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종속 마법을 넘겨받은 후 카일은 일단 폐기장을 벗어났다.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리시아가 이 장소에 오래 있는 것이 좋을 리가 없으니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다.
“아리시아. 얘 좀 씻겨.”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일단 집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를 씻기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상당히 당황했다.
“이봐. 지금 무슨… 으읏.”
“반항하지 마요. 괜히 종속 마법이 발동해서 아프잖아요?”
“너는… 윽…….”
그녀는 조금 반항하는 듯했지만 결국 아리시아의 손에 이끌려서 지하의 욕실로 내려갔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검은 바람이 말했다.
“주인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야.”
“원하시는 조건에 딱 맞는 인재이긴 하지만 너무 반항적인 게 아닌가 합니다.”
“어차피 종속 마법이 걸려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전투 노예의 경우 자발적으로 전투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제 실력이 안 나오는 법입니다.”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너하고 아리시아는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저희는 주인님에게 은혜를 느끼고 거기에 보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그녀도 그렇게 될지 모르지.”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 하신다면야……. 하지만 모쪼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은 바람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태어나기를 노예로 태어난 아리시아와 달리 검은 바람은 수십 년 전에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 그때의 검은 바람은 종속 마법에 반항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반항적인 노예로 구르고 난 후에야 간신히 체념했었다.
오늘 저 여자 노예를 보고 나니 어쩐지 과거의 그런 자신이 떠올랐다.
카일은 그런 검은 바람의 생각을 알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이 세 번째잖아? 나도 슬슬 요령이 생긴 것 같다.”
카일은 카일 나름대로 자신감이 넘쳤다.
잠시 후.
아리시아가 약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다 씻기고 옷도 갈아입혔어요.”
“그래. 수고했어.”
“예. 감사합니다.”
아리시아는 꽤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진이 빠진 모습을 보아하니 상대가 순순히 씻은 것 같지는 않았다.
“들어오세요.”
아리시아의 말에 방에 들어온 그녀는 놀랍도록 모습이 변해 있었다.
“꽤 변했군.”
페기장의 노예로 있을 때는 진흙으로 더럽혀지고 기름져 있어서 진한 갈색으로 봤는데 이제 보니 그녀의 진한 적갈색의 머리카락이었다.
비록 앙상해진 팔다리와 건조함이 지나쳐서 갈라진 피부 등이 흠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본바탕이 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리시아의 옷을 빌려 입은 그녀는 카일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대화를 좀 하지? 내 이름은 카일이다. 네 이름은?”
“발레리아. 발레리아 드 스콧…이다.”
종속 마법의 제약으로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억지로 반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정도는 편하게 해도 좋다.”
그러자 발레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편하게 말을 했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산 거지? 거기다 이렇게 씻기고 새 옷까지……. 설마 네놈, 죽어도 상관없으니 나를 안고 싶다는 거냐?”
그 말에 카일을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여자를 원했다면 널 살 이유가 없지. 지금 네 뒤에 너보다 100배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잖아?”
발레리아가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100배까지는…….”이라고 말하며 부끄러워하는 아리시아가 있었다.
솔직히 발레리아가 봐도 아리시아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는 다시 매섭게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날 구입한 이유가 뭐냐? 솔직하게 말해라.”
“솔직하게라. 그거 좋지. 좋은 말이야. 그럼 이렇게 할까?”
카일은 아리시아의 앞에 마주 앉아서 말했다
“지금부터 서로 질문을 하나씩 하지. 그리고 서로 솔직하게 대답하는 거야? 어때?”
“어차피 나는 종속 마법 때문에 네가 묻는 말에는 다 대답해야 하지 않나? 불공평한 거래군.”
“그럼 나만 일방적으로 물어볼까?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카일의 말에 발레리아는 우물쭈물 하다가 말했다.
“나를 구입해서 어디에 쓸 생각인가?”
“던전에 데리고 들어갈 거야. 우수한 기사였다고 하니 네가 힘을 회복한다면 쓸모가 있겠지?”
“힘을 회복? 네놈 무슨 헛소리를…….”
“내 차례야. 너는 원래 기사였다고 했지? 그런데 어째서 노예로 전락한 거지?”
카일의 질문에 발레리아는 우물쭈물 거리다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누명을 쓰셨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국왕 전하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직언을 올렸건만 반려당했다. 오히려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서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셨다. 그리고 가족인 나 역시 이렇게 노예로 전락했다.”
“크로노 왕국이라, 가본 적은 없지만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닌 모양이군.”
“…….”
“그런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말은 너희 아버지도 비슷한 인물이라는 뜻일까?”
그런 카일의 말에 발레리아는 발끈하면 외쳤다.
“아버님을 모독하지 마라! 그분은 단 한 번도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고 평생을 청렴하고 결백하게 사신 분이다.”
자신의 조국을 비난했을 때는 가만히 있던 그녀였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비난당하자 발끈하고 나섰다. 카일은 그녀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자신의 가족을 처형하고 스스로를 노예로 떨어트린 나라에 애국심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발레리아는 카일을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내 차례다. 나는 이미 오러홀도 파괴되었고 기사로서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나를 던전에 데리고 가서 어떻게 써먹을 생각이지?”
“네 몸을 고쳐줄 방법이 있다.”
“하아, 웃기는군.”
발레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카일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매독이 뭔지 모르나? 내 몸을 고쳐 보겠다고 전 주인이라는 작자가 신관한테 직접 보여도 봤지만 방도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고치지.”
“있다면 있는 줄 알아.”
어차피 고치고 나면 알게 될 일이다. 자세한 설명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다.
“내 차례다. 만약 내가 네 몸을 고쳐 준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고칠 수 없다는 말 못 들었나?”
“너야말로 못 들었나? 고칠 수 있다고 했잖아?”
“…….”
“대답이나 해라. 고쳐 준다면 어떻게 할 거지?”
발레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당신이 내 몸을 고쳐 준다면, 딱 하나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
“그게 뭐지?”
“복수.”
그 말을 하는 순간 발레리아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치솟았다.
“복수라 그건 누구를 향한 복수지? 네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귀족들? 아니면 너를 이 꼴로 만든 전 주인들?”
“전부다. 내가 다시 힘만 되찾을 수 있다면 그놈들 전부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 특히…….”
말을 하던 발레리아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그녀에게 카일에 말했다.
“특히 뭐지? 특별히 더 원한을 가지 놈들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 특히 기사의 자격도 없는 쓰레기들. 동료의 추락을 비웃고 조롱하던 그 배신자들을 다 죽여버릴 것이다.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어.”
“…….”
그렇게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어린 살기가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원한이 큰 것 같군.’
카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복수의 상대가 어지간하면 카일도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을 가진 상대는 국가의 상층부에 자리하고 있는 권력자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을 상대로 복수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네 복수를 도와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네 몸을 낫게 할 수는 있다.”
“훗, 헛소리하는군.”
발레리아는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카일을 비웃었다.
“네가 복수를 포기하고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네 몸을 치료해 주겠다.”
“충성이라……. 어차피 나는 너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데 굳이 그게 필요한가?”
“필요하지. 특히 너 같은 타입에게는 더욱더 말이야.”
“…….”
“하나 물어보지. 너는 아직도 기사인가?”
“나는… 나는…….”
발레리아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기사? 내가… 아직도 내가 기사라고 할 수 있나?’
발레리아는 스스로를 누구보다 긍지 높은 기사라고 생각했다.
여자의 몸으로 차별과 무시를 당하면서도 오직 실력만을 믿고 당당하게 기사로 서임을 받았을 때,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감격에 벅차올랐다. 드디어 존경하는 아버지와 같은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환희의 감정에 벅차올랐다.
그때의 그녀는 틀림없는 기사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아버지가 처형당하고 노예로 떨어진 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끔찍한 현실이었다.
그녀가 믿고 있던 정의와 기사도는 송두리째 무너졌고, 눈앞에 닥친 현실은 지독한 절망과 추악한 현실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올린 노력과 결실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지금의 그녀는 매독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 비참한 노예일 뿐이다.
그런 자신을 과연 기사라고 할 수 있을까?
“…….”
그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도저히 자신을 기사라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뺨을 타고 분함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저 부분이군.’
카일은 이 순간 깨달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사람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자포자기한 것처럼 궁지에 몰린다고 해도 사실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
발레리아에게 있어서 그것은 과거 자신이 피와 땀과 혼을 갈아 넣어서 쟁취했던 신분.
바로 기사였다.
카일은 고개 숙인 그녀에게 말했다
“약속하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언젠가 너를 다시 기사로 만들어 주겠다.”
“…….”
“복수는 도와줄 수 없지만 이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이다. 어떤가? 이 거래에 응할 수 있나?”
카일의 말에 발레리아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지나갔다.
간절함, 억울함, 갈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지나간 후 마침내는 허무함이 자리했다.
“그만하지? 어차피 나를 치료할 방법은 없어.”
“끝까지 안 믿는군.”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그만 희롱해라. 죽일 테면 죽이고, 써먹을 용도가 있다면 좋을 대로 해라. 어차피 나는 노예이니 따르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명령이다. 거래에 응할 건지 말 건지 둘 중에 하나로 대답해라.”
카일의 말에 발레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 네가 나를 다시 기사로 돌려준다면, 아니 내 몸을 치료해 주기만 한다면 나 발레리아 드 스콧의 몸과 마음과 인생과 영혼까지 모두 바쳐서 충성하겠다. 썩어가는 이 몸뚱어리를 치료할 수 있다면 말이다.”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들은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발레리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지금 그 말. 잊어버리지 마라.”
“무스… 아, 아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고통에 발레리아가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고통에 쓰러져서 절규하는 그녀를 보고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건 아프지.”
“정말 아프죠.”
이미 겪어본 이들만 알 수 있는 동질감이었다.
* * *
“아… 아아아…….”
발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금 검을 잡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자신이 잡고 있는 검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오러를 바라보며 감격에 겨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아…….”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감격의 하염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카일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 때도 그랬듯이 지금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 대강 이해가 간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던 절망 속에서 구원된 인물의 감동.
그것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카일은 그녀의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담담하게 기다렸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오열하다가 이내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의 몸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심각한 영양부족으로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랐던 몸은 어느새 완벽한 여기사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녀린 듯하지만 그 몸의 구석구석에는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는 몸. 지금 그녀의 몸은 그녀의 전성기, 아니 그 전성기를 뛰어넘는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170센티미터가 넘어 보이는 큰 키에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밸런스, 하얀 피부와 대조되기 타오르는 듯한 적갈색의 붉은 머릿결과 사파이어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
당당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과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카일에게 결연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발레리아 드 스콧, 새로운 주군에게 검을 바칩니다.”
날카롭게 벼려진 아름다운 검과 같은 그녀가 공손하게 검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