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역시 파티를 합치는 것에 관해서 긍정적이다.”
“좋군요. 그렇다면…….”
그때였다.
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제프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잠깐!”
“뭐지?”
카일이 제프를 바라보며 한 마디를 했다. 그러자 그 역시 카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듣자 듣자 하니까 너무 뻣뻣하게 나오는군.”
“…….”
“우리쪽 수준을 의심하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쪽 수준은 왜 말 안하는 거야?”
“우리 쪽의 수준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다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검은 바람이 끼어들어서 구해 줬다. 그 하나만으로도 카일 일행의 전력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은 입증되었다.
그런데 제프가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저기 뒤편에 있는 덩치의 실력은 알지. 개쩔더군. 그건 솔직히 인정해. 그리고 거기 예쁘장한 언니의 활솜씨도 제법이었고 말이야.”
“제프, 그만둬.”
“야 인마…….”
제스터와 챈들러가 제프를 말리려고 했지만 제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네 실력은 모르잖아?”
“나 말인가?”
“그래. 나이도 어린놈이 제스터 형님한테 반말이나 찍찍 하고 말이야. 어디서 돈 주고 산 전투 노예만 믿고 까불면서 그걸 자기 실력인 양 어깨에 힘주는… 커억!”
거침없이 말을 하던 제프는 검은 바람에게 멱살을 잡혀서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주인님을 향한 무례는 용서 못한다.”
“조… 까.”
숨이 막혀서 얼굴이 빨개진 상황에서도 제프는 손가락을 세우며 욕을 던졌다.
‘성질 있는 놈이군.’
정작 카일은 그런 제프의 모습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검은 바람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인님. 이 애송이를 혼내 줘도 되겠습니까?”
“잠깐,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대신 사과 하겠습니다.”
제스터는 황급하게 끼어들어서 만류했다.
그 모습에 카일도 검은 바람을 말렸다.
“놔 줘라.”
“예.”
카일의 명령에 검은 바람은 제프리를 내려놨다.
“쿨럭… 제길, 성질 하고는…….”
“제프리. 이 멍청아!”
“사과해. 이 또라이야.”
풀려난 제프리를 보고 제스터와 챈들러가 다그쳤다. 하지만 제프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딱 봐도 저 새끼 X밥인 거 다 티 나는데?”
카일의 능력은 자신을 강화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상화하는데 있다. 자기 자신이 쓸 수 있는 힘은 약간의 신체 강화 정도뿐이다 보니 제프의 입장에서는 카일이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제프는 카일을 어디 좋은 집 도련님이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강력한 전투 노예를 데리고 던전에서 활동하는 놈으로 보고 있었다.
만약 지금의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의 강함이 카일 덕분이라는 걸 안다면 제프도 저런 헛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카일은 굳이 오해를 풀 생각은 없었다.
‘그냥 때려 치자.’
그저 그런 생각이 들 뿐이다.
보아하니 저 도적은 자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렇다면 억지로 같은 편으로 지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서로 마음이 안 맞는 것 같군.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지.”
카일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카일 씨.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스터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숙여서 사과했다.
“형님.”
“형님, 그러지 마쇼. 저 X밥 새끼한테 왜 그래?”
“넌 닥쳐. 제프!”
제스터가 제프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다.
앞으로 함께 해봐야 불협화음만 날게 뻔한 이들과 던전에 함께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지.”
“카일 씨, 잠시만요. 제 얘기를 좀 들어 보십시오.”
뒤에서 제스터가 붙잡으려고 했지만 카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렇게 파티의 병합 얘기는 말끔하게 파토가 났다.
* * *
“결국 다시 여기를 오는군.”
카일은 다시 오기 싫었던 곳의 앞에 와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주인님.”
“맞아요. 그쪽에서 먼저 그렇게 나온걸요.”
지금 카일이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를 데리고 온 곳은 바로 폐기장이었다.
가능하면 아리시아는 데리고 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 스스로가 강하게 동행하기를 바랐다.
마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여기는 또 오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제스터라는 모험가들과 파티를 합치려고 한 이유의 이면에는 사실 이 폐기장이라는 곳을 또 이용하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
효율만 놓고 본다면 카일에게 있어서 폐기장의 노예들은 무척 유용한 노예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효율을 우선하다고 해도 이 폐기장이라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인 생지옥이었다.
가능하면 이런 곳은 더 이상 오고 싶지 않은 게 카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주인님. 여기 있는 이들을 구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주인님뿐입니다.”
“맞아요. 저도 만약 주인님이 아니셨다면…….”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가 그렇게 카일을 변호해 줬지만 카일은 자신이 하는 일이 그렇게 훌륭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은 나도 한통속… 아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카일은 마음을 굳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오! 일전에 오신 분이군요.”
폐기장의 주인은 카일을 알아보고 있었다.
사실 카일보다는 검은 바람이 더 인상에 남았을 지도 모른다. 척 봐도 강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투란족 노예는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폐기장의 주인은 카일의 뒤편에 있는 아리시아를 보더니 크게 감탄했다.
“오오오― 무척 아름다운 노예를 가지고 계시군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카일은 놈의 시선이 아리시아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불쾌해졌다.
“함부로 보지 마라.”
“아아… 이거 죄송합니다. 매일같이 추하고 망가진 것들만 보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 노예를 보니 그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폐기장의 주인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아리시아도 그가 말하는 ‘추하고 망가진 것’이었다.
카일은 아리시아가 불쾌할까 봐 그녀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녀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행이군.’
어쨌든 여기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카일은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노예를 구입하고 싶다. 과거에 어느 정도 전투력이 있었으면서도 범죄 경력이 없는 노예로.”
“어… 그거 참 까다로운 기준이군요. 둘 중에 하나만 충족하는 노예는 많은데 말이죠.”
“그래서 없나?”
“으으음…….”
폐기장의 주인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무언가를 생각해낸 듯 입을 열었다.
“저기, 범죄 경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인물은 안 됩니까?”
“…그게 뭐지?”
“옆 나라인 크로노 왕국 출신의 기사 한 명이 있습니다.”
“기사라고?”
“예. 한창 현역이었던 시절에는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던 기사라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폐기당했지만 말이죠.”
“그거 좋군. 그런데 죄인이 아니라 누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확실한 건 아닌데 그런 말이 있습니다. 지은 죄는 없는데 정적들에게 누명을 써서 몰락했다고 하더군요.”
“꼭 만나고 싶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카일이 가장 원하는 조건의 노예였다.
카일의 대답을 듣자, 폐기장의 주인은 잠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직 기사라는 노예를 데리고 왔다. 그 노예를 본 카일은 살짝 놀랐다.
“전직 기사라고 했지 않나?”
“예. 그랬죠. 오러홀이 파괴당하기 전에는 상당한 경지의 기사였다고 합니다.”
“여자라고는 못 들었는데?”
카일의 눈앞에 있는 노예는 여자였다.
전직 기사라고 해서 당연히 건장한 남자를 생각했는데 설마 여자 노예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제법 외모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걸?’
폐기장의 노예들이 모두 엉망이었다. 진짜 쓸모가 없어질 정도로 망가진 후에야 도달하는 곳이 폐기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카일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제법 멀쩡했다.
사지도 아직 붙어 있었고,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았다.
비록 초췌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심각한 이상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씻기고 잘 꾸며 놓으면 상당한 미인으로 보일 것 같은 외모였다.
그런 카일에게 폐기장의 주인이 말했다
“저기,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는데 저년을 침대에서 써먹으실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습니다.”
“왜지?”
“매독에 걸려서 죽기 직전이기 때문이죠. 원래 기사였다는 년이 매춘부로 얼마나 굴렀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건드리기도 뭐한 병이 몇 개나 걸려서… 뭐, 여자로서는 완전히 폐품입니다.”
“과연…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군.”
오러홀이 파괴당해서 기사로서 쓸모가 없고, 성병에 걸려서 여자로서도 가치가 없어진 상태로 병들어서 하루하루 죽어만 가는 노예.
겉으로 보기만 멀쩡하지 사실상 그녀는 오늘내일하는 처지인 것이다.
다만 그 와중에 카일의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폐기장의 노예들은 대부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눈은 아직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의지의 근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일은 그것만으로도 그녀를 구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 전에 몇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다.
“조금 전에 누명을 썼다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이지?”
카일의 말에 폐기장의 주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원래 이년은 백작가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인 스콧 백작이라는 사람이 시류를 잘못 읽었는지, 아니면 끈을 잘못 댔는지 모르겠지만 정적한테 찍혔다고 하더군요. 결국 그 멍청한 작자 덕분에 가족은 모두 노예… 어이쿠!”
콰창!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쓰레기가!”
폐기장의 주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철장 안에 있던 그녀가 말을 듣다가 갑자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철장에 막혀서 자신만 상처 입을 뿐이었다.
“크으읏…….”
주인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한 덕분에 종속 마법이 발동해서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하지만 종속 마법의 곹오 속에서도 그녀는 흉흉한 눈으로 폐기장의 주인을 노려봤다. 그 기세가 워낙 흉흉해서 폐기장의 주인이 주춤하며 물러났다.
‘대단한 기백인 걸?’
그 모습에 카일은 살짝 감탄했다.
그러나 폐기장의 주인은 단단히 화가 났다.
그는 씩씩거리며 일어나서 허리춤의 채찍을 꺼내 들었다.
“이 창녀가 어디서 감히!”
그는 철장을 열고 노예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리고 채찍은 높게 들어 올린 순간 카일이 폐기장의 주인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
“손님. 이건 아직 제 노예입니다.”
폐기장의 주인은 살랑거리는 태도를 버리고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노예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만큼 노예에게는 절대 얕보이면 안 된다는 강한 인식이 박혀 있는 남자였다. 그런 폐기장의 주인에게 카일이 5골드를 던져 주며 말했다
“이래도?”
그 돈에 폐기장의 주인의 안색에서 분노가 사르륵 녹아 없어졌다.
“예.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죠. 종속 마법을 바로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카일은 일단 그녀를 구입하고 봤다.
자세한 사정을 알기도 전에 성급하게 구매한 것 같았지만 방금 전에 그녀가 보여준 근성과 악이 마음에 들었다.
‘사정은 본인에게 직접 듣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