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날이 밝고, 카일은 폐기장에 노예를 보내서 자신의 편지를 전달한 뒤 집에서 개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지?”
“길드의 지부장님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바로 거실로 안내해 드려.”
“예. 알겠습니다.”
카일은 훈련으로 흘린 땀을 닦으며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나머지 훈련은 저녁에 하지.”
“예. 주인님.”
어지간하면 훈련 일정을 지키는 카일이지만 게리우스 지부장은 그것을 깰 정도로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래 봤자 무슨 용건인지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말이야.’
카일이 1층 로비로 가니 거기에는 게리우스 지부장이 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 어서 오게.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닌가 싶군.”
‘맞아.’
“아닙니다. 그보다 오늘은 어쩐 용건으로 찾아오셨는지요?”
겉과 속이 다르게 노는 카일에게 지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별건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 들렸지. 그런데… 어떤가?”
뜬금없이 나온 ‘어떤가?’라는 질문에 카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지부장이 말하는 ‘어떤가?’라는 말의 주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부장의 발치에서 신발을 질겅질겅 물어뜯고 있는 털뭉치가 바로 이 ‘어떤가?’의 주체였다.
“잘 키우고 계시군요. 건강하고 활발해 보입니다.”
카일은 그 털뭉치를 보고 칭찬했다.
그러자 게리우스 지부장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지? 내가 봐도 우리 아우레나는 참 잘 크고 있단 말이야. 하하하하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네.”
아우레나라고 이름 붙여진 이 강아지는 카일의 권고로 게리우스 지부장이 키우기 시작한 강아지다.
아직 성견은 아니고 이제 5개월 정도 된 미숙한 암컷 강아지다.
사실 화이트 울프종의 암컷을 키우라고 권한 것은 카일이었고, 키우는 과정에서 훈련에 대한 노하우를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도 카일이었다. 그로 인해서 잦은 만남을 가지며 지부장과의 연줄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까지. 모두 카일의 계산대로였다.
다만 카일의 계산을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하하하. 이 녀석이 어제는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엎드려’를 알아듣더군. 난 가르친 적도 없는데 말이야. 거기다 ‘기다려’도 얼마나 잘하는지 최고급 고기를 눈앞에 두고도 10분이 넘게 참더라니까. 개 중에서 천재인 게 틀림없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 확실히 우수하군요. 굉장히 빠른 진도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하. 역시 자네는 말이 잘 통해. 다른 길드 애들한테 말하면 ‘그게 뭐’라는 표정으로 대꾸한다니까. 애들이 뭘 몰라요.”
‘나도 몰랐다. 댁이 이렇게 될 줄은 말이야.’
진짜였다.
지부장이 이렇게 개 팔불출이 될 줄은 카일도 몰랐다.
던전에 들어가서 트롤을 찾기 위한 탐색견으로서 키우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공을 들여서 훈련을 시키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은 카일이었다. 그런 카일의 말에 지부장은 다소 귀찮았지만 직접 강아지를 사서 키우며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깨달았다.
조그만 털 뭉치가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사랑스럽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게리우스 지부장은 자신의 애견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툭하면 카일을 찾아와서 자신의 애견이 얼마나 훌륭한 개인지를 자랑했다.
‘좀 지겹군.’
노리던 바가 잘된 것 같기는 하지만 너무 잘된 것 같아서 좀 지겹기도 한 카일이었다.
한참을 자기 개를 자랑하던 지부장은 카일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떤가? 이제 우리 아우레나도 슬슬 컸는데 스노우와 짝을 지어도 괜찮지 않겠나?”
“흠, 글쎄요. 너무 어리지 않나요? 최소한 한 살은 되어야 건강한 강아지를 낳을 겁니다.”
“그런가?”
“예.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스노우!”
카일이 스노우를 크게 부르자 2층의 복도에서 스노우가 내려왔다. 2층에서 누군가가 주는 간식을 받아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멍멍!
아우레나는 스노우를 보자 반갑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며 달라붙었다. 스노우는 자기 몸의 반도 안 되는 아우레나의 적극적인 대시가 못마땅한지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공격하거나 으르렁대지는 않았다.
카일은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보시다시피 두 마리의 체격 차이가 좀 납니다. 좀 더 기다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흠,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예. 왜 그러십니까?”
“스노우 녀석 왜 저렇게 우리 아우레나에게 쌀쌀맞나? 응? 저만큼 예쁜 강아지가 좋다고 달려들면 좀 더 반갑게 맞이해야 하지 않나?”
“아… 예, 뭐… 부끄러운가 보죠.”
‘내가 그것까지 알 게 뭐야?’라고 생각하는 카일이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게리우스 지부장은 자신의 개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강아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기에 딴지를 걸어 봤자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쯧쯧, 복에 겨운 줄 모르고 말이야. 약혼녀한테 저렇게 대하면 쓰나. 안 그래?”
“좀 더 지나면 사이가 좋아질 겁니다.”
“그래야 할 거야. 끝까지 뻗대면 저 녀석만 손해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죠.”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우리 아우레나처럼 예쁘고 똑똑한 개는…….”
스노우는 자신에게 자꾸 까불며 달려드는 아우레나를 보고 카일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주인. 나 얘 귀찮아.’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리고 카일도 눈으로 대답했다.
‘나도 그래.’
“…어제는 말이지. 산책 중에 처음 보는 길로 들어가도 전혀 겁먹지 않고…….”
그 후로도 지부장은 몇 시간에 걸쳐서 자신의 애견을 자랑하고 떠나갔다. 지겨운 시간이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카일의 계획이 잘 맞아 떨어진 것이기도 했다. 지금 카일은 지부장이 수시로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돈독한 사이로 소문이 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길드의 직원들이 카일을 대하는 태도는 점점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지부장이 돌아가고 얼마 뒤, 폐기장으로 심부름을 갔던 노예가 돌아왔다.
“주인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편지는 잘 전달했고.”
“예. 그리고 폐기장의 주인이 말하기를 지금 마침 주인님이 원하시는 조건의 노예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금?”
“예. 자세한 사정은 여기 편지를 받아왔습니다.”
카일은 편지를 받아서 읽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존경하는 카일 님에게.
최근 모험가로서 승승장구 하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카일 님 같이 훌륭하신 모험가 분이 저희 폐기장을 이용해 주신다니 그야말로 영광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동안의 거래로 인해서 저도 카일 님이 원하시는 노예의 조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범죄 이력이 없을 것.
유능한 능력이 있는 노예일 것.
가능한 여자일 것.
마침 지금 저희 가게에 카일 님이 원하시는 조건에 딱 맞는 노예가 들어왔습니다.
원래 마법사인데 마탑에서 금지한 금기를 실험하다가 징계로 마나홀이 폐기당한 상태로 노예로 떨어진 여자입니다. 마나홀이 폐기되기 전에는 무려 6서클의 마법사였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카일 님이 원하시는 노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워낙 희귀한 케이스의 노예인지라 언제 팔릴지 모르지만 카일 님을 위해서 최대한 뒤로 빼놓겠습니다.
부디 가능하면 오늘 중이라도 오셔서 노예를 인수하시기를 권합니다.]
편지를 다 읽은 카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행운이 따르는군.’
마법사 노예.
노예들 중에 가장 희귀한 케이스다.
일단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라서 어지간해서는 노예로 떨어지지 않는다. 어지간한 죄를 지어도 마탑에서 최대한 변호를 해주고 감싸기 때문에 노예로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마법사 노예가 폐기장에 들어와 있다면 이건 굉장한 찬스였다
‘지금 발레리아에게 능력이 묶여 있기는 하지만 일단 구입한 후에 발레리아를 각성시킨 후에 각성시킨다면…….’
“충분해.”
계산을 마친 카일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편지를 가져온 노예에게 말했다.
“잠시 폐기장으로 갔다 오겠다. 검은 바람에게는 그렇게 말하도록.”
“예. 혼자서 가시는 겁니까?”
“그래. 올 때는 한 명 더 데리고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카일은 급한 마음에 서둘러서 폐기장으로 향했다.
* * *
최악의 상황.
지금 카일의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그렇다.
어째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검은 바람을 노예로 받아들이고 그 후에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라는 유능한 인재를 손에 넣고, 최근 들어서는 7층에서 트롤을 싹쓸이 하다시피 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게리우스 지부장과의 돈독한 인연까지 만들면서 카일의 모험가로서의 인생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펼친 것처럼 순항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카일은 너무 방심했다.
폐기장 주인의 편지를 받고 성급하게 단신으로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 전에 폐기장의 주인이 써준 편지를 그대로 믿는 게 아니었다. 그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 꼴을 당해도 싸지.”
카일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지금 카일의 몸은 굵은 기둥에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고 전신은 구타로 인한 흔적이 가득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돌려 봐야 한다.
* * *
마법사 노예를 손에 넣기 위해서 폐기장에 찾아온 카일을 폐기장의 주인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카일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편지에 적혀 있던 노예는 어디 있지?”
“하하하. 성급하시군요.”
“놀러 온 게 아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리고 폐기장의 주인은 카일을 한쪽에 있는 철장으로 안내했다.
그 안에는 갈색 머리가 지저분하게 기름진 여자 노예가 쓰러져 있었다.
“이겁니다. 꼴은 이래도 원래 6서클 마법사였죠.”
“이 노예가?”
카일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시아나 발레리아의 경우 폐기장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느낌이 있었다.
다른 널리고 널린 노예들과는 다른 집념이나 광채가 그녀들에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 쓰러져서 멍하니 침을 흘리고 있는 여자 노예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노예가 6서클 마법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마법사가 6서클까지 오를 정도의 재능이 있었다면 정신적으로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출중할 텐데…….’
카일은 폐기장의 주인에게 말했다.
“정말 이 여자가 6서클 마법사였나?”
“예. 비록 지금은 이 꼴이지만 틀림없이 그랬다고 합니다.”
“본인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데?”
“아, 그게 곤란합니다. 이 녀석은 혀가 잘려서 말이죠.”
“혀를 잘랐다고?”
“예. 마나홀을 폐기시킨 것만으로는 내키지 않았는지 혀까지 잘라서 노예로 만들었죠. 덕분에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폐기 노예일 뿐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지금의 이 자포자기한 시체 같은 상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결과일까?
카일의 능력으로 회복을 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어째…….’
카일은 무언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구입하고 나서 판단하기로 했다.
‘어차피 폐기장의 노예는 얼마 하지 않으니까.’
“좋다. 구입하기로 하지. 얼마지?”
“예. 6서클 마법사 노예이니 10만 골드 정도가 적당할 듯합니다.”
“…뭐라고?”
“그 정도가 합당한 시세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6서클 마법사인지 않습니까?”
“장난하는 거냐? 여기 있는 노예는 모두 폐기 직전의 노예들일 텐데?”
“하지만 카일 님의 능력으로 회복시키면 되지요. 안 그렇습니까?”
“…….”
순간 카일은 깨달았다.
‘제길.’
일이 꼬였다는 것을 말이다.
폐기장의 주인이 손을 들어 올리자 폐기장 곳곳에서 숨어 있던 이들이 튀어나왔다.
‘모험가는 아니고 양아치나 도적인가?’
폐기장에 숨어 있던 적의 숫자는 스무 명 정도였고 전원 무기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