠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레이나는 그런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 주고 보듬어 주면서 위로했다.
“괜찮아. 애들아. 모두 괜찮으니 울지 마렴.”
아이들에게는 레이나는 카일이 일하는 직장에 취직을 해서 이 도시를 떠난다고 알려줬다.
사실 머리가 굵은 아이들 몇 명은 레이나가 갑자기 가져온 100골드를 보고 무언가 속사정이 있음을 예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아이들은 슬프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저 카일이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았고 레이나도 강제로 끌려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애써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레이나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라고는 그 아이들도 몰랐다. 나병에 걸린 그녀를 노예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들과 하나씩 작별을 하면서 레이나는 한 아이의 앞에 멈췄다.
카일도 알고 있는 토미라는 아이였다.
레이나는 그 아이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토미, 이제 네가 가장 큰형이고 오빠인 거 알지? 항상 동생들을 돌봐 주고 지켜 주렴.”
“…예. 선생님.”
토미라는 아이의 목소리에도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착하다.”
그렇게 모든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카일은 이제 고아원을 돌봐 줄 피터라는 남자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이에른에 모험가 길드로 카일이라는 인물을 찾아서 편지를 보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카일은 여행용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없었다. 나병 환자인 레이나를 태워 주는 마부가 없었기에 마차 하나를 사야 했다.
검은 바람이 직접 마차를 몰고 그 안에 카일과 아리시아, 그리고 레이나까지 올라탔다.
“출발하자.”
“예, 주인님.”
그렇게 마차가 출발하고 고아원의 아이들은 떠나는 마차를 보며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도시를 떠나고 한참 후.
“흑…….”
레이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아이들 앞에서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 역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이별이었다.
“…….”
카일은 그녀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고 아리시아나 검은 바람도 그런 카일의 의도를 읽고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 * *
일행은 익숙하게 노숙을 준비했다.
검은 바람이 준비한 간이 막사를 치고 아리시아는 요리를 준비했다. 실컷 눈물을 흘린 레이나도 무언가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생각해 보니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와 대화를 해본적이 없었다.
‘너무 무례했네. 소개도 안 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리시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예. 부르셨나요?”
“혹시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레이나에게 아리시아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다 돼서 그냥 끓이기만 하면 되는걸요.”
“그래도…….”
“후후후. 그럼 그릇 놓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예. 알겠어요.”
그리고 레이나는 아리시아를 도와서 그릇에 수프를 담다가 문득 아리시아를 빤히 바라봤다.
“응? 왜 그러세요?”
“아니, 그게…….”
“혹시 뭐라고 묻어나요?”
아리시아가 자기 뺨을 만지며 말하자 레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 너무 예뻐서 봤어요.”
“예? 아… 고마워요.”
아리시아는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사실 레이나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어쩜 이렇게 예쁘지. 엘프의 피가 흐른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예쁘잖아?’
사르륵 흘러내리는 황금색 금발과 백옥 같은 피부. 신이 직접 조각했다고 믿을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신체의 비율도 완벽했다.
아무리 수녀 출신인 레이나라고 하지만 그녀 역시 여자였다. 아리시아의 미모가 부럽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리시아는 그런 레이나에게 말했다.
“그런 레이나 씨도 굉장한 미인 같은 걸요?”
“제가요? 설마…….”
“어머, 진짜인데요. 체형도 좋고 목소리도 예쁘고 병만 나으면 엄청난 미인이 될게 벌써부터 짐작 되요.”
“병만 나으면, 말이죠.”
레이나는 아리시아가 하는 말을 쓰게 웃어넘겼다.
“주인님. 오라버니. 식사하세요.”
아리시아는 식사를 위해서 두 사람을 불렀고 일행은 모두 모닥불에 둘러앉아서 식사를 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네?”
“칸테나에 건해산물이라는 걸 팔더라고요. 수프에 한 번 넣어 봤어요.”
“그래. 오오… 진짜 맛있는걸. 주인님 드셔 보십시오.”
“그래. 음, 나쁘지 않네.”
레이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새삼스럽지만 카일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노예를 대하는 것에 전혀 허물없어. 정말 관대한 사람이구나.’
노예를 학대하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 정도는 딱히 죄의식도 필요 없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카일은 노예인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를 마치 가족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제 말을 똑바로 해야지.’
레이나는 그렇게 마음먹고 카일에게 말했다.
“주, 주… 인님.”
“응? 왜?”
“그, 새삼스럽지만 저를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이나는 어색하지만 카일을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자기소개를 안 했던가?”
“…….”
“나는 카일. 던전 도시 바이에른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모험가다.”
“검은 바람. 주인님의 첫 번째 노예요.”
“아리시아에요. 저도 주인님의 노예예요.”
“레이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검은 바람은 그런 레이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의가 바르군. 같이 괄괄한 성격이면 한 번 붙어 보려고 했는데 말이야.”
“오라버니 은근히 발레리아 씨하고 싸우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은근히라니? 대놓고 즐기고 있는데 말이다.”
“오라버니 밥 굶고 싶으세요?”
“아니, 좀 자중은 하마. 자중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레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렸다. 노예라고는 하지만 종족도 다른 두 사람이 진짜 다정한 오누이처럼 보였다.
검은 바람은 그런 레이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수녀였다고 들었소.”
“네, 수녀였죠. 지금은 그냥… 평범한 노예입니다.”
“하지만 그건 병 때문이지 않소? 병을 고치면 신성력도 돌아오겠지. 안 그렇소?”
“예? 아… 그, 그건…….”
레이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 바람은 나병을 마치 감기 정도로 취급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투란 사람들은 나병에 관해서 잘 모르는 건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아리시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 레이나 씨 의 병은 언제 치료하실 건가요?”
그러자 카일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밥 먹고 자기 전에 하려고.”
“예? 저기 카일… 주인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레이나는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 거나 세 명은 자기들 멋대로 대화를 이어갔다.
“좀 더 일찍 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어쩔 수 없지. 치료 과정이 꽤 아프지 않냐? 밥이라도 편하게 먹고 해야지.”
“아아, 그건 그렇군요.”
“미처 생각 못했네요. 확실히 그건 아프죠.”
“진짜 아프지.”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에요.”
세 사람이 하는 대화 속에서 레이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병은 신성력으로도 치유 할 수 없는 불치병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태연하게 그녀의 병이 나을 것을 전제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레이나에게 카일이 말했다.
“안 먹어? 지금 든든히 먹어 두는 게 좋아.”
“예? 아… 예.”
일단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식사는 남기지 않는 그녀였기에 식사를 재개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고생을 하고 고아원을 돌보면서 먹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사무쳤던 기억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고, 카일은 레이나를 막사 안으로 불렀다.
“이걸 입에 물어.”
레이나에게 돌돌 만 수건을 주며 말했다.
“왜… 죠?”
“여기는 야외거든. 비명 소리가 멀리 울리면 곤란하니까”
“무언가… 일어나는 건가요?”
“그런 거지. 너무 긴장하지는 마.”
카일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레이나는 잔뜩 긴장했다.
‘설마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나병 환자인 자신을 100골드나 주고 노예로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어쩌면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사교도의 실험이나 의식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종속 계약이 걸려서 도망갈 수도 없는 그녀는 카일이 시키는 대로 수건을 입에 물었다.
“좋아. 시작한다.”
그리고 카일은 공포에 질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것저것 설명해 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직접 겪기 전에는 못 믿을 일이다. 그러니 그냥 하고 나서 알려주는 편이 좋았다.
“좀 아플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카일이 그녀의 초능력 코어를 각성시켰다.
“음… 으으으으음……!!”
레이나는 격렬한 고통에 신음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진짜 아프지.”
“으으… 생각나게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막사 밖에서는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가 몸서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