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검은 바람은 1층의 식당에 물을 마시러 왔다가 아리시아가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하고 있느냐?”
“아, 오라버니.”
아리시아는 검은 바람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잠이 잘 안 와서요.”
웃고 있었지만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의 표정에서 그늘을 볼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것은… 과연, 그런 거군.’
나이를 거저먹은 게 아닌지 검은 바람은 금방 상황을 깨달았다.
아리시아가 발레리아의 등을 밀어서 카일의 침대로 떠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리시아가 여기서 이렇게 혼자 궁상을 떨고 있다는 것은…….
‘쯧,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은 원래 좋은 게 아닌데, 주인님이 상대이니 그러지 말라고 말도 못 하겠군.’
검은 바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아리시아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심란할지는 뻔히 짐작이 갔다.
검은 바람은 잠시 생각하다가 부엌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가지고 다시 왔다.
“오라버니?”
“같이 한잔 하자꾸나.”
검은 바람이 가지고 온 것은 술이었다.
잔까지 두 잔을 착실하게 챙겨온 검은 바람을 보고 아리시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예가 멋대로 술을 마신다?
보통 같으면 죽을 때까지 매질을 당할 수도 있을 만큼의 중죄다.
물론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는 카일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행동에 주의를 기울였다. 혹시나 주인의 관대함을 이용해서 멋대로 구는 모습이 카일의 위신에 해를 끼칠 것 같아서 스스로 자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검은 바람이 스스로 술을 꺼내온 것이다.
검은 바람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내가 책임지마.”
“오라버니…….”
“살다 보면 술 없이는 잠들기 힘든 밤이 있다. 너에게는 오늘이 아마 그렇겠지.”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고 잔을 들었다.
아리시아는 쓰게 웃으며 잔을 마주 들었다.
“뭘 위해서라고 할까요?”
“우리들의 주인을 위하여.”
“…….”
“한 번 나락으로 떨어졌던 우리에게 있어서 그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없죠.”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잔을 부딪쳤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아리시아는 검은 바람이 해준 말을 가슴 깊숙이 새겼다.
* * *
아침이 되고 카일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풍경에 살짝 어색함을 느꼈다.
‘아… 맞아, 아리시아가 아니지.’
평소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부드럽게 사르륵 흘러내리는 금발이었다.
그런데 지금 카일의 눈에 보이는 것은 타는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어젯밤 카일과 밤을 함께한 것이 아리시아가 아니라 발레리아였기 때문이다.
카일은 곤히 잠들어 있는 발레리아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여자는 다 다르구나.’
어젯밤 카일은 아리시아 이외에 처음으로 다른 여자를 품어 봤다. 그러고 나서 알게 된 것은 같은 잠자리라고 해도 상대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리시아는 카일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순종적인 여자다.
발레리아는 한 번 불이 붙으면 스스로 불타올라서 열정적으로 카일과 격돌했다.
같은 행위라고는 생각 하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은 많이 달랐다.
다만, 몇 가지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아리시아도 발레리아도 둘 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것과 그녀들과의 잠자리가 황홀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침에 자신의 품안에 안겨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것도 같았다.
‘이래서 남자들이 많은 여자를 원하는 건가?’
평소 아리시아와 보내는 밤에 크게 만족하고 있던 카일이었다. 그런데 발레리아와 섹스를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자 그녀를 향한 소유욕도 생겨났다.
아리시아, 발레리아.
둘 다 놓치고 싶지 않고 자신이 계속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친부인 루트비안 자작이 왜 그렇게 많은 여자, 그리고 새로운 여자를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카일의 안에도 여자 둘… 아니, 더 많은 여자를 원하는 욕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쓰레기하고 같은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되겠지.’
카일은 적어도 자신의 친부와 같은 쓰레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아리시아도 발레리아도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했다.
“발레리아, 일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자신의 품안에 안겨 있는 발레리아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주, 주인님? 앗!”
발레리아는 자신이 카일보다 먼저 일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이런 실수를…….’
어젯밤 카일과의 섹스에 모든 진을 다 쏟아서 그럴까? 그녀는 평소보다 더 깊게 잠이 들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런 실책을… 음.”
카일은 발레리아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서 진정시키고 말했다.
“괜찮아. 천천히 준비해.”
“예. 주인님.”
짧은 입맞춤이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발레리아의 눈은 완전히 몽롱하게 풀렸다.
단 하룻밤이지만 그녀는 이미 아리시아 못지않게 카일에게 깊숙하게 빠졌다.
* * *
카일은 발레리아를 데리고 행크의 대장간으로 찾아갔다. 다른 생필품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던전에서 활동하기 위한 장비를 구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서 오십시오, 카일 님.”
“제 새로운 노예의 장비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호오… 이거 또 무척 훌륭한 노예를 구입하셨군요.”
행크의 점원은 발레리아를 위아래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척 봐도 기사 출신으로 보이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하하. 다 티가 나는 법이죠. 그럼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그러자 발레리아가 말했다.
“검과 방패, 그리고 갑옷을 원한다.”
“그렇다면 이쪽의 물건들을 추천드립니다.”
점원은 발레리아를 데리고 평소 카일에게 보여 주던 물건과는 다른 물건이 있는 쪽으로 데리고 갔다.
“아마 기사 출신이 사용할 방패라면 라운드 실드보다는 카이트 실드나 타워 실드가 익숙할 겁니다. 그렇죠?”
“그렇다. 흠…….”
발레리아는 카일이 사용하는 라운드 실드보다 훨씬 더 크고 두꺼운 방패들을 보고 있었다.
카일도 시험 삼아서 슬쩍 몇 개를 들어 봤다.
‘이거 꽤 무겁잖아?’
검보다 훨씬 무거운 카이트 실드의 무게에 포기하고 제자리에 내려두었다. 금속을 둘러서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대형 방패는 방어력은 단단하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았다.
발레리아는 방패를 한참 둘러보다가 한 가지 물건을 집었다.
“이게 좋겠군.”
그녀가 선택한 방패는 타워 실드 중에서도 특히 더 큰 사이즈의 것이었다.
방패를 들고 자세를 웅크리고 있으면 그녀의 몸이 80% 이상 가려졌다.
“괜찮아? 너무 크지 않나?”
카일의 물음에 발레리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무게도 적당하군요.”
“무게라… 웃?”
카일은 한 번 들어보려고 하다가 깜짝 놀랐다.
발레리아가 적당하다고 말한 의미를 무게에 비해서 가볍다고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가 집은 방패는 크기에 비해서 오히려 더 무거웠다.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패의 철판에 납을 합금해서 두른 것입니다. 중량이 상당해서 그것 자체를 휘둘러서 둔기처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방패 자체를 둔기로 사용한다고?”
“그렇습니다. 자세한 사용 방법은 던전에서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카일은 발레리아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수긍했다.
애당초 자신보다 그녀가 더 고수라는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조언 같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무기와 갑옷도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발레리아는 점원의 추천에 따라서 무기를 신중하게 골랐다.
“검은 이걸로 하지.”
그녀가 고른 무기는 브로드 소드였다.
길이가 롱 소드보다 짧은 80센티미터 정도였지만 보통 검보다 두께가 두꺼워서 튼튼하고 휘둘렀을 때 묵직한 손맛이 좋았다.
“묵직한 방패와 두꺼운 브로드 소드라……. 그렇다면 갑옷은 가죽보다 금속이 좋겠군요.”
“갑옷은 당연히 금속이어야 한다. 플레이트 메일이 있나?”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던 점원은 잠시 카일의 눈치를 봤다.
풀 플레이트 메일은 가격이 상당하다. 노예에게 멋대로 추천하기에는 눈치가 보이는 고급품인 것이다.
하지만 카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침 여성형 플레이트 메일이 재고가 있습니다. 중고긴 하지만 하자는 없는 물건입니다.”
“호오, 꼭 보고 싶군.”
무기를 고르는 발레리아의 모습은 마치 장난감 가게에 들어간 어린애 같았다.
카일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귀엽네.’
최종적으로 그녀가 고른 것은 하프 플레이트 메일과 그 안에 받쳐 입는 셔츠형 체인 메일, 브로드 소드와 타워 실드, 그리고 부무장으로 투척용 손도끼와 단검을 구입했다.
확실히 귀족 출신이라서 그럴까?
무기를 구입하는 것에 있어서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와 달리 사양이라는 것이 없는 그녀였다.
그렇게 모든 무장을 완전 구비하고 나니 30골드 70실버라는 가격이 나왔다.
‘와우…….’
카일은 겉으로는 표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다.
이제까지 장비를 맞추면서 단일로는 최고가가 나온 것이다.
‘돈 벌기 전에 만났으면 장비 못 맞춰 줬겠는데?’
다행인 것은 요즘 카일의 벌이가 나쁘지 않아서 이 정도 금액도 어찌어찌 낼 수는 있다는 것이다. 사용 가능한 현금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못 낼 정도는 아니다.
카일은 가격을 지불했고 발레리아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 무장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줘.”
이번의 지출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했다.
무기를 산 이후, 카일은 발레리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나 왔어.”
“오셨습니까? 주인님.”
카일이 돌아가자 아리시아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래. 검은 바람은?”
“오라버니는 뒤에서 수련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주인님. 괜찮다면 저도 새로운 장비를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발레리아는 새로운 장비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카일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레리아는 장비를 가지고 뒤뜰로 향했다. 아마도 검은 바람과 가볍게 한 판 붙어 보면서 장비를 점검할 것이다.
“주인님. 식사는 하셨나요?”
“응 대강 먹고 왔어?”
“그러시군요.”
아리시아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카일은 그 미소 속에서 작은 그늘을 읽을 수 있었다.
“혹시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정말요.”
아리시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카일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보다 필요 이상으로 밝은 느낌을 주려고 하는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혹시…….’
“아리시아, 발레리아 때문에 불안해?”
“아,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리시아는 부정했지만 정곡을 찔린 것처럼 허둥거렸다.
‘역시 그런가.’
카일은 그런 아리시아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녀에게 있어서 카일은 하나밖에 없는 주인이고 이제까지 여자로서의 총애를 독차지해 왔다. 그것을 누군가와 나눠야 한다면 아리시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느껴질 것이다.
아리시아는 카일에게 더 열심히 변명했다.
“정말이에요. 오히려 저보다는 발레리아 씨를 훨씬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셔도 돼요. 아직 많이 불안할 시기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
하지만 그녀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면 할수록 카일의 확신은 더 깊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발레리아 씨가 저보다 훨씬 강하고, 주인님에게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저보다는 훨씬 더…….”
결국 그녀는 말을 하다가 차마 말을 마저 잇지도 못했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 거리는 그녀를 보고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시아.”
“주인님.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그만… 꺄악!”
카일은 그대로 아리시아를 공주님처럼 안아 올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2층의 자기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주, 주인님… 지금… 앗……!”
카일은 아리시아의 불안함을 노예로서 주인에 대한 총애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해석했다.
어차피 주종관계.
아리시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녀가 이렇게 불안해한다는 것은 노예로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 슬프고 불안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알려줘야겠지. 내가 아리시아에 대한 애착이 약해질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말이야.’
2층의 침실로 올라간 카일은 침대에 아리시라를 눕히고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아직 해도 지지 않, 아…….”
“괜찮아. 커튼 치면 돼.”
그리고 카일은 아리시아의 불안감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