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발레리아가 내민 충성의 검.
카일은 그것을 바로 받지 않았다.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충성은 기사로서인가? 아니면 노예로서인가?”
“전부 다입니다.”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발레리아는 카일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카일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 모든 것을 주군에게 바칩니다. 당신이 죽으라면 웃으며 죽을 것이며, 싸우라면 드래곤이라고 해도 싸우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바쳐서 당신의 이상을 이루는 도구로서 헌신하며 제 남은 인생과 목숨의 모든 권리를 그대에게 바칠 것을 신의 이름 앞에 맹세합니다.”
예전에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카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발레리아.”
“예. 주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불편할 수 있으니까 당분간은 주인으로 불러라. 네가 기사의 직위를 되찾게 되면 그때 가서 주군이라는 호칭을 써도 늦지 않다.”
“예. 주인님.”
아무런 군말 없이 카일의 명령에 따르는 발레리아였다.
카일과의 관계를 정리한 발레리아의 다음 차례는 동료들과의 관계정리였다.
“저는 아리시아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발레리아 씨.”
“크흠, 발레리아다. 좀 전에는 실례가 많았다.”
반항적이 자신을 씻기기 위해서 아리시가가 상당히 고생했던 것을 기억한 발레리아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아리시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면서 인사를 했고 그 다음으로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마주했다.
“검은 바람이다.”
“발레리아 드 스콧이다.”
“귀족도 아닌데 성은 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
“조금 전까지 주인님에게 보였던 건방진 태도는 넘어가 주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똑같이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알겠나?”
검은 바람은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발레리아는 귀족 출신이다. 게다가 아직도 자기 귀족의 성을 이름에 댈 정도로 자존심이 꼿꼿한 인물이다. 지금 당장 주인인 카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몸에 베여 있는 오만함이 어디서 나올지 모를 일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힘을 회복한 발레리아의 언동은 마치 기사와 같이 변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기선을 제압해서 위계를 똑바로 잡으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가만히 두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지?”
다만 문제는 발레리아도 그냥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충성을 맹세한 것은 카일이지 같은 노예인 검은 바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먼저 카일의 노예가 되었다고 윗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검은 바람의 모습이 발레리아는 썩 좋지 않았다.
강하게 나오는 발레리아를 보고 검은 바람이 이를 드러내고 말했다.
“호오오… 해보자는 건가?”
“못할 것도 없지. 몸을 좀 풀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발레리아도 자신의 목을 좌우로 꺾으면서 말했다.
예전에 기사단에서도 그랬지만 여자인 자신을 깔보고 힘으로 억누르려는 남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맞서서 발레리아를 버티게 해줬던 것은 오직 실력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의 경험상 닥치라고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닥치게 만드는 게 더 빠르고 확실했다.
두 사람이 일촉즉발하려는 것을 보고 아리시아는 안절부절 못했다.
“오라버니도 발레리아 씨도 그만 두세요. 동료끼리 싸우면 안 돼요.”
아리시아로서는 두 사람을 말리려고 한 말이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굳이 ‘씨’자를 붙일 필요는 없단다. 아리시아. 네가 더 선배지 않니?”
“오라버니? 설마 이 근육 덩어리가 너한테 그런 얼토당토않은 호칭을 강요했나? 지금 당장 되돌리게 해주지. 기다려라. 아리시아.”
“아니, 그게 아니라 두 사람 다 사이좋게…….”
둘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리시아를 보고 카일이 불렀다.
“아리시아.”
“주인님. 두 사람이 지금 싸우려고 해요.”
“알아. 괜찮으니까 이리 와.”
카일의 명령에 아리시아는 순순히 걸어와서 카일의 옆에 섰다. 그리고 카일은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앞으로 함께 던전에서 동고동락을 같이 할 동료들끼리 감정에 앙금이 남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카일은 집 뒤에 있는 작은 뒤뜰을 가리키며 말했다.
“딱 한 번이다. ‘서로 다치게 하지 말 것’이라는 조건하에 깔끔하게 결판을 내. 알겠나?”
“예. 주인님.”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카일의 말에 두 사람은 허리를 깊게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자신들의 마음을 잘 알아준 카일의 조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와라. 멀대녀.”
“후회하지 마라. 근육 돼지.”
카일의 집에 있는 뒤뜰에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마주섰다. 그런 그들의 옆에는 카일과 아리시아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리시아는 상당히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인님. 괜찮을까요? 이런 짓을 하다가 잘못해서 둘 다 크게 다치면 어떻게 하죠?”
“초보도 아니고 숙련된 달인들이니까 힘 조절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그냥 주인님이 명령하시면 서로 싸울 일도 없잖아요?”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카일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종속 마법으로 명령한다고 해도 사람의 감정까지 멋대로 할 수는 없다.
물론 카일이 명령을 한다면 둘은 싸우지 않을 것이고 서로를 자극하는 언동도 그만둘 거다.
하지만 서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마음 한 구석에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어 있다. 그게 동료들 간에 불화로 이어진다면 실제 던전에서의 활동도 지장이 생길 수 있다.
‘차라리 한 번 푸는 게 좋다. 그것도 가능하면 초반에 말이야.’
그렇기에 카일은 차라리 판을 벌여준 것이다.
검은 바람은 목검을 들고 몇 번 휘둘렀다.
훙! 후웅!
평소 사용하던 대형 대검에 비하면 무게가 반의 반도 되지 않다 보니 마치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이 정도면 다치지는 않겠지.’
발레리아는 비슷한 사이즈의 수련용 목검을 잡고 옆에 있는 작은 나무 방패 하나를 들었다.
‘좀 작기는 하지만 충분해.’
무기를 고른 두 사람은 서로 마주했다. 준비가 된 듯한 두 사람에게 카일이 말했다
“서로 다치지 않게 주의하도록 알겠나?”
“예. 주인님.”
“명심하겠습니다. 주인님.”
둘의 대답이 떨어진 후 카일이 말했다.
“시작!”
빠악!
카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커다란 타격음이 울렸다. 검은 바람이 한 걸음에 파고들어서 목검을 내려친 것이다.
‘끝인가?’
갑작스런 한 수에 카일은 승부가 싱겁게 갈렸다고 생각했다.
“흐음…….”
그러나 검은 바람의 미간이 꿈틀 거렸다.
회심의 일격이라고 생각한 첫 수를 상대가 방패를 들어서 막은 것이다.
“제법이군.”
“네놈이야 말로.”
서로 1합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어디 이것도 버틸 수 있는지 볼까?’
“흡!”
검은 바람은 연속으로 목검을 휘두르며 공격을 이어갔다.
눈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한 공격이 다양한 각도에서 발레리아를 덮쳤다.
“훗.”
발레리아는 피식 웃었다.
‘너무 얕보는군.’
그녀는 검은 바람의 거센 연속 공격에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두 발을 단단하게 땅에 발을 붙인 상태로 공격을 막아갔다.
빠악! 뻐억! 딱!
목검이 발레리아의 나무 방패에 부딪히는 소리가 뒤뜰에 시끄러울 정도로 울렸다. 하지만 검은 바람의 이 거센 공격도 발레리아의 방어를 뚫지는 못했다.
‘훌륭한 방패술이다. 저런 나무 방패로 내 공격을 다 막고, 쳐내고 있어.’
‘대단하군.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바로 뚫리겠어.’
서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과 승부는 별개의 일이다.
“하아압!”
“으오오오오오!”
두 사람은 더 거센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힘과 속도를 끌어 올렸다.
이제 카일의 눈에는 두 사람의 동작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카일은 상당히 놀랐다.
‘검은 바람과 대등한 수준이라고?’
그동안 던전에서 활동하면서 검은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질리도록 잘 알고 있는 카일이었다.
사실 지금 카일이 모험가로서 거둔 성공의 대부분은 검은 바람이라는 강력한 노예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레리아는 그런 검은 바람과 대등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쁜 오산이군.’
발레리아의 합류는 파티의 전력은 단번에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빠가가각!
그때 두 사람의 동작이 멈췄다.
멈춘 상태의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바람의 공격에 발레리아의 방패가 부서져 있는 상태였다.
발레리아는 그 상태에서 검을 서서히 내리더니 말했다.
“내가졌군.”
“아니, 그건 모르지.”
검은 바람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무래도 이런 형태의 승리는 찝찝한 모양이다.
발레리아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방패 없이는 네 공격을 막을 자신이 없다. 나의 패배야.”
“그건 다치지 않게 한다는 주인님의 명령을 지킬 때의 일이지. 무엇보다 그런 나무 방패로는 네 실력을 반도 살리지 못해. 아닌가?”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지. 피차간의 입장은 공평했어.”
검은 바람은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무기를 바꿔서 진검으로 승부하면 되기는 하는데…….”
“둘 중 하나가 죽거나 다치겠지.”
“그래. 그렇겠지.”
둘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무기를 뒤로 거뒀다.
“어쩔 수 없군. 무승부로 하자.”
“네가 그러겠다면 좋아.”
두 사람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바라보며 새삼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검은 바람이다.”
“발레리아다.”
결과적으로 카일이 원하는 대로 두 사람의 사이의 감정은 정리 되었다.
서로의 실력을 인정한 둘을 보면서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내일 발레리아의 무기부터 맞추러 가자. 그리고 여러 가지 생필품도 사야겠지.’
일단 오늘은 이제 푹 쉬게 하는 게 좋겠다.
“아리시아, 발레리아에게 빈 방을 하나 내줘.”
“…….”
“아리시아?”
“예? 아, 예. 주인님.”
아리시아는 멍하니 있다가 황급하게 카일의 말에 대답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리시아는 황급하게 대꾸하고 발레리아를 데리고 갔다
“발레리아 씨.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리고 잠옷은 없죠? 일단 제 걸 빌려드릴게요.”
“아, 고맙군.”
“이쪽으로 오세요.”
아리시아와 발레리아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카일이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실제로 어때? 혹시 봐줬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대련의 범주 안에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감상은?”
“기본이 탄탄한 기사 그 자체였습니다. 방패술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갑옷을 입히면 그것을 이용한 육탄전에도 일가견이 있겠죠.”
“그렇군. 훌륭한 전력이 되겠어.”
“그렇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7층을 염두에 두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검은 바람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