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사실 아리시아가 기겁할 줄은 알았다.
하지만 그 진중한 성격의 검은 바람이 이렇게 캐릭터가 망가질 정도로 기겁할 줄은 몰랐다.
손이 검의 손잡이에 가있는걸 봐서는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진정해. 그냥 이 지역의 향토 요리일 뿐이야. 그렇죠?”
“예. 맞습니다. 신선한 낙지에서 뻘을 제거하고 아직 살아 있을 때 다리를 절단해서 올리브 오일과 함께…….”
“그만, 그만해요.”
“설명하지 마! 그걸 요리라고 하지 마!”
아리시아와 검은 바람은 기겁하며 점원의 입을 막았고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종종 보는 광경인가 보네.’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안 맞는 모양이군. 이 요리는 물려 줘.”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손님은 안 놀라시는 군요. 혹시 전에 드셔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 그냥 비위가 좀 강할 뿐이야.”
“아, 그러시군요.”
점원은 제법 놀랍다는 표정으로 요리를 가지고 돌아갔다. 낙지회가 무사히 사라지자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만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죄송해요.”
둘은 카일 앞에서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인 게 여간 창피한 모양이었다.
사실 카일이 좋은 주인이니 그냥 놔두는 것이지 보통 노예가 이렇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면 주인의 체면을 무너트렸다고 해서 큰 벌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괜찮아. 싫은 매는 맞아도 싫은 음식은 못 먹는 법이라고 하잖아?”
“그럴듯한 말이군요. 그런데 처음 들어 봅니다.”
“저도요. 어디 말이에요?”
“글쎄, 나도 그냥 주워들은 말이라서.”
어쨌든 낙지회가 사라지자 세 사람은 맛있게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었다.
“맛있군요. 민물고기와는 완전히 다른 맛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수프는 처음 먹어 봐요. 주인님. 고기나 야채로 만든 수프와는 완전히 달라요.”
두 사람은 해산물 요리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발레리아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이 자리에 없는 발레리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카일이었다.
맛있는 걸 먹을 때 자리에 없는 것이 아쉬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유대감은 진짜다.
발레리아 역시 이미 카일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맛있는 해산물 요리와 거기에 어울리는 이 지역의 화이트 와인까지 즐기면서 카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쉬자. 내일 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적 노예에 관해서 알아봐야 할 테니 말이야.’
맛있는 요리를 먹고 카일은 소화도 시킬 겸 해서 밤의 해변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달빛이 아스라이 비치는 밤바다와 파도치는 소리는 운치가 있었다.
알리시아는 카일의 옆에 다가와서 팔짱을 끼고 함께 걸었고 검은 바람은 눈치 빠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서 걸었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다 바람이 시원했고 자신의 옆에 느껴지는 아리시아 체온은 따뜻했다.
저녁으로 먹은 화이트 와인의 술기운까지 어우러져서 카일은 오랜만에 기분이 나른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폐기장에서 위기를 겪은 후 이렇게 긴장이 풀리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죽어! 이 더러운 벌레 같은 새끼야!”
그런 카일의 귓가에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욕설을 하면서 폭행을 가하는 듯한 소리. 더구나 그 소리의 근원지는 카일이 고개만 돌려 보니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바로 길 건너편에서 어떤 남자가 작은 어린 아이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었다.
카일은 그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그쯤 하지 그래?”
“엉? 넌 뭐야?”
어린애를 짓밟고 있던 남자는 건장, 아니 육중한 체구의 성인 남자였는데 머리에는 터번을 쓰고 있었다.
‘사막 부족의 인물인가?’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무역 항구다 보니 이런 사람도 이곳에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카일은 이왕 끼어든 김에 나섰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너무 하지 않나? 그러다 죽겠어.”
“하아. 성인군자 납셨군. 이놈은 감히 이 몸에게 소매치기를 하려다가 걸렸다고 우리 나라 같으면 도둑은 양 손을 자르고 이마에 노예의 낙인을 찍어야 해.”
“그럼 너희 나라에 가서 하던가. 여기는 너희 나라가 아니야.”
‘뭐, 내 나라도 아니긴 하지만.’
카일의 말에 상대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뭘 믿고 까부는 거지?”
“글쎄, 뭘 믿고 까부는 걸까?”
카일의 뒤편에서 검은 바람이 은근히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커다란 덩치에 누가 봐도 강해 보이는 검은 바람이었다. 그러자 상대편의 뒤에서도 비슷한 남자들이 두 셋 정도 나왔는데 아무래도 그의 호위 같았다.
카일은 순간 검은 바람 쪽을 흘깃 바라봤다.
‘괜찮겠나?’
‘문제없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시선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두 사람이었다.
상대편의 호위가 둘이었지만 검은 바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검은 바람이 훨씬 더 강하다는 뜻이다.
카일은 여유 있게 말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는 너희 나라가 아니야. 더 이상 하던 짓을 그만 두고 가라.”
“흥, 좋다. 그렇다면 네가 피해보상금을 지불해라.”
“피해 보상? 소매치기는 미수 아니었나?”
“미수지? 하지만 이런 쓰레기 덕분에 이 몸의 시간이 빼앗겼다.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하지 않겠나?”
“생트집이군.”
“그게 아니라면 나도 물러나지 않겠다.”
“하아아……. 진상 또라이 새끼.”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폭행당하는 현장을 보고 나서기는 했지만 이런 진상이랑 상대하려고 하니 피곤해졌다.
순간 ‘귀찮은데 그냥 검은 바람에게 시켜서 패버리라고 할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 이 도시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를 원하지?”
“글쎄, 5골드 어때?”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폼이 노골적인 시비조였다.
이런 부랑아를 상대로 5골드나 지불할 사람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딸랑.
카일은 5골드를 바닥에 던졌다.
“여기 있다. 주워서 가져가라.”
“이, 이놈이…….”
“뭐? 부족하나? 그럼 엎드려서 눈물이라도 쥐어짜면 애원해 봐라. 그럼 10실버 정도 더 쳐주지.”
“…….”
자신을 거지 취급하는 카일의 모습에 놈은 분한지 볼살을 부들부들 떨었다.
“브람, 제이낙, 이놈을 당장 내 앞에 무릎…….”
퍽! 퍼억!
“커헉.”
“쿠에엑!”
놈의 말이 하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놈의 호위 무사 두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려고 하는 순간 검은 바람의 주먹이 먼저 그들의 안면에 꽂혔다.
그걸로 상황은 간단하게 종료되었다.
“…….”
멍하니 혼자 남은 그는 몸이 뻣뻣하게 얼었다. 설마 자신의 호위가 이렇게 간단하게 쓰러질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카일은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10초 준다. 꺼져.”
“이… 이 치욕은 잊지 않겠다. 나는 사라딘 상단의 상단주 알문 타하드다. 네 이름을…….”
“8, 7, 6…….”
“두, 두고 보자.”
카일이 계속해서 숫자를 세자 결국 그 상인은 진부한 대사만 남기고 도망가 버렸다.
“3……. 쓰러진 부하들을 챙겨 갈 것이지.”
카일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쓰러진 아이를 살펴봤다.
“얘야. 괜찮니?”
“괜…찮습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한 말 같겠지만 소매치기 같은 거 하지 마라. 걸리면 좋은 꼴 보기 힘들어.”
“…….”
아이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꼭 돈이 필요해서 그만…….”
“돈 안 필요한 사람은 없어.”
“…….”
변명을 하려던 아이는 수치심에 얼굴을 더 붉혔다.
‘뭐, 수치를 아는 걸 보면 적어도 아직 도덕심이 완전히 마비되지는 않았군.’
나쁜 짓도 한두 번, 계속 하다 보면 이제 그냥 당연한 짓처럼 여겨지는 법이다.
이 아이의 경우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완전 상습범은 아닌 듯 했다.
“앞으로 그러지 마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아이가 이 말을 지킬지 말지는 카일도 모르지만 일단 대답은 들었다.
이제 그냥 떠나려고 하는데 그 순간.
“토미, 토미! 괜찮니?”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여성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여성의 곁에는 다른 아이들도 함께 달려오고 있었는데 모두 일행인 듯했다.
그녀는 아이의 곁으로 오더니 잽싸게 아이부터 감쌌다. 그리고는 카일을 향해서 깊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모두 제 교육의 부족함이 책임입니다.”
“아니요. 저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신님의 이름으로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모든 책임은 오로지 보호자인 저에게…….”
“말 좀 들어!”
사람 말을 정말 안 듣는 여자라는 생각에 카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쓴 여자는 움찔했고 그러는 사이 토미라는 아이가 말했다.
“수녀님. 이 사람이 아니에요.”
“응? 토미 뭐라고…….”
“다른 상인에게 맞고 있는 걸 구해 주신 분이에요. 이 분은 아니에요.”
“어…….”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덜렁거리는 사람이군.’
카일은 그녀를 향해서 말했다.
“아이가 소매치기를 했던 것은 맞습니다. 미수에 그쳤지만 다시는 안 한다고 했으니 앞으로 잘 가르쳐 주세요.”
“아… 이런 자비를 베풀어 주시다니……. 여신 레네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수녀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저야말로 갑자기 고함을 쳐서 죄송합니다.”
카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필 신전의 인간이었나.’
카일이 이 세계에서 절대 적으로 돌리기 싫은 인종 세 가지가 있다.
귀족, 마법사, 그리고 신관.
이 세 가지 부류의 인간만큼은 절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각각의 능력과 권력도 강하지만 그 이상으로 단체로 뭉쳐서 자신들의 권위와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약자를 철저하게 짓뭉개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를 적으로 돌리면 가장 골치 아프다.
이 세계의 신관들은 신성력이라는 실제로 신에게 내려받은 힘을 행사하기 때문에 지구의 종교인들보다 그 권한이 더욱더 강했다.
신관들이 신성 모독죄를 앞장세워서 신의 적으로 공표해 버리면 어지간한 귀족, 아니 왕족들도 버티기 힘들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일은 괜히 엮이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 저기 감사의 기도를…….”
상대는 그런 카일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다 이 덜렁이 수녀가 발을 헛디뎠는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 덕분에 그녀가 깊게 눌러쓴 로브가 벗겨졌고 카일은 그녀의 맨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아, 죄송합니다. 이건 저기…….”
그녀의 얼굴에는 뚜렷하게 나병(癩病)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완전히 뭉그러진 그녀의 흉측한 얼굴을 보고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저 카일은 그냥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태연하게 수녀를 일으켜 주고 로브를 씌워 주었다.
“…….”
그녀는 그런 카일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럼 이만.”
카일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진짜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