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느 정도 멀어진 후 검은 바람이 말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나병에 걸린 수녀였을 줄은……”
“틀림없이 나병은 신성력으로도 낫지 않는 병중에 하나였지?”
“예. 그래서 신벌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 그렇지.”
신관들의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는 굉장히 뛰어났다. 가벼운 부상부터 상급 신관의 경우 결손 부위를 재생하게 하거나 불치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이 세계의 의학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것은 신관들의 존재가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관들이라고 모든 병을 치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부상의 치유에도 한계가 있고 자연사의 일종인 노사에는 대응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나병 역시 신관들이 고칠 수 없는 병 중 하나다.
신성력을 아무리 퍼부어도 소용이 없고, 피부가 문드러지면서 흉측하게 변하는 그 모습에 언제부터인가 나병은 신벌 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큰 죄를 지은 인간에게 신이 내린 형벌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성력이 들지 않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라는 신전의 주장에 나병 환자들은 세상에서 노예하고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박해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카일도 그런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친부인 루트비안 자작의 경우 영지에 나병 환자가 들어왔을 때 모두 태워 죽이라는 명령을 할 정도로 질색했으니 말이다.
“신관이 나병에 걸렸다면… 힘들겠군.”
“예. 아마도 신전에서는 추방당했을 겁니다.”
“나병이 신벌이라는 증거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지. 한심하기는…….”
카일이 보기에 좀 전의 수녀는 오히려 신전에서 호의호식하는 썩은 신관들보다는 훨씬 더 성직자 같았다.
어린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스스로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며 자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려고 하는 모습에는 일절의 가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나병에 걸리다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좋은 사람에게도 나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게 현실이었다.
* * *
다음 날, 카일은 바로 노예시장을 찾아갔다.
대륙간의 중계 무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칸테나의 시장은 그 어디를 가도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곡물을 거래해도 포대 단위로 거래하는 게 아니라 최소 짐마차 단위, 그 이상으로는 창고 단위로 거래할 정도였다.
노예시장 역시 몹시 거대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상품은 역시 해적 출신의 노예였다.
“보십시오. 이 흉악한 얼굴을! 나르만티안 해협을 주름잡던 대해적 막스가 바로 이 남자입니다.”
“악명 높은 해적 검객 카롯. 드디어 그가 잡혀서 이렇게 상품으로 나왔습니다.”
“이 해적의 이름은 검은 수염 티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무려 사황…….”
뭔가 있어서는 안 될 이름까지 나온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많은 해적들이 노예 시장의 상품으로 나왔다.
카일이 찾은 것은 이 중에서도 꽤 제한된 조건의 노예들이었다.
우선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 것.
이건 당연했다. 초능력을 당장 각성하는 게 아닌 본연의 실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좋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격이 저렴할 것.
돈을 상당히 많이 번 카일이지만 그 돈을 다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은행에 계좌가 있는 것도 아닌 카일은 현금을 들고 움직여야 했는데 그걸 한번에 다 가지고 다니는 것은 무리다. 절도나 분실에 대한 위험도 있었고 현금의 무게도 상당했다.
카일이 여기에 출발하면서 지참한 현금은 200골드였다.
그중에 마차의 여비와 국경 통과 등을 위한 세금 등으로 이미 30골드 넘게 지출했다.
돌아가면서 쓸 돈까지 포함했을 때 카일은 가능하면 100골드 안쪽의 노예를 구입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과거에는 강했지만 지금은 약한 노예를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전투 과정에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거나 너무 늙어서 노쇠했다거나 하는 그런 노예 말이다.
‘거기다 가능하면 그래도 인성이 좀 괜찮은 노예가 좋겠는데 말이지.’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카일은 일단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실 카일의 노예는 검은 바람부터 시작해서 아리시아, 발레리아까지 악인이 없다.
그게 카일의 파티의 팀워크를 좋게 하고 있기도 했다.
설령 신분이 노예라고 해도 자신의 인생에 절망과 고통은 있었지만 양심에 거슬리는 수치는 없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카일도 이들을 마음 편하게 잘 대해줄 수 있었고, 노예들 간에도 서로 마음을 터놓고 존중하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해적을 노예로 사면서 양심을 논하는 건 어물전에서 소고기를 찾는 셈이겠지.’
카일도 세 번째 조건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너무 극악한 악당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정도만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카일은 비교적 열린 마음으로 노예시장을 돌아봤다.
“좀처럼 마음에 드는 상품이 없군.”
원하는 조건이 너무 좁아서 그럴까?
예산 안에 카일이 원하는 유형의 노예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노예는 얼마지?”
“지금 파는 건 아니고 경매가로 200골드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기껏 카일이 원하는 조건의 노예를 찾으면 대부분은 경매로 붙이는 노예라고 했다.
심지어 그 마저도 카일의 예산을 오버했고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 돈을 지불하고 살 수 있는 노예들도 있기는 했다.
대략 30~50골드 사이에 형성된 그런 노예들이었는데 카일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대부분이 해적 쫄따구 노예들이었는데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력은 일반 병사와 도긴개긴이었다. 이런 놈들을 사려고 멀고 먼 던전 도시 바이에른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신입들을 꾸준히 훈련시키는 게 차라리 낫겠다.’
카일이 원하는 노예들.
즉, 부상 여부와 상관없이 한때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강한 전투력의 노예들.
그런 노예들은 모두 가격이 비쌌다.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음에도 말이다.
‘팔이 하나 없는 노예조차 200골드라니. 이건 좀 너무 하는걸?’
“시세가 왜 이렇지? 저 노예 어디에 200골드의 가치가 있다는 걸까?”
카일은 몰랐겠지만 이 칸테나에서 해적 노예의 가격은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전투력보다는 과거 현역 시절에 떨쳤던 악명이나 현상금에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러냐 하면 귀족들의 과시욕 때문이다.
‘나는 지금 과거 공포의 대상으로 악명을 떨친 해적을 노예로 만들어서 지배하고 있다.’라는 행위가 베르나도 왕국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일종의 부를 자랑하고 국가에 애국하는 행위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풍문이지만 이런 문화가 자리 잡은 것에는 베르나도 왕국의 왕실에서 일부러 유도했다는 설이 있다.
해적 출신 노예를 최대한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어야 국가 예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최대한 더 비싼 가격에 팔기 위해서 그런 문화를 퍼트렸다는 가설이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베르나도 왕국에 그런 과시용 문화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심지어 특정 해적단을 목표로 해서 마치 컬렉션을 모으듯이 어느 해적단 출신의 간부 노예들을 사는 수집가들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덕분에 베르나도 왕국의 예산은 풍족해졌을 몰라도 카일의 입장에서는 낭패였다.
팔다리가 떨어지거나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노예들마저 과거 악명을 날렸다면 기본이 200골드 정도에서 시작하니 좀처럼 구입하기가 힘든 것이다.
“경매의 시작은 언제지?”
“예. 저녁 일곱 시입니다.”
“그렇군. 그럼 그때 다시 오겠다.”
“예. 모쪼록 기다리겠습니다.”
카일은 상품을 쭉 둘러본 후 경매시간에 맞춰서 다시 찾아오기로 했다.
“주인님 예산이 많이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긴 한데… 일단 가지고 있는 예산 안에서 한 번 낙찰을 해봐야지.”
이렇게 되면 최대한 눈을 낮춰서 좀 실력이 낮은 노예를 구입하는 방법도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카일이었다.
경매 시간이 되었다.
카일은 외부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가다 노예 시장의 경매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경매에 참가해서 입찰을 많이 하다 보면 그중에 한 둘 정도는 자신이 낙찰 받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한마디로 ‘많이 쏘면 한 발은 맞겠지.’ 기관총 작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 여러분. 지금부터 오늘의 노예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과거 바다를 주름잡던 악명 높은 해적들을 손에 넣고 복종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경매장의 사회인의 인사가 끝나고 노예 하나가 올라왔다.
“자, 이 노예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바다사자 해적단의 주력 멤버로 현역 시절 현상금은 무려 500골드였던 해적 파르보나입니다. 경매가는 100골드에서 시작하겠습니다.”
“120골드.”
“180!”
“200!”
“250골드!”
경매를 시작하고 노예의 가격은 순식간에 카일의 예산을 오버해 버렸다.
‘어쩔 수 없군.’
카일은 손도 들어보지 못하고 지켜만 봤다.
아직 경매는 초반이고 남은 상품들은 많았다. 자신에게도 예산이 맞는 노예가 나올 수도 있으니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380골드 나왔습니다. 380골드. 더 없으십니까? 하나, 둘. 셋! 예. 해당 노예는 17번 고객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노예는 낙찰자에게 인수되었다.
그리고 다시 다음 상품이 올라왔다.
“이번 해적은 여해적입니다. 악명과 미모로 동시에 이름을 떨친 해적이죠. 이른바 도둑고양이 나ㅁ…….”
역시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 나오려고 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경매는 계속 진행되었다.
열 명이 넘는 노예가 팔리고 그동안 카일의 예산에 맞는 노예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에게 희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노예들의 낙찰 가격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05골드에 낙찰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8번 고객님.”
초반에 돈을 많이 쓴 손님들이 떨어져 나가고 아직 노리는 매물에 돈을 안 쓰고 아끼는 고객들은 여전히 주머니를 닫고 있다.
그 결과 경매 중반쯤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슬슬 들어가 볼까?’
카일은 최대 예산을 120골드까지 늘린 다음 경매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
마침 다음에 나온 노예는 카일이 찾는 조건에 딱인 노예였다.
“자, 이 노예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빅 스네이크 해적단의 두목으로 한때는 세브릴 해역에서 그 악명을 떨친 미엘 해적입니다. 현역 시절 현상금은 100골드. 경매가는 50골드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고객들은 시큰둥했다.
“빅 스네이크 해적단? 들어본 적 없는데?”
“잔챙이로군요.”
“현역 시절 현상금 100골드? 쯧쯧, 너무 일찍 잡았어.”
“해군도 융통성이 없죠. 방생했다가 좀 더 거물이 되고 잡았으면 좋았을 것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팔아먹은 것 같은 헛소리도 들렸지만 다 떠나서 카일에게 유리한 조건임에는 틀림없었다.
‘해적단의 선장을 했을 정도면 실력은 자신이 있겠지. 최소한 리더십은 있을 거야. 저놈으로 하자.’
한쪽 다리가 없기는 하지만 카일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70골드.”
카일이 손을 들고 가격을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한 명이 말했다.
“80골드.”
“100골드.”
그러자 카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또 가격을 올렸다.
상대가 카일을 바라보자 카일은 아직 한참 여유가 남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절박할 정도로 가지고 싶은 노예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저 싼 맛에 한 번 질러본 것뿐인 듯 했다.
“100골드 나왔습니다. 100골드 더 없으십니까? 하나, 둘…….”
“150골드.”
그때 갑자기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어떤 놈이지?’
카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저 새끼가?”
어제 어린아이를 폭행 하다가 카일에게 망신당하고 쫓겨났던 사막 부족 출신의 상인이 있었다.
놈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재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150골드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하나, 둘, 셋. 낙찰! 43번 고객님에게 낙찰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결국 그 노예는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카일을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경매 좀 귀찮아지겠어.’
그리고 그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130골드에 43번 고객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43번 고객님. 160골드에 낙찰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43번 고객님에게 낙찰…….”
43번 번호표를 달고 있는 그 상인은 카일이 입찰하는 노예는 무조건 끼어들어서 자신이 낙찰했다.
자금에 카일보다 여유가 많아서 카일은 한 번을 이기지 못했다.
‘안 되겠군. 아무래도 글렀어.’
카일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매장에서 자기보다 돈이 훨씬 많은 사람이 방해를 하고자 한다면 물건을 낙찰받는 건 사실상 불가능 하다. 하지만…….
‘한 방 먹이는 건 가능하지.’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물러나는 건 배알이 꼴렸다.
한 방 제대로 먹여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리시아. 잠시 귀 좀 이리 줘.”
“예. 주인님.”
카일은 뒤에 얌전하게 서 있던 아리시아를 불러서 무언가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