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아리시아가 초능력을 각성한 다음 날.
“축하한다. 아리시아.”
“고마워요. 오라버니.”
아리시아가 초능력을 각성했다는 사실에 검은 바람이 웃으면서 축하해 줬다.
그 축하에 아리시아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아직 어떤 능력인지도 모른데요.”
“…….”
“어쩌면, 쓸모없는 능력인지도 몰라요…….”
풀이 죽어 있는 아리시아에게 검은 바람이 말했다.
“능력이 부족하면 그만큼 노력하면 된다. 나 역시 주인님이 주신 능력을 전투에서 사용한 적은 한 번 밖에 없었다.”
“그거야 오라버니는 강하시니까 그런 거잖아요?”
검은 바람은 카일이 각성시켜준 초능력이 없다고 해도 충분히 강했다.
경지로 구분지으면 익스퍼트 중상급 정도는 될 것이다. 그렇게 강한 본연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검은 바람은 초능력에 그렇게 의지하지 않았다.
다만, 카일의 명령에 따라서 매일 밤 초능력 코어를 가속시키는 일과는 거르지 않았다. 다른 힘과 마찬가지로 초능력도 단련에 따라서 키워 갈 수 있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건 검은 바람의 사정이고 아리시아는 정말 초능력이 각성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이제야 주인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직 카일을 위해서다.
그게 아리시아의 전부였다.
강한 초능력이 생기면 그만큼 카일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계속 품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의 갸륵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주인님이 각성시켜준 능력이다. 도움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예. 오라버니.”
검은 머리가 아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했다.
카일과의 관계와는 달랐지만 검은 바람 역시 아리시아를 친여동생처럼 아꼈기에 더욱 따뜻한 위로였다.
* * *
던전의 안.
“좋아. 오늘은 아리시아를 메인으로 활동한다.”
“예. 주인님.”
“아리시아 너는 평소처럼 싸워 봐. 그러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바로 말하고.”
“예. 주인님.”
“검은 바람. 너는 보조다. 아리시아가 위험해지기 전에는 나서지 마.”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역할을 정한 후 카일의 파티는 던전의 지하 1층을 돌아다녔다.
사실, 카일의 파티에게 던전 1층은 그냥 산책길이나 다름없었다.
1층에는 인간 사냥꾼들도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냥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검은 바람은 물론이고 카일도 1층 정도는 맨손으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래서일까?
“키이이익!”
“케에에엑!”
아리시아 역시 1층에서는 전혀 고전을 하지 않았다. 그냥 적을 발견하면 화살을 쏘고 그걸로 상황은 끝이었다 1층의 굼뜬 고블린들은 아리시아의 화살을 피하지도 못하고 쏘는 족족 급소에 맞았다.
“아리시아? 뭔가 느낌이 와?”
“아니요. 그게 너무 쉬워서…….”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 무슨 차이는 없었어?”
“평소보다 조준하기가 조금 쉬웠던 것 같기는… 아, 그런데 별로 큰 차이는 아니에요. 어쩌면 제 기분 탓일지도 몰라요.”
별 느낌은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1층의 고블린은 너무 쉬운가? 2층이나 3층으로 내려가 볼까?”
카일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검은 바람이 말했다.
“아리시아, 근접 전투로 고블린을 상대해 보겠니?”
“근접 전투로요?”
“그래. 어쩌면 거기서 뭔가 감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너라면 근접전으로도 고블린 한두 마리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예. 알겠어요. 오라버니.”
아리시아는 활을 등으로 돌려 매고 허벅지 쪽에 있는 단검을 꺼내서 들었다.
“괜찮을까?”
“괜찮을 겁니다. 혹시나 위험할 것 같으면 제가 바로 나서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뭐.”
그렇게 일행은 다시 1층을 돌아다니면서 고블린을 찾았다.
“아! 찾았다.”
아리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마리의 고블린을 발견했다. 놈들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괴성을 지르며 뛰어왔다.
“키르르르 키르!”
“키에에에에!”
평소에는 적이 오면 아리시아는 재빨리 검은 바람이나 카일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앞으로 나섰다.
‘색다른 풍경이군.’
던전에서 보여 주는 아리시아의 등을 보고 카일은 문득 이런 건 처음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혹시나 그녀에게 한마디했다.
“긴장하지 마.”
“예. 주인님.”
아리시아의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지척에 도달한 고블린들이 흉폭하게 입을 쩍 벌리고 도약했다.
그리고 아리시아는…….
스걱.
아주 가벼운 일격이었다.
뛰어오르는 고블린의 목을 정확하게 노리고 그어진 공격은 그대로 고블린의 목을 반 정도 갈라버렸다.
그리고 뒤이어서 공격하려는 고블린은 뛰기도 전에 아리시아의 단검이 놈의 목을 관통했다.
푸욱!
“키히익!”
그 고블린은 그대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쓰러져 버렸다. 카일이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손쉽게 적을 쓰러트린 것이다.
“괜찮구나. 평소보다 훨신 더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저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혹시 제 능력이 이런 걸까요? 제 몸을 좀 더 민첩하게 해주는?”
“흠,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지만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가 평소보다 빨라진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렇다면 아주 좋겠지. 능력은 갈고 닦으면 더 강해진다고 했으니 어쩌면 너는 나보다 더 강해질 지도 모른다.”
“설마요…….”
아리시아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만약 그런 것이라면 카일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흠…….”
카일은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의 대화를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건 어쩌면… 정말인가? 그거 굉장히 희귀한 능력인데.’
카일은 아리시아의 능력으로 딱 하나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대박을 넘어 초대박이었다.
“아리시아.”
“예. 주인님.”
카일은 주머니에서 최하급 마석 두 개를 꺼냈다. 그중에 하나를 아리시아에게 건넸다.
“나하고 같은 높이로 들어 봐. 그리고 내가 신호하면 동시에 떨어트리는 거야. 알겠지?”
“예. 주인님.”
“좋아. 하나, 둘, 셋!”
카일과 아리시아가 동시에 마석을 떨어트렸다.
투, 툭.
약간이긴 하지만 아리시아가 떨어트린 마석이 먼저 지면에 닿았다.
“과연, 그런 거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인님.”
“아리시아의 능력은 속도를 올려 주는 게 아니다.”
카일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예? 아니라고요.”
“그래. 속도를 올려 주는 능력도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는 몸에 부담이 가지. 이건 그것보다 더 상위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능력입니까?”
“이건 시간을 가속시키는 능력이다.”
“…….”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입을 쩍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 시간이라니? 그렇게 터무니없는…….”
“틀림없다. 지금 아리시아는 몸이 빨라진 게 아니야. 그녀의 시간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가는 거다. 그러니 몸을 떠난 마석이나 화살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서 빠르게 움직이는 거지.”
시간의 가속.
이것은 카일의 전생에서도 굉장히 희귀한 능력이었다. 세계 정부에 소속된 초능력자들 중에서도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이라는 개념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과학자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연구의 대상이었다.
‘설마 아리시아가 이런 능력을 각성할 줄이야.’
“주인님. 그럼… 제 능력은 주인님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요?”
아리시아의 말에 카일은 허무한 표정으로 말했다.
“되고 안 되고 정도가 아니지. 이건 계속 갈고 닦으면 어디까지 성장할지 모를 능력…….”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리시아가 달려와서 카일의 품안에 안겼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주인님.”
자신의 능력이 카일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쁘고, 그 능력을 내려준 것이 카일이라는 것이 또 기쁜 아리시아였다.
카일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아리시아의 등을 쓸어 주며 말했다.
“수고했어. 이제 돌아가자.”
“예. 주인님.”
그렇게 카일의 파티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 * *
집으로 돌아간 카일과 그 일행은 씻고 식사를 하기 위해서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다른 집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카일의 집에서는 노예인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도 자연스럽게 카일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이 시간은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회의의 시간이기도 했다.
“주인님. 아리시아를 각성시켰다면 이제 다음 노예를 구입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지금 우리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이 얼마지?”
“순수한 현금만이라면 80골드 정도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여전히 전투 노예는 무리군. 다시 거기로 가야 하나?”
카일은 폐기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혹시 그것이 아리시아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슬쩍 살펴본 아리시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카일이었다.
“주인님. 새로운 노예를 들이신다면 전력이 더 강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사용하는 장비를 더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장비를?”
“예. 주인님의 갑옷은 제가 보기에 슬슬 한계입니다.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라면 아애 바꾸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긴 하지.”
카일이 쓰고 있는 가죽 갑옷은 아주 옛날에 구입했던 싸구려였다.
몇 번의 전투에 걸쳐서 구멍이 나고 연결 부위가 뜯어졌지만 그때마다 수리해서 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겉은 몰라도 뒤집어서 속을 보면 덧붙인 가죽이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장비에 돈을 아끼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주인님이 7층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장비를 구입하시는 것은 필수입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그리고 너희들은 어때?”
“아리시아는 활을 바꿔 줘야 할 듯합니다. 이제 아리시아의 궁술도 실력이 제법 올랐으니, 초보자용의 목궁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성능의 활을 준다면 전투력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아리시아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검은 바람이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만뒀다.
활을 바꾸면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활이라… 그쪽은 잘 모르니까 가게에 가서 물어 보자고.”
“예. 주인님.”
“그리고 검은 바람. 너는 어때?”
“저 말입니까?”
“그래. 7층에 갔을 때를 대비해서 장비가 필요하지 않아?”
검은 바람의 장비는 예전에 카일이 사준 투란의 태도 하나뿐이었다.
붉은 바위라는 투란족 출신의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특제품으로 같은 태도지만 카일의 것보다 1.5배는 더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그냥 평상복이었다.
갑옷조차 입지 않고 그냥 싸우는 검은 바람에게 몇 번이나 갑옷이라도 주려고 해봤지만 검은 바람은 필요 없다고 했다.
“7층부터는 트롤이 나온다. 그건 대형종 몬스터야.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검은 바람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7층에서 주인님과 아리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저도 조금 충실하게 무장을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당장 내일 행크의 대장간으로 가자. 인력 충원은 그 다음의 일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일행은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날 저녁.
카일은 오늘도 아리시아를 안았다.
“아… 아아… 주인님……..”
카일의 품안에서 쾌락에 젖어 몸을 비트는 아리시아는 이제 열정적으로 카일의 욕구에 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차례 열풍이 불고 난 후.
“후우우우…….”
카일은 아리시아의 몸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오늘도 여기서 자고 가.”
“예. 주인님.”
아리시아는 카일의 말에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품안에 파고 들어갔다.
사실 둘은 거의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한 밤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아리시아를 안지 않는 날도 카일은 아리시아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 이러다 보니 따로 방을 마련해 준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가 싶을 정도였다.
그때 아리시아가 카일의 품안에서 말했다
“주인님. 한마디해도 좋을까요?”
“말해 봐.”
“저 때문에 망설이지 말아 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카일은 비스듬하게 몸을 일으켜서 아리시아에게 말의 의미를 물었다.
아리시아는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주인님은 너무나 상냥하고 자애로운 분이세요. 하찮은 노예일 뿐인 저를 항상 신경 써주시죠. 저로서는 과분할 뿐이에요.”
“딱히 그런 적은 없어. 그냥 이렇게 대하는 게 내가 편한 것뿐이지.”
그런 카일의 말에 아리시아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폐기장이라는 말을 피하셨죠. 제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조심하지 않으셨나요?”
“…….”
카일은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망설였다.
‘부정할까? 하지만…….’
아리시아의 부드러운 눈빛은 이미 확신에 차있는 눈빛이었다.
아리시아는 카일의 뺨을 양손으로 잡고 진하게 키스를 하더니 말했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괜찮아?”
“예. 저는 이렇게 좋은 주인님이 아끼고 귀여워해 주셔서 지금 너무나 행복한 걸요?”
아리시아는 카일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더 이상 제 과거는 저를 불행하게 하지 못해요. 그 모든 과정이 최종적으로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그 세월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만큼 주인님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아리시아…….”
“주인님. 그러니 부디 저 때문에 당신의 앞길에 필요한 선택을 망설이지 말아 주세요.”
“알았어. 아리시아. 그리고… 고마워.”
카일은 아리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카일의 품안에 안긴 아리시아는 눈을 감고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님. 사랑해요.’
오직 생각만 할 뿐.
차마 입으로 낼 수 없는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