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다음 날.
카일은 두 사람을 모두 데리고 행크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카일 씨. 오랜만에 오셨군요.”
“예. 요즘 좀 뜸했죠.”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요?”
“장비를 좀 구입하고 싶은데요. 좀 볼 수 있을 까요?”
“예. 천천히 보시고 불러 주십시오.”
확실히 1년 정도 꾸준하게 얼굴을 비추고 있으니 대우가 꽤 좋아졌다.
예전에 카일이 가지고 온 미스릴 함유 도끼가 생각보다 더 대박이었다는 말도 들었다. 경매에 붙여서 낙찰받은 가격이 400골드가 넘었다고 했다. 카일이 150골드에 팔았으니 행크의 대장간 입장에서는 굉장한 이익을 올린 것이다.
‘뭐, 내가 좀 호구 된 감은 있지만 이제 와서 얼굴 붉혀 봐야 손해일 뿐이지.’
이왕 연이 이어진 것.
행크의 대장간과는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카일의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카일은 우선 갑옷이 있는 곳을 둘러봤다.
‘가죽 갑옷이 가볍기는 하지만 7층부터는 방어력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게 좋을지도 몰라.’
갑옷 중에서 가장 방어력이 높은 것은 풀 플레이트 메일이다.
철판으로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는 갑옷은 기사들이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서 돌격할 때 입는 것이다.
단, 플레이트 메일은 방어력이 강력한 대신 그 무게가 너무 무겁다. 그렇기에 장기간에 걸쳐서 걷고 움직여야 하는 탐색가에게는 그렇게 인기 있는 갑옷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험가들은 아무래도 가죽 갑옷을 가장 선호했다. 가죽 갑옷이라고 해도 희귀한 몬스터의 가죽을 가공한 갑옷은 판금 갑옷보다 오히려 더 방어력이 좋았다. 그만큼 비싸기도 하지만 말이다.
카일은 가죽 갑옷 중에서도 트롤의 가죽으로 만든 물건을 보고 멈췄다.
“트롤의 가죽이라. 이건 좀 탐나는군.”
지금 카일이 사용하고 있는 방패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트롤의 가죽이다.
철판과 철판 사이에 탄석이 강한 트롤의 가죽을 끼워서 방어력을 높이고 충격을 상쇄한 것이다. 가공을 마친 트롤의 가죽은 마치 고경도의 고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방어구로서는 굉장히 탁월한 소재다. 단, 그만큼 가격이 비싼 게 문제긴 했다.
트롤 자체가 고급 소재이고 이것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특수한 약품도 연금술로 제작한 비싼 물건이라고 알고 있다.
즉, 여러 가지 분야의 기술과 인력이 집결 되어서 만들어지는 최고급품이니 만큼 비싼 것은 당연했다.
“흠, 그래도 나쁘지 않아.”
카일은 진녹색의 가죽 갑옷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점원이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말했다.
“안목이 좋으시군요. 최근에 좋은 트롤 가죽이 생겨서 만들어낸 신품입니다.”
“신품이라면 아직 길이 덜 들었다는 거군요.”
“하하하. 길이야 들이면 되는 거죠. 그보다 이걸 한 번 보십시오.”
점원은 나이프를 가져와서 가죽 갑옷의 표면에 대고 힘차게 긁었다.
촤아아악!
그러자 신품 트롤의 가죽에 칼자국이 길게 나버렸다.
“보시다 시피 워낙 질긴 가죽이라서 이렇게 칼자국이 외피를 뚫지 못하고 겉만 긁었습니다.”
“그래도 신품에 칼자국을 내도되나요?”
“물론입니다. 이걸 보시죠..”
그리고 점원은 카일이 보는 앞에서 무언가 어떤 약병을 하나 가지고 와서 천에 적시더니 칼자국이 난 부분을 문질러 닦았다.
“오…….”
이번에는 카일도 꽤 놀랐다.
선명하게 나있던 칼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보시다 시피 트롤의 가죽은 재생 세포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렇게 특수한 시약으로 관리해 주면 내구성을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흠, 다 해서 얼마죠?”
“가죽 갑옷이 30골드, 이 시약은 한 병에 1골드입니다.”
“너무 비싸군요.”
“명품을 싸구려로 팔수는 없는 법이죠.”
카일이 이번에 준비한 예산은 60골드였다.
이것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의 장비까지 모두 바꾸려고 했는데 자신의 갑옷 하나에 절반이 넘는 금액을 사용하기는 좀 그랬다.
“일단, 다른 물건도 좀 보도록 하죠.”
“예.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카일은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물건을 둘러봤지만 성능으로는 처음에 봤던 트롤의 가죽 갑옷을 넘어서는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일단 둘이 쓸 장비부터 둘러보자.’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뒤뜰의 연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양한 무기를 즉석에서 시험해 볼 수 있게 준비된 연습장에는 아리시아가 몇 가지 활을 가져와서 사용하고 있었다.
카일은 그런 아리시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어때? 아리시아.”
“어, 주인님 오셨군요.”
“그래. 마음에 드는 것은 있어?”
“그게 죄송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전부 별로인가?”
그 말에 아리시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반대에요. 점원분이 추천해 주시는 것을 몇 가지를 사용해 봤는데…….”
아리시아는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뭘 집어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는 성능이 훨씬 좋아요.”
“그래? 그럼 좋은 거잖아?”
“다 좋은 물건이다 보니 뭘 선택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어요.”
“아…….”
차라리 좋고 나쁘고의 차이가 선명하면 쉽게 고를 터인데 대부분의 물건이 썩 나쁘지 않다 보니 오히려 선택 장애에 빠진 아리시아였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여러 가지 활들을 보고 고민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카일도 활에 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이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던전안에서 여성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추천품이 있을까요?”
카일은 한쪽에 서 있는 행크의 대장간 점원에게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안목에 자신이 없을 때는 전문가의 추천을 받는 게 좋다.
점원은 카일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있는 활들 대부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건 이 녀석입니다.”
그가 내민 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은색의 활이었다.
“특수한 합금으로 만든 철제 활입니다. 가벼우면서도 탄력이 강하고, 무엇보다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접근전에서 한두 번 정도는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과연, 좀 볼까요?”
카일은 활을 들어서 무게를 가늠해 봤다.
목궁보다는 더 무거웠지만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운 무게였다.
‘단검 정도의 무게군.’
카일은 그걸 아리시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써봤어?”
“예. 이전에 사용하던 목궁보다는 훨씬 위력적이었어요. 10미터 정도의 거리라면 화살이 거의 일직선으로 날아가던걸요.”
“그래? 흠, 이건 얼마죠?”
“15골드입니다.”
“좋군요. 사도록 하죠.”
“예. 감사합니다.”
카일은 아리시아 대신에 자신이 바로 결정해 버렸다.
“주인님. 15골드는 너무 비싸요. 다른 활은 10골드 안으로 떨어졌는데…….”
“괜찮아. 비싼 만큼 효과만 확실하다면 아까울 것은 없어.”
“그래도…….”
망설이는 아리시아에게 카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만큼 앞으로 더 활약하면 되잖아? 기대하고 있을게.”
“예. 주인님.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카일은 아리시아의 장비를 바로 결정짓고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 바람이 안 보이는군. 어디 있지?’
카일은 주변에 있는 점원에게 말했다.
“제 노예가 어디 있는지 봤습니까?”
“그 투란족 출신의 노예 말이군요. 작업장으로 가서 붉은 바위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붉은 바위는 이전에 검은 바람에게 칼을 만들어준 투란족 출신의 대장장이다.
그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검은 바람이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건 무리요.”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시오. 어떻게 좋은 수가 없겠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란 말이오?”
“정말? 어떻게 해도?”
“안 돼.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카일이 작업장으로 찾아가자 거기에는 검은 바람이 붉은 바위를 상대로 무언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궁금한 카일이 다가가서 말했다.
“검은 바람.”
“예. 주인님. 오셨습니까?”
“그래. 무슨 일이냐?”
“사실은 갑옷에 관해서 주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런 건 불가능 하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지 뭡니까?.”
“주문이 주문 같아야 들어주지.”
화를 내는 붉은 바위는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뭐를 주문을 했길래 이래?”
“아니 나리도 들어 보십시오. 이 친구가 글쎄…….”
붉은 바위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카일에게 호소했다.
“사람이 갑자기 두 배로 커져도 찢어지지 않고 늘어나는 갑옷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한 번에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검은 바람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은 바람. 너…….”
“현실적으로 필요한 장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은 바람의 말에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실수군. 거대화 능력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검은 바람은 자신의 거대화 능력을 염두에 두고 그런 무리한 주문을 한 모양이지만 애당초 그럴 필요가 없다.
거대화 능력은 신체를 거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한 물질의 질량 자체를 증폭시키는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생의 능력자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몸에 착용하고 있는 장비등도 맞춰서 거대화 되었다. 안 그러면 거대한 빌딩만큼 거대화된 능력자들은 그때마다 나체쇼를 하면서 움직여야했을 것이다.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검은 바람. 갑옷도 무기도 평범한 사이즈면 충분하다.”
“예? 주인님. 하지만 그래서는…….”
“걱정하지 마라. 다 수가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의심을 거두고 본격적으로 장비를 고르기 시작했다.
억지 부릴 이유가 사라진 검은 바람은 평범한 장비를 골랐다.
안에 받쳐 입는 체인 메일과 그 위에 입는 불곰의 가죽 갑옷이었다.
“괜찮겠어? 좀 더 좋은 장비를 구입해도 되는데?”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
아리시아의 철궁이 15골드, 그리고 검은 바람의 체인 메일이 5골드, 불곰 가죽 갑옷이 3골드.
다 해서 23골드였다.
‘그렇다면… 가능하겠는데?’
당초 계획했던 예산은 60골드였다.
카일은 남은 돈을 가지고 트롤의 가죽 갑옷을 구입했다.
자신만 너무 비싼 장비를 구입하는 것 같아서 조금 그랬지만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는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주인님의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맞아요. 여기서 정작 주인님에게 쓰는 돈을 아끼는 건 말도 안 돼요.”
그렇게 해서 카일은 트롤의 가죽 갑옷을 손에 넣었다. 30골드짜리 명품 갑옷에 관리에 필요한 시약까지 한 병 구입해서 총 31골드의 지출이었다.
‘다 해서 54골드. 당초 계획보다는 좀 아슬아슬하게 세이브했는걸.’
이 정도면 상당히 합리적인 쇼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