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카일에게 무슨 지시를 들은 아리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카일은 다시 경매에 집중하는 척했다.
사실 저 진상이 방해하는 이상 이 경매에서 원하는 노예를 낙찰받기는 이미 글렀다. 하지만 카일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계속 경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간에 카일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노예가 몇 명 나와서 입찰을 했지만 여전히 방해가 들어와서 사지 못했다.
놈은 카일의 입찰을 방해하고는 우월감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비웃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리시아가 카일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속삭였다.
“주인님, ……했어요.”
“잘했어. 아리시아.”
“감사합니다.”
아리시아의 말을 들은 카일을 겉으로 티내지 않고 얌전하게 경매가 진행되기를 기다렸다.
* * *
“후후후. 저 분한 꼴을 좀 봐라. 경매에 참가하고 노예 한 마리 못 사다니? 가난뱅이는 참으로 불쌍하구나.”
카일이 노예를 사는 것을 일부러 방해한 사막의 상인. 그의 이름은 알문 타하드라고 한다.
그는 원래 사막을 오가면서 상행을 하는 상단의 주인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 상업의 영역을 베르나도 왕국까지 넓혀서 제법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벌어들이는 돈 만큼 살집은 풍성해지고 있지만 품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인간이기도 하다.
알문은 평소 자존심이 강하고 욕심이 많으며 무엇보다 무시당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특히, 어젯밤 카일에게 당한 치욕은 이 남자의 인생에 있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치욕적인 일이었다.
‘감히 나를 거지 취급하고 무력으로 협박하다니…….’
자신의 고향이라면 당장 관리를 동원해서 잡아들였겠지만 여기는 바다 건너의 먼 외국이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앙갚음을 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신의 도우심인지 오늘 이 경매장에서 카일을 만난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신께서 저 무례한 놈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시는 구나.’
그래서 놈은 카일이 입찰하는 노예들을 모두 자신이 뺏어 왔다.
압도적인 금력을 동원해서 카일이 노예를 하나도 입찰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당황하는 카일의 표정을 보자 그는 분이 좀 풀리는 듯 했다.
“크크크크. 멍청한 놈. 돈도 없는 비렁뱅이가 감히 이 몸에게 맞서다니.”
이겼다는 우월감에 젖어 있는 그에게 옆에 있던 시종이 말했다.
“주인님. 예정에 없던 돈을 좀 쓰셨습니다. 노리시던 상품을 구매하시려면 돈을 조금 아끼셔야 할 듯합니다.”
그 말에 알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예 주제에 주인인 나한테 훈계를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흥,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예산이 얼마지?”
“700골드가 남아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지 않나?”
“여유는 조금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상행을 위한 경비를 생각하면…….”
“그만 닥쳐라. 노예 주제에 분수를 모르는 구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흥.”
알문은 그렇게 노예를 입 다물게 한 후에 경매장 한쪽을 바라봤다.
‘어차피 그것의 예상 낙찰가는 500골드 정도다. 700골드나 남았으면 충분해.’
그리고 마침 알문이 노리고 있던 물건이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메인 상품 중에 하나인 머맨입니다.”
“오오오…….”
“드디어 나왔군.”
“머맨 노예라니 얼마 만에 나온 거지?”
인간은 다양한 이종족을 노예로 삼아서 부리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포획하기 어려운 종족이 몇 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머맨과 세이렌이 바로 그렇다.
애초에 배가 없으면 바다를 누비는 것도 불가능한 인간이 심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활동하는 머멘이나 세이렌을 잡는 건 굉장히 힘들었다.
그나마 세이렌의 경우 만만하기라도 하지만 머맨의 경우 그 전투 능력이 상당하다.
심해에서 거대한 해양 몬스터와 싸우면서 일족을 지키는 머맨 전사들의 경우 그 전투력이 상당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혼자서 거대한 범선을 침몰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머맨 노예는 해군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베르나도 왕국에서도 무척 탐을 내는 노예였다.
알문은 저 머맨 노예를 사서 자신이 연줄로 대고 있는 베르나도 왕국의 상층부에 뇌물로 주고 커다란 이권을 받기로 약속했다.
즉, 저 머맨은 반드시 낙찰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작가는 300골드에서 시작하겠습니다.”
“350골드.”
“400골드.”
“430골드!”
머맨의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보통 머맨의 낙찰 가격은 500골드 전후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낙찰가를 부르는 이들은 대부분 간을 보고 빠지는 바람잡이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510골드.”
적절한 가격대를 부르는 손님이 나타났다.
“510골드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알문은 이쯤에서 자신이 가격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530골드.”
“43번 고객님. 530골드 부르셨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더 없으시다면 낙찰 하겠습니다. 하나, 둘…….”
그때였다.
“550골드.”
카일이 손을 들고 나섰다.
“저놈이 감히?”
알문은 눈을 부릅떴다.
이제까지 자신의 방해로 노예를 사지 못한 카일이 가격을 높여 부른 것이다.
‘제길, 복수다 이거냐?’
알문은 저 머맨 노예가 반드시 필요했다. 큰소리를 탕탕 치고 왔기 때문에 저것을 가지고 가서 자신이 줄을 대고 있는 귀족에게 뇌물로 바치지 않으면 이권은 고사하고 불이익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600골드!”
그는 단숨에 가격을 높였다.
카일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650골드.”
그러나 카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가격을 올렸다.
‘저 새끼가 진짜…….’
알문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여기서 돈을 더 부르면 남은 돈이 거의 없어진다. 목적지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여비와 이런 저런 경비까지 포함한다면 여기서 돈을 더 쓰면 정말 곤란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때 알문의 시선이 카일과 마주쳤다. 그리고 카일은……
“훗.”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한 가장 재수 없는 표정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알문을 비웃었다. 그 순간 알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직하고 끊어졌다.
“700골드!”
알문은 가진 돈을 탈탈 털었다. 그 말에 경매장의 다른 고객들도 술렁거렸다.
“머맨에 700골드라.”
“무리하는군. 그렇게라도 가지고 싶은 건가?”
“머맨의 낙찰가로는 신기록 같군.”
그들이 보기에도 머맨 노예의 가격으로 700골드는 무리였다.
머맨의 상위종인 에인션트 머맨이라면 수십만 골드도 나올 수 있고 희귀종인 로열 머맨이라면 값을 따질 수도 없겠지만 그냥 평범한 머맨에게 그 정도의 가치는 없었다.
‘어떠냐? 이래도 따라올 테냐?’
알문은 카일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카일의 표정은 알문과 정반대였다.
“큭… 크큭…….”
카일은 고개를 돌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했다. 그 순간 알문은 깨달았다.
‘이거… 이건 설마…….’
싸한 느낌이 드는 알문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경매장의 사회자는 경매를 진행했다.
“700골드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하나, 둘…….”
“자… 잠깐, 잠깐만!”
“…셋. 축하드립니다. 본 상품은 43번 고객님에게 낙찰 되었습니다.”
알문이 황급하게 외치려고 했지만 경매장의 입찰이란 한번 해버리면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카일의 도발에 넘어간 그는 순식간에 200골드 이상을 낭비해 버린 것이다.
“그만 갈까?”
“예. 주인님.”
카일은 미련 없다는 표정으로 산뜻하게 일어나서 경매장을 나갔다. 그리고 알문은 그런 카일을 보고 자신이 완전히 속았음을 알았다.
‘제길, 제길 저 비천한 가난뱅이가 나를 등쳐 먹어!’
어금니가 깨질 것처럼 이를 갈아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예산을 오버한 알문은 다음 행선지로 돌아가는 길에 여비가 부족해서 급하게 상품을 처분해야 했는데 이미 그의 상황은 칸테나의 상인들에게 다 소문이 난 상태였다.
상인들은 그를 상대로 단합하고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입을 원했다.
상인들 사이에서 한 번 약점을 보인 상대를 다구리 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알문은 울며 겨자 먹기로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물건을 처분했고, 그렇게 벌어진 손실이 800골드였다고 한다.
* * *
“아아… 좀 낫네.”
말 몇 마디로 누군가에게 1,000골드의 손해를 끼친 카일은 경매장을 나와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깊게 들이켰다.
그런 카일에게 검은 바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주인님. 만약 상대가 낙찰을 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하셨습니까?”
“그래서 아리시아에게 저놈의 최대 예산을 들어 두라고 한 거야. 뭐, 놈이 말하지 않았으면 나도 그냥 안 하려고 했지.”
경매에서 가장 호구되기 쉬운 상황은 예산의 한계치가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놈들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는 했지만 아리시아의 청력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카일은 처음부터 상대의 리미트를 알고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래도, 좀 아쉽군. 몇몇 노예는 탐이 났는데 말이야.”
그 재수 없는 사막의 상인을 엿먹인 건 기분 좋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초의 목적이던 노예는 구입하지 못했다.
이래서는 카일은 바이에른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음 경매는 일주일 후라고 했지?”
“예. 주인님.”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카일은 경매장 밖에 있는 노예들을 바라봤다.
‘조건에 맞는 노예는 없었지만 여차하면 저 안에서 좀 좋은 조건의 노예를 찾아봐야 할까?’
경매장 밖에 가격이 정해져 있는 노예들은 대부분 일꾼으로 쓰기에 적합한 노예들이다. 전투 능력이 없고 특수한 능력도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카일의 목적과는 맞지 않았다.
“곤란하군. 곤란해…….”
카일이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때.
“이봐. 꺼지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죄송해요. 하지만 이제는 이 방법밖에 없어서 왔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누가 너 같은 걸 노예로 사? 창관에도 못 팔겠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꺼져. 안 꺼지면 경비대를 부르겠어!”
노예시장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실랑이를 벌리는 소리가 들렸다.
‘좀 익숙한 목소리 같은데…….’
“주인님. 이 목소리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카일은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예들의 대부분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이거나, 혹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해서 노예로 떨어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외에도 자매(自賣)노예라고 해서 스스로를 노예로 판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은 먹고 살기 힘들거나 돈이 급해서 그러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드문 경우는 아니다.
지구에서도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양민들이 수두룩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다.
다만, 지금 카일의 눈에 보이는 것은 좀 특수한 경우로 보였다.
스스로를 노예로 사달라고 말하는 사람과 그걸 거부하는 노예 상인.
그 이유는 딱 하나였다
“떨어져. 이년아! 나까지 신벌 병이 옮으면 어쩔 거야?”
“그건…….”
“이년이 이래도!”
노예 상인은 옆에 있는 몽둥이를 들어서 자신이 발치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내려치려고 했다.
“자, 그쯤 하지.”
다행히 그 몽둥이가 떨어지기 전에 카일이 끼어들었다.
노예 상인은 카일을 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댁은 뭐요?”
“지나가던 사람이자 당신들 고객이기도 하지. 그런데 노예도 아닌 일반인을 폭행하면 범죄 아닌가?”
“일반인? 이년을 보십시오. 얼굴이 다 문드러졌습니다. 이건 신벌을 받은 괴물입니다. 노예보다 더 못하지요.”
노예상인의 매도에 여자는 분할 법도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었다.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보기 안 좋은 건 마찬가지야. 손님 상대하는 장사꾼이 이건 아니지. 안 그래?”
“으음…….”
“내가 데리고 가서 잘 타이를 테니 이쯤 하지.”
“…뭐, 손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저 괴물을 데리고 가주시기만 해주십시오.”
“알겠네. 수고가 많아.”
카일은 은화 몇 개를 짚어서 남자의 손에 쥐어주며 원만하게 사태를 해결했다.
‘자 이쪽은 이렇게 하면 되고.’
카일은 바닥에 힘없이 엎드려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또 보는군요.”
“당신은……?”
“잠시 얘기 좀 할까요?”
그녀는 어제 토미라는 소매치기 노예 소년을 감싸던 수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