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발레리아의 건의대로 카일은 용병단 길드에 가입했다.
가입 절차는 간단했지만 그 대신 돈이 꽤 들었다.
일인당 가입비가 50실버씩 들었고, 그것을 묶어서 용병단으로 등록하는데 다시 10골드가 들었다.
처음에는 용병단으로 등록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개인 용병으로 있는 것과 용병단으로 등록이 되는 것에 관해서 의뢰에 관한 선택폭이 너무 달랐다.
결국 카일은 과감하게 용병단으로 등록을 했고 그렇게 해서 ‘카일 용병단’이 탄생했다.
용병 길드를 나오면서 카일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좀 있다면 멋있는 이름으로 지었을 텐데 말이야.”
“주인님의 이름도 충분히 멋있습니다.”
“맞습니다. 주인님.”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하는 말에 카일은 피식 웃었다.
“뭐, 이름이야 나중에라도 바꾸면 되는 거고, 이제 내가 없는 동안은 애들을 잘 부탁한다. 발레리아.”
“예. 맡겨 주십시오. 주인님. 반드시 강군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발레리아의 말에 뒤편에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던 열 명의 노예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뭐, 안 죽을 정도로만 부탁해.”
“예. 죽지만 않을 정도로 굴리겠습니다.”
그렇게 의욕에 찬 발레리아에게 노예들의 교육과 얼마간의 돈을 맡긴 후 카일은 여행용 마차에 올랐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베르나도 왕국의 칸테나요.”
“그럼 국경지대에서 갈아타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출발하죠. 이랴.”
대륙력 523년 11월.
카일을 실로 오랜만에 바이에른을 떠났다. 대륙력 522년 1월에 바이에른에 혼자 왔었으니 거의 2년 만의 일이었다.
* * *
베르나도 왕국은 해상 무역이 활발하게 발달한 국가이다.
대륙의 남쪽에 존재하는 이 나라는 국토가 좁고 토지도 척박했고 지하자원도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륙의 중앙에서 세력을 견주는 나라들에 비해서 군사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라서 오랫동안 약소국으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수백 년 전에 어떤 탐험가가 남방대륙을 발견하면서 이 나라의 사정은 크게 변했다.
남쪽에 신천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본격적으로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은 남방대륙의 국가들과 국교를 맺고 본격적인 해양 무역을 시작했다. 그 결과 가난한 약소국이었던 베르나도 왕국에는 막대한 부가 쌓이기 시작했다. 향신료, 차, 비단, 그 밖에도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와서 파는 중계 무역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준 것이다.
당시 베르나도 왕국의 국왕은 왕국 역사상 가장 현명한 왕으로 평가 받는 페리아스 국왕으로 그는 그렇게 벌어들인 수입을 군사력 증강과 국토 정비에 사용했다.
상업을 장려하기 위해서 국토의 도로망을 정비하고 외세의 침략을 대비해서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그가 다스린 30년의 치세는 베르나도 왕국을 그저 가난했던 나라에서 단숨에 강대국의 반열로 일으켰다.
지금의 베르나도 왕국은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부유한 국가이며 특히 막강한 해군력으로 대륙의 연안 해안가를 지배하는 바다의 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일이 마냥 잘 풀리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베르나도 왕국에는 그 현왕 페리아스 국왕 시절부터 도저히 근절하지 못하고 있는 골칫거리가 있다.
바로 해적이다.
해적이라고 해서 밀짚모자를 쓰고 동료들과 유쾌하게 모험만 하는 무해한 해적이 아니었다.
남방대륙을 오가는 상선을 덮쳐서 나포하고 연안 지역의 마을을 공격해서 약탈하고 심할 때는 해적들이 연합을 이뤄서 상업 도시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바다를 오가는 베르나도 왕국의 배들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해적들은 끊임없이 베르나도 왕국의 배를 공격했다.
사실 베르나도 왕국의 군사력이 해군에 많이 치우쳐 있는 이유는 그 해적들에 대항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베르나도 왕국 입장에서 해적들은 아무리 잡고 또 잡아도 근절되지 않는 바퀴벌레와 같았다. 절대 근절되지 않지만 그래도 내버려 두면 국가에 해악을 끼치니까 계속 토벌해야 하는 존재.
그게 해적이다.
자, 그럼 이제 여기서 문제.
해적들을 토벌한다고 해도 배를 통째로 가라앉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해적의 배와 그 안에 실려 있는 물자를 생각하면 가능한 나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적선의 경우 때때로 막대한 재보를 싣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진짜 어지간한 강적이 아니라면 해적선은 나포되고, 해적들도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베르나도 왕국은 그렇게 사로잡힌 해적들도 알뜰하게 재사용한다.
종속 마법을 새긴 후 노예로 되파는 것이다.
그렇게 사로잡은 해적들이 노예로 한꺼번에 모여서 노예로 팔리는 장소가 바로 무역항구 도시인 칸테나.
바로 카일의 목적지이기도 하다.
“주인님.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로군.”
카일은 마차에서 내리며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이에른에서 베르나도 왕국의 국경지대까지 마차를 두 번 갈아타서 열흘 정도 걸렸고, 국경지대에서 출입국 허가신청을 하는데 다시 사흘이 걸렸다.
그리고 출국세와 입국세를 지불한 후에 다시 칸테나까지 가는 마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렇게 해서 걸린 기간이 총 40일이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 세계에서 외국을 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꽤 번거로운 절차와 시간과 돈이 들었다.
‘뭐, 그러니까 온 거지만 말이야.’
바꿔 말하면 여기서 카일이 노예를 사서 바이에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전처럼 사람들의 주목받을 일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심각하게 번거로웠지만 그 점을 생각하면 모두 필요한 번거로움이기도 했다.
“일단 숙소부터 잡자.”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칸테나는 항구 도시였고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오갔다.
대륙 각지에서 온 상인들과 멀고 먼 남방대륙에서 온 상인들까지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숙박 시설도 많았다.
카일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가능하면 조금 좋은 곳에서 묵기로 했다.
“와아, 주인님. 저거 봐요. 물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어요.”
“수평선이라는 거야.”
그렇게 결정한 곳은 바다가 보이는 2층 여관이었다.
2층의 창문을 열면 상쾌한 바닷바람이 들어오는 곳으로 하루 숙박에 1골드나 하는 고급 방이었다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 며칠 정도는 이 정도 사치도 괜찮겠지.’
사실 그동안 오면서 기록 지루한 마차 여행에 많이 지치기도 한 카일은 좀 괜찮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좀 쉬다가 밖으로 나가자. 모처럼 항구 도시에 왔으니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정말요? 고마워요. 주인님.”
아리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카일에게 말했다.
눈부신 태양빛을 한가득 받으면서 환하게 웃는 아리시아는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애가 가면 갈수록 더 예뻐지네.’
아리시아는 모르겠지만 카일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종종 넋을 잃고는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차 여행을 하는 40여 일 동안 그녀를 거의 안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좀 있어야 하지?’
카일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아리시아의 뒤에 다가가서 바다를 보고 넋을 잃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응? 주인님 무슨 용…….”
카일은 그대로 아리시아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치고 그녀를 꼭 끌어안고는 침대로 데리고 갔다. 아리시아는 침대에 누워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주인님. 아직 이른 시간인데…….”
“그럼 안 돼?”
카일의 뻔뻔한 말에 아리시아는 얼굴을 사과처럼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럼 됐어.”
카일은 그대로 아리시아의 품안에 파고들어갔다.
* * *
저녁 시간.
카일은 배가 고팠다.
오랜 마차 여행으로 쌓인 피곤으로 인해 배가 고팠고 오랜만에, 아니 이번 생에는 처음으로 신선한 해산물을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세계에서 내륙지방에서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건 처참했으니까 말이야.’
기껏해야 말린 생선이나 소금에 절인 생선, 그리고 흙냄새가 나는 민물고기 정도가 카일이 이 세계에 태어나서 먹어본 해산물의 전부였다.
하지만 항구 도시에 온 이상 카일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해산물을 먹어보고 싶어졌다.
카일이 묶고 있는 여관은 식당을 겸하지 않는 곳이라서 식사를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가는 길에 카일은 여관의 주인에게 말했다.
“신선한 해산물을 먹고 싶은데 추천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좋은 선택입니다. 바다에 왔으면 해산물을 먹어 봐야죠. 내륙지방 분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맛있는 해산물이 많습니다. 해산물이 맛있는 가게를 추천해 드리죠.”
여관 주인의 표정에는 자기 고장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니까 어디를 가면 좋으냐고?’
카일이 차분하게 기다리자 그가 말했다.
“어디 보자, 요즘 시기면 방패 조개와 돔이 물이 좋을 시기죠. 그리고 자극적인 음식을 원하신다면 낙지회도 괜찮습니다. 아주 아주 신선하죠.”
추천하는 주인장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쩐지 뭔지 알 것 같군. 근데 다 떠나서…….’
“그래서 가게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그걸 말하지 않았군요. 저희 가게에서 나가서 왼쪽으로 쭉 가셔서… 거기 등대에 도착하면 거기가 바로 해산물이 맛있는 가게입니다.”
그제야 여관 주인은 가게의 위치를 알려줬다.
“가게 이름은요?”
“가 보시면 알 겁니다. 다른 가게도 없으니까요. 어쨌든 거기가 해산물이 맛있는 가게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게의 위치를 전해 듣고 나가는 카일에게 여관 주인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낙지회는 꼭 시켜 보십시오. 우리 고장 아니면 어디 가도 못 먹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검은 바람은 가게를 나오면서 말했다.
“자기 지역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군요.”
“저런 사람이 많으면 실제로 음식은 맛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긴, 해산물 요리는 재료만 좋으면 반은 재료가 다 해주니까.”
“주인님, 저 사람이 추천하는 낙지회라는 것은 뭘까요?”
“글쎄. 나도 안 먹어 봐서 모르지.”
“저렇게까지 강력하게 추천하는 걸 봐서는 꽤 맛있는 음식인 모양입니다.”
“그럴지도.”
카일은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의 표정에서 묘한 기대감을 봤다. 카일이 두 사람의 식사를 부실하게 챙겨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생긴 모양이다.
“먹고 싶으면 시켜 봐.”
“감사합니다. 주인님.”
“고마워요. 주인님. 역시 주인님이 최고에요.”
“그래. 그래.”
‘과연 음식이 나와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분명 여관주인은 말했다.
해산물이 맛있는 가게라고 말이다.
“거짓말은 아니네.”
“정말이군요.”
“진짜 이렇게 해놨을 줄은 몰랐어요.”
[해산물이 맛있는 가게]
추천받은 가게의 간판에 적혀 있는 이름이었다.
‘이것도 상술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어째 가게 주인이 유독 이 말을 강조하더라 싶었다.
“어쨌든 들어가자.”
“예. 주인님.”
카일이 가게에 들어가자 점원이 능숙하게 카일의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 분이이신가요?”
“그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식당은 맛이 나쁘지 않은지 손님들로 꽤 북적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맛은 나쁘지 않겠네.’
“메뉴는 정하셨나요?”
“가장 많이 나가는 메뉴로 세 가지. 그리고 낙지회도 1인분.”
“예. 감사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했던 요리가 나왔다.
가장 잘 나간다는 메뉴로는 해산물 수프와 먹음직스럽게 통째로 구워진 생선구이, 그리고 버터로 구워낸 조개구이가 나왔다.
카일은 그 요리를 보고 생각했다.
‘해산물을 사용하면서도 외지 사람들에게 호불호가 없는 요리로군.’
삶고 굽고 버터로 익힌 해산물.
이거라면 해산물에 익숙하지 않은 내륙인들도 충분히 즐길 만했다.
“오오… 신기하군요.”
“맛있어 보여요. 주인님.”
실제로 골수 내륙 지방 출신인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보고 감탄했다.
이 세계에서는 바닷가 출신이 아닌 경우 이런 요리는 평생 먹어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두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해산물 요리에 감탄했고 카일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해산물 요리를 보자 군침이 돌았다.
“낙지회 나왔습니다.”
드디어 여관 주인이 추천했던 그 요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꺄아아악!”
“우어어어어업!”
아리시아가 비명을 질렀고 그 강건한 부동의 전사 검은 바람조차 기겁을 했다.
카일은 쓰게 웃었고 점원이나 주변의 손님들은 익숙한 모습을 보는 것처럼 실실 웃으면서 카일이 있는 테이블을 쳐다봤다.
낙지회라는 것은 카일이 예상한 대로 지구에서 말하는 산낙지였던 것이다.
절단된 다리가 접시 위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기겁했다.
“주, 주인님… 그, 그거, 그거…….”
“도망가십시오. 주인님. 여기는 이 검은 바람이 막겠습니다.”
‘반응이 생각보다 재미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