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노예를 구입한 카일은 바로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예들을 집의 뒤뜰에 모아 두고 말했다.
“카일이다. 앞으로 내가 너희들을 주인이다.”
“예. 주인님.”
“내가 너희들을 어떤 용도로 구입했는지 아는 사람이 있나?”
“…….”
“…….”
카일의 질문에 노예들은 가만히 침묵하며 카일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몰라서 대답을 안 하는 게 아니다.
혹시 괜히 나섰다가 찍힐까 봐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카일은 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관해서 이미 어느 정도 생각을 해놨다.
딱 잘라 말해서 이들을 기존의 세 명과 같은 수준의 대우를 하며 평등하게 다룰 수는 없었다. 능력 자체가 다를뿐더러 노예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모두 가족처럼 동료처럼 대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카일은 생각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단합하면서도 조직으로서의 힘을 유지하는 룰 모델이 뭘까?
‘답은 군대지.’
카일은 이들을 군대에 들어온 신병 다루듯이 할 생각이었다. 적응할 수 있도록 규칙을 가르치고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이해시키고 그 안에서 적절한 자유와 포상이 주어지도록 말이다.
다른 세 명에게도 미리 말해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오늘은 기선 제압이 중요했다. 참고로 그 기선 제압을 하는 것은 카일이 아니다. 누가 하느냐 하면…….
쾅!
“주인님의 말씀이 안 들리나?”
검은 바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그가 발을 구르자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뒤뜰이 작게 진동했다.
카일은 그런 검은 바람에게 손을 들어서 제지하며 말했다.
“첫날부터 너무 몰아붙이지는 마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검은 바람은 신입 노예들에게는 무섭게 대하면서 카일에게는 공손하게 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카일은 노예들을 직접 터치하거나 갈구지 않아도 노예들에게 자연스럽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카일은 노예들에게 차분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던전에 데리고 갈 것이다.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고 나온 부산물이나 채취한 것들을 챙기는 짐꾼으로 너희들 구입했다.”
카일의 말에 노예들의 표정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드러났다.
노예들의 입장에서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농장이나 공사 현장과 달리 목숨이 오가는 던전에서의 활동은 노예들에게 기피하고 싶은 일거리였다.
물론 시키면 해야 한다.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니 카일은 이들에게 선택권을 준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카일이 이들에게 주는 것은 기회다.
“짐꾼이라도 해도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무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훈련시킬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기 내 직속 노예 세 사람이 너희들의 교관이 되어서 훈련시킬 것이다.”
세 사람이라는 말에 노예들은 힐끗 검은 바람만 바라봤다.
지금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바람 한 명뿐이다.
사실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는 일부러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들의 미모는 노예들을 들뜨게 하거나 엄숙한 분위기를 잡는 것에 방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카일은 노예들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푹 쉬어라. 그리고 내일부터 엄중한 훈련이 있을 것이다. 알겠나?”
“예. 주인님.”
“알겠습니다.”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에 카일이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여기 이 비리비리한 허수아비들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남자로 만들어 줘라.”
“예. 주인님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카일이 자리를 비우자 검은 바람이 노예들에게 말했다
“주인님의 명령이 있으니 오늘 하루만 특별하게 네놈들에게 휴식을 허가하겠다. 내일 부터는 지옥 훈련이 뭔지 깨닫게 해줄 테니 단단히 각오하도록. 알겠나?”
검은 바람이 말에 노예들은 수군거리다가 말했다.
“저기…….”
“뭐냐?”
“저희는 당…신을 뭐라고 물러야 합니까?”
“교관님이다. 한 번 알려줬으니 다른 명칭이 튀어나온다면 죽을 줄 알아라. 알겠나?”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교관님.”
“알겠습니다. 교관님.”
열 명의 노예들은 척 봐도 자신들보다 훨씬 더 강해 보이는 검은 바람에게 잔뜩 겁을 먹었다.
잔뜩 겁을 먹은 열 명의 노예들이었지만 그 후에 주어진 대우에는 상당히 놀랐다.
“여기가 너희들의 방이다. 한 방에 다섯 명씩이니 들어가서 사용하도록.”
카일의 집에는 방이 여섯 개였다.
그중에 카일이 하나를 사용하고 다른 세 명이 하나씩 방을 차지하고 나니 남은 방은 둘이었다.
사실 방 두 개에 사람을 열 명이나 밀어 넣는 것은 좀 힘들지 않은가 싶었지만 카일은 다 생각이 있었다.
“방에 잘 수 있는 침대를 2층으로 만들고, 개인 사물함을 하나씩 준비해서 개인의 소지품을 관리하게 해라.”
군대식 2층 침상을 도입하고 개인 관물대를 도입해서 한 방에 다섯 명이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만들었다.
사실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는 자신들이 한 방을 쓰면 된다고 했지만 카일은 거부했다
“너희들은 신참들과 확연하게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위계가 설 테니까.”
그렇게 해서 방 두 개를 열 명이서 쓰게 했다. 사실 노예들에게 이 정도면 상당히 훌륭한 대우였다.
비록 방은 좀 좁았지만 가구는 튼튼했고 침구류도 모두 깨끗한 새것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열 명의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방을 보고 나름 만족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악독한 주인의 경우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골방에 노예들을 열 명 스무 명을 처박아 두고는 냄새나는 담요나 던져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에 비해서 이 정도면 확실히 나쁜지 않은 것 같았다.
“이번 주인님은 썩 괜찮은 것 같은데?”
“모르지. 그래도 우리를 던전에 데리고 간다고 하잖아?”
“그보다 나는 검은 바람이라는 새끼가 더 마음에 안 들어.”
“나도 그래. 자기도 노예면서 뭐가 잘났다고 교관이라는 거야?”
“제길, 그냥 확 뒤통수를 까버릴까 보다.”
노예들은 그 자리에 없는 검은 노예를 씹으면서 소소한 단합을 다졌다.
하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지금 검은 바람은 밖에서 이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얘기를 들은 검은 바람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부터 죽었어.’
* * *
어느 정도 휴식 시간이 지나고 검은 바람이 열 명의 노예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규칙 하나를 알려주겠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매일같이 지하의 목욕탕에서 몸을 씻어야 한다.”
“모… 몸을 씻어야 한다고요?”
“주인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앞으로 교관과 주인님에 대한 모든 말의 끝은 ‘다'나 ‘까'만 허용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교관님 말에 따르지요. 억!”
빡.
말을 하던 노예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검은 바람이 ‘요’자가 나오는 동시에 정강이를 까버린 것이다.
“방금 한 말도 못 지키나? 대가리가 돌인 거냐? 아니면 반항하는 거냐?”
“마… 말로 해도…….”
“뭐?”
검은 바람은 싸늘한 눈으로 주저앉은 노예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 노예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아, 아닙니다…….”
숙련된 전사인 검은 바람과 그냥 일꾼 노예 사이에는 너무나 큰 힘의 차이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힘의 차이에 그 노예는 완전히 겁을 먹고 굴복했다.
검은 노예는 다른 노예들을 데리고 지하의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앞으로 이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그 후에 목욕탕 청소를 하는 것까지 모두 너희들의 일이다.”
“여기를 저희가 써도 되는 겁니까?”
“그렇다. 주인님은 깔끔한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항상 청결을 유지하도록 하라.”
사실 카일은 깔끔한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위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뿐이다.
잘 먹고 잘 씻기만 해도 질병의 절반 이상은 예방할 수 있는데 이 세계의 사람들은 너무 안 씻어서 문제였다.
그래서 카일은 노예들이 씻을 수 있게 그들 전용의 비누와 깨끗한 타월도 준비해 주었다.
그 물건을 보고 노예들은 크게 놀랐다.
“교, 교관님. 정말 이 비누를 저희가 써도 되는 건가…까?”
“주인님에게 감사하며 사용해라.”
검은 바람의 말에 노예들은 크게 놀랐다.
‘노예한테 비누를 준다고?’
‘새 주인이라는 인간은 정말 얼마나 깔끔한 걸 좋아하는 거지?’
‘좋은 주인이야, 나쁜 주인이야? 가늠이 안 되네.’
노예들은 비누를 이용해서 몸을 빡빡 씻었다.
노예 시장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던 이들이었지만 다 씻기고 나니 몸이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씻는 도중에 목욕탕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새 옷을 가지고 왔어요.”
“고맙다 아리시아. 거기 놔두고 가라.”
“예.”
그리고 아리시아가 떠나자 노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여자?’
‘방금 여자였지.’
‘목소리만 들어도 예쁜 것 같은데…….’
그런 노예들을 보고 검은 바람이 말했다.
“방금 나와 대화를 한 노예는 아리시아, 나와 마찬가지로 너희들의 교관이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발레리아라는 여자 노예도 있다. 둘 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이지.”
그 말에 노예들 중에 몇몇 이들은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이 아무리 극한 상황에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이성을 향한 욕구일 것이다.
노예들이 같은 노예들과 눈이 맞는 일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검은 바람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괜한 생각은 하지 말라. 그 둘은 주인님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는 여인들이다. 시선 하나 말투 하나 조심하는 게 좋다. 만에 하나 주인님의 심기를 거슬린다면 목숨은 없다고 생각해라.”
그 말에 노예들의 표정에 다시 긴장이 돌아왔다.
“10분 안에 다 씻고 30분 안에 욕실을 청소하고 나간다. 알겠나?”
“예. 교관님.”
이제는 대답도 조금 잘 돌아오는 신입들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새 옷을 갈아입고 나니 신입 노예들은 기분이 좀 나아졌다.
“새 옷이라고 해도 낡은 중고일 줄 알았는데 정말 새 옷이었어.”
“혹시 주인님은 돈이 많은가?”
“그럴지도 몰라.”
수근 거리는 그들에게 검은 바람이 말했다.
“식당은 1층에 있다. 모두 모이도록.”
“예. 교관님.”
그들이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미 식탁에는 요리가 다 차려져 있었다.
요리로 올라가 있는 것은 샐러드와 감자, 그리고 구운 돼지고기와 삶은 달걀이었다.
노예들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진수성찬에 노예들은 모두 입에 침이 고였다.
“모두 자리에 앉아라.”
검은 바람은 그들을 자리에 앉게 하고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첫 날이고 하니 아리시아가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내일 부터는 당번을 정해서 너희들이 각자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 알겠나?”
“예. 교관님.”
“좋다. 모두 식사를 시작해도 좋다.”
“예. 교관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예들은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검은 바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은 식사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신다. 너희들 훈련에 충실하게 따라온다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 말에 노예들은 이제 눈이 반짝이기까지 했다.
보통 노예들이 고기를 먹는 경우는 주인의 생일이나 축제날 정도다. 악독한 주인의 밑에 있을 경우 평생 고기를 먹어 보지 못하는 노예도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씩 고기를 준다니…….
‘진짜 그런다면 나는 던전에 들어가도 좋아.’
‘맛있어. 정말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밥을 준다니.’
‘이번 주인님은 좋은 분이야. 틀림없어.’
깨끗한 주거 환경과 비누와 새 옷 등에서는 반신반의 했던 노예들이지만 고기 앞에서는 카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좋은 주인이라고 말이다.
카일은 그들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많이들 먹어라. 내일부터 토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