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너무나 깔끔한 한 수로 오크 워리어를 정리한 발레리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무기를 거뒀다.
사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진작 이렇게 할 수도 있었다. 다만 아직 전략을 점검해보는 단계이고 아리시아의 연습도 필요하기에 이렇게 방어에 주력하며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전투가 끝나고 마석을 정리하면서 카일이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7층의 오크들은 어때?”
“별 문제 없습니다. 6층보다 조금 더 강한 것은 맞지만 아직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좋군. 이 정도면 충분히 느긋한 페이스로 탐색 할 수 있겠어.”
이번 전투에서 오크 워리어 한 마리에 오크 열 마리를 상대하면서 발레리아와 아리시아만 나섰을 뿐 카일과 검은 바람은 나서지도 않았다. 전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어디까지 7층의 몬스터를 확인 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던 것이다.
여력을 충분히 남겨 둘 수 있는 상황이어야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모험가라고 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거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카일은 최대한 안전을 우선시하면서 던전을 탐색하고 싶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 같은 노예를 손에 넣었다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진작 7층, 아니 그 밑에 미탐사 지역인 8층 이하를 목표로 해서 대박을 노렸을 것이다.
“주인님. 오크 워리어가 가지고 있던 칼을 챙길까요?”
“뭔가 특이한 것으로 보이나?”
“아니요. 그냥 바스타드 소드 같아요.”
“그럼 내버려 둬. 부산물은 오직 트롤의 가죽만 챙긴다.”
“예. 주인님.”
아리시아는 카일의 말대로 오크 워리어의 칼을 내버려 뒀다.
이번 원정을 오면서 카일이 정한 목표는 트롤 네 마리였다. 트롤을 네 마리 잡고 가죽과 간을 꺼내서 가져가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익이 된다.
다만, 트롤의 가죽은 그 부피가 상당해서 그걸 네 마리나 챙기려면 다른 부산물은 다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카일은 다른 몬스터와의 싸움에서는 오직 마석만을 챙기고 부산물은 트롤의 물건만으로 한정지은 것이다.
전에 대박이 났던 미스릴 함유 도끼 같은 것이 나온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대박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주인님. 정리 다 끝났습니다.”
“좋아. 이동하자.”
오크들의 마석을 모두 챙긴 카일은 다시 7층 탐색에 들어갔다.
7층 탐색을 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검은 바람이 카일에게 말했다.
“주인님. 이제 슬슬 휴식을 취할 장소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좀 이르지 않나?”
“안전한 지역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지역과 달리 미탐사 지역에서는 좀 이른 시간에 휴식을 결정하는 게 좋습니다. 쉴 수 있는 지역을 찾기가 힘드니까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좋아. 그럼 이동하면서 적절한 장소를 찾으면 휴식하자.”
“예. 주인님.”
그리고 한 시간 정도 더 이동한 후 카일의 파티는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짐을 풀었다.
길목이 좁으면서도 퇴로가 뚫려 있고 적이 몰래 접근하기는 힘든 지역이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짐을 풀고 휴식에 들어갔다.
“휴우우. 생각보다 조금 지치는군요.”
던전의 7층이 처음인 발레리아는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많이 힘든가?”
“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뭐지?”
“전투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어두운 던전 안을 계속 이동하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꽤 지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군. 뭐,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다.”
발레리아는 본격적으로 던전을 탐색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긴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일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제법 많이 익숙해 졌다. 거기다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 같은 든든한 동료들도 있는 이상 든든하기도 해서 정신적인 피로는 별로 느끼지 않았다.
“트롤을 찾을 수가 없군. 역시 추적에 유능한 도적이 있어야 하나?”
문제가 있다면 오늘의 성과다.
오늘 일행은 하루 종일 7층을 돌아다녔지만 오크와 고블린만 걸렸을 뿐 트롤은 한 마리도 건지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 7층에 오자마자 트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보통 트롤은 몰려다니지 않고 혼자서 다니기 때문에 흔적이 잘 남지 않고 찾기도 힘든 법이다. 거기다 7층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 대부분이 트롤이 목적이다 보니 트롤은 찾는 것은 더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7층에서 전문적으로 트롤을 사냥하는 모험가들은 파티에 트롤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추적꾼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카일의 파티에는 그 추적꾼 포지션이 없었지만 말이다.
“조금 안이했군.”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고마워.”
카일은 자기 몫의 식사를 챙겨주는 아리시아에게 감사를 표하고 음식을 먹었다.
던전에서의 식사는 항상 그렇듯이 말린 건량과 육포 등이었다.
대형 클랜의 경우 보급반을 갖춰서 제대로 된 식량을 챙겨서 다니기도 한다고 하지만 보통은 말린 식량으로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카일은 아무런 불만도 가지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오늘 불침번은 나부터 서지.”
“좋아. 두 시간 후에 깨워 줘. 당연한 말이지만 실수 하지 마.”
“말 그대로 당연한 말이군.”
카일의 파티의 불침번은 두 시간 간격이었다.
다만 카일은 제외였다.
카일 스스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세 명의 노예가 한 목소리로 반대를 외쳤고, 결국 카일은 빠져야 했다.
‘세 명 다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강하다니까.’
어쨌든 카일은 몸을 눕혔다.
던전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게 중요했다.
* * *
“…인님! 주인님!”
자신을 부르는 아리시아의 급박한 소리에 카일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카일보다 한 박자 빠르게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도 벌떡 일어났다.
“트롤?”
“이놈!”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둘은 눈을 붙이고 쉬고 있었지만 무장은 전혀 풀지 않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옆에 두고 선잠을 자고 있던 둘은 방금 일어났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적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든 것은 쉬고 있던 카일의 무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나타난 트롤이었다.
다행히 불침번을 서고 있던 아리시아가 기민하게 그 소리를 듣고 경계하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동료들을 깨운 것이다.
“크워어어어!”
트롤은 기습이 틀렸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괴성을 지르며 압도하려고 했다.
“시끄러!”
뻐어억!
“어디서 큰 소리야!”
콰직!
이 파티에는 트롤의 포효 따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강자들이 둘이나 있었다.
용맹하게 울부짖든 트롤은 발레이아의 방패에 얻어맞고 검은 바람의 발차기에 한 대 더 맞고 휘청거렸다.
둘은 앞뒤로 트롤을 포위하더니 서로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끝내자.’
‘좋아.’
그리고 발레리아의 브로드 소드에 오러가 서리더니 트롤의 다리를 그대로 절단했다.
서걱!
“크워어어어!”
쿠웅!
다리가 잘린 트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워낙 재생력이 뛰어난 몬스터이니 내버려 두면 달린 다리도 재생할 수 있겠지만 그걸 기다릴 검은 바람이 아니다.
“하압!”
마찬가지로 오러가 서려 있는 검은 바람의 태도가 트롤의 목을 깔끔하게 쳐냈다.
촤아악!
트롤은 최후의 단말마를 남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이 날아가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아리시아. 괜찮아?”
압도적인 힘으로 트롤을 정리한 둘은 검을 거두며 동료의 상태부터 체크했다.
“예. 괜찮아요.”
“나도 괜찮다. 그리고 잘했다. 아리시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카일의 칭찬에 아리시아는 칭찬이 기분 좋은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수면 시간을 망치기는 했지만 트롤의 등장은 반가운 것이었다. 하루 종일 찾아도 보이지 않던 트롤이 스스로 찾아왔으니 말이다.
일행은 트롤의 가죽을 벗기고 뱃속을 갈라서 간과 마석을 챙겼다.
가능하면 부산물의 가치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트롤의 몸을 건드리지 않고 다리와 목에만 결정타를 날렸었다. 덕분에 상당히 좋은 품질의 가죽과 싱싱한 간을 얻을 수 있었다.
“일단 한 마리 잡았군. 앞으로 세 마리만 더 잡고 올라가도록 하자.”
“예. 주인님.”
* * *
“주인님. 이제 식량을 3분의 1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7층에서 탐색을 시작하고 일주일. 그동안 카일의 파티는 꽤 넓은 범위를 탐색했지만 결국 트롤은 한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첫날 야영 중에 습격해온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트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틀 전에 다른 파티에서 잡은 것처럼 보이는 가죽이 벗겨진 트롤의 사체를 하나 발견한 게 다였다.
‘전문적인 추적꾼 없이 트롤을 사냥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였군.’
좀 더 7층 탐색을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었지만. 정해둔 기간을 넘겨서까지 계속 탐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하루 이틀 정도 더 시간을 들인다고 해서 트롤을 발견한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지상으로 올라간다. 모두 준비하도록.”
“예. 주인님.”
결국 카일은 철수를 결정했다.
지상으로 돌아간 카일은 마석과 부산물을 정산했다.
마석의 경우 31골드 50실버가 나왔고, 부산물은 트롤 한 마리 분량의 가죽과 간, 그리고 오면서 덤으로 주운 오크들의 무기 등을 처분 33골드 50실버가 나왔다.
“다 해서 65골드군. 뭐, 이 정도면 실패는 아닌가?”
목표했던 트롤 네 마리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일주일 동안 던전에 틀어박혀 있었던 만큼 제법 수익이 나오기는 나왔다.
“좋아. 간단하게 한잔하면서 이번 원정에 대한 반성 회의라도 할까?”
카일은 노예들을 모두 데리고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던전에서 나온 후에는 술집.
어느새 카일 파티의 굳어진 루틴이었다.
“맥주 네 잔, 그리고 구운 소시지와 야채 볶음, 훈제 닭고기도 두 마리 줘.”
“예. 알겠습니다.”
“맥주부터 가져다 줘.”
“옛!”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 카일은 모두에게 말했다.
“우선, 이번 원정은 엄밀하게 말해서 실패야. 수익은 냈지만 원래 목표로 잡았던 트롤 사냥이 실패했지. 그것에 관해서 얘기해 보자.”
그러자 검은 바람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트롤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의 추적술이 있었다면…….”
“그만둬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굳이 따지면 그냥 막연하게 돌아다니면 트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내 잘못이 가장 크겠지.”
카일의 말이 맞았다.
다른 파티원들이 7층에서 추적꾼을 파티에 포함시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없어도 되겠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추적꾼이 필요해. 아니면 하다못해 다른 수단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