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다음 날.
카일의 파티는 다시 일정대로 움직였다.
카일과 아리시아는 훈련에 매진하고 이틀에 한 번씩 던전의 저층에 들어가서 실전 훈련을 했다.
카일은 아리시아와 함께 보내는 밤에 빠져서 한 동안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그것은 검은 바람의 한마디에 해방되었다.
“무의미한 절제는 오히려 잡념을 만들어 냅니다. 평범하게 발산하는 편이 좋습니다.”
검은 바람의 조언에 따라 카일은 며칠에 한 번씩 아리시아를 찾았다.
처음에는 사흘에 한 번.
조금 지나니 이틀에 한 번.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아애 검은 바람이 혼자 독방을 쓰고 카일은 아리시아와 한 방을 썼다.
이런 자신의 변화에 카일은 스스로 생각해도 쑥스러웠다.
하지만 확실히 검은 바람의 말대로 적절한 발산을 통해서 갈증을 해소해서일까? 카일은 다시 훈련에 매진 할 수 있었다.
카일은 투란의 태도를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던전에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오크 일고여덟 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검은 바람의 보증이 붙었다.
아리시아 역시 더욱더 발전했다.
활의 숙련도가 올라가며 연사력과 명중률이 상승해서 이제 저층에서는 고블린들 따위는 그녀에게 접근도 못했다.
거기다 검은 바람의 가르침으로 작은 단검을 이용하는 검술도 수련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위해서 단검술 정도는 궁수에게도 필수였다.
그렇게 일행의 전력이 대폭 올라갔고, 사실상 던전 탐색을 멈춘 지도 석 달이 다 되어 갈 무렵.
“좋아. 6층으로 가보자.”
카일이 결정을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주인님.”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카일의 결정에 동의했다.
이제 다시 본격적인 던전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 * *
6층 탐사를 위해서 카일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사실상 던전의 저층이라고 해서 난이도의 차이가 크지 않다.
솔직히 거기서는 몬스터보다 같은 모험자가 더 조심해야 할 상대다.
다만, 5층부터는 다르다.
한 층씩 내려갈 때마다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몬스터는 더 강력해지고 길드에서 판매하는 지도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던전은 밑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험해지고 위험해지기 때문에 지도를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1층부터 5층까지는 대부분의 지역이 상세하게 밝혀져 있지만 6층, 7층은 일부의 지역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밑의 8층부터는 지도가 아애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8층의 지도는 판매를 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만큼 정보가 통제되고 있다.
이번에 카일이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6층 또한 8층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 미개척 지역이다.
카일은 이 6층에 한 번 내려간 이상 제대로 탐색을 하고 올 생각이었다.
길드에서 파는 지역이 다 밝혀지지 않은 곳을 중점적으로 돌면서 정보를 취득하고 몬스터를 사냥할 것이다.
미개척 지역에 몬스터의 군락이나 수원 같은 것을 발견해서 길드에 보고하면 소소하지만 상금을 주기도 한다. 사실 마석만 캐는 것보다는 그렇게 던전의 어둠을 조금씩 걷어가는 활동이야 말로 진짜 탐색 활동이었다.
“일단 내려가면 열흘은 있을 예정이야. 식량을 충분히 준비하고 여분의 장비와 도구도 확실하게 체크해 둬.”
“예. 주인님.”
“아리시아, 너도 검은 바람이 하는 일을 도와주고 그러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배워 둬.”
“예. 주인님.”
“좋아. 출발은 이틀 후로 한다.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 두고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카일은 둘에게 지시를 내린 후 자신은 여관의 뒤뜰로 향했다.
사실 이런 준비는 같이 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카일은 투란의 태도를 뽑아서 날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있던 카일은 깊은 숨과 함께 작게 속삭였다..
“후우우……. 안 되는군. 될 듯 말 듯한데 말이야.”
지금 카일은 초능력자가 아니라 검사로서의 벽을 하나 넘으려고 하고 있다.
오러 유저 초급의 벽을 말이다.
검을 본격적으로 수련하고 반년 남짓 만에 오러 유저 초급의 벽에 도전한다고 하면 천재까지는 아니라도 수재 소리는 들을 만했다.
“후우우……. 어려워, 어려워.”
넘을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 * *
이틀 후.
카일의 파티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던전으로 향했다. 이번에 들어가면 최대 열흘 정도는 던전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짐이 더 많았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던전에 들어가려고 하는 그때 던전의 입구를 관리하는 길드 직원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 돼.”
“예? 어어… 왜입니까?”
“스톰 클랜에서 던전에 진입하기 위해서 오전 9시부터 오전 12시까지 던전 입구를 전세 냈다.”
“…예?”
“대형 클랜이 던전에 들어갈 때는 일반 모험가는 들어갈 수 없어. 이건 규칙이다.”
“알겠습니다.”
단단히 각오했던 카일로서는 김빠지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규칙이라는데 뭐.’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오전 12시까지 전세를 냈다고 하니까… 일단 좀 더 기다려 보자. 그 후에 들어가면 되지.”
“예. 알겠습니다”
카일은 파티원을 데리고 던전 입구의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카페 2층에 자리를 잡고 던전 쪽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클랜이라……. 이번 기회에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한 번 볼까?’
클랜.
모험가들 다수가 모여서 만들어낸 모임으로 용병단과 비슷한 개념이다.
클랜장이 있고, 그 클랜장의 밑에 간부들이 있고, 그 밑에 일반 클랜원이 있는 그런 형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숫자다.
보통 모험가는 두 명에서 열 명 전후까지는 파티라고 부른다. 하지만 클랜이라고 이름을 붙이려면 길드 기준으로 최소한 백 명이 넘어야 한다.
백 명이 넘는 인원을 모집하고, 그 클랜의 장이 모험가 길드가 보기에 충분한 실적을 가지고 있어야 길드에서는 클랜으로 등록을 해줬다.
하지만 백 명도 많은 것은 아니다.
백 명이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클랜을 등록하기 위한 최소한의 숫자일 뿐이고, 보통 클랜의 인원은 이백에서 삼백 명 정도 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대형 클랜이라고 하면 그 인원은 수천 명을 넘는다.
물론 그 많은 인원이 한 번에 다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깊숙한 곳에 본격적인 공략을 위해서 던전에 투입될 때는 천명 단위의 모험가들이 하나의 깃발을 걸고 내려가기도 한다.
그만큼 많은 인원이 출입을 하다 보니 던전의 입구 상황이 워낙 복잡한 게 아니다.
그래서 대형 클랜의 경우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길드에 미리 통보를 하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던전 입구를 이용하겠다고 허락을 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모험가들과 섞여서 내려가기에는 던전의 입구가 너무 좁고 대형 클랜의 인원은 너무 많았다.
잠시 후.
“1번대. 여기 모여!”
“똑바로 줄 서! 똑바로!”
“물자 체크 한다. 물자 보급 담당 어디 있어?”
던전의 입구에는 같은 표식을 가지고 있는 모험가들이 하나 둘 씩 모이더니 이내 던전 입구 앞의 광장이 터질 것처럼 바글거렸다.
“저게 다 한 클랜이라는 건가?”
카일은 2층 창문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천명은 가뿐하게 넘어 보였다. 저만한 인원수를 가지고 던전에 들어간다고 하니 과연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클랜의 모험가들은 인원과 물자를 체크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정렬을 하기 시작했다.
“클랜장님 오신다! 모두 정렬!”
“똑바로 서! 4번대 제대로 안 서!”
“각 부대 대장들! 밑에 확실히 챙겨라. 클랜장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다 곡소리 날 줄 알아?”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는 이들이 아마 간부일 테고,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게 일반 클랜원일 것이다.
그들은 철저한 통제에 따라서 움직였고 중간에 항명을 한다거나 말대답을 하는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군대와 다름없군.’
거친 모험가들을 수천 명씩 뭉쳐 놓고 관리하고자 한다면 철과 같은 규율이 필수일 것이다.
그렇게 클랜원들이 모두 정렬하자 한 명의 남자가 그들 앞으로 나타났다.
급조된 단상 위로 올라간 그 남자가 바로 눈앞에 칼각으로 정렬하고 있는 모험가들의 톱인 클랜장이었다.
검은색의 갑옷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대검을 등에 차고 있는 그는 멀리서 바라만 봐도 강함이 물씬 풍겼다.
‘분위기가 있군.’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남자의 강함을 인정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어때? 너하고 비교하면?”
그런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1분 정도일 겁니다.”
“1분?”
“제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그 정도는 버티겠지요.”
“괴물이네.”
카일은 검은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카일이 안심하고 모험가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든든한 검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검은 바람이 자기 입으로 1분도 버티기 어렵다고 말하자 새삼 깨달았다.
“위에는 위가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까마득한 정점.
저것을 목표로 삼아서 손에 닿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단상 위에 올라간 클랜장은 아래에 있는 클랜 모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오늘부터 석 달에 걸쳐서 던전을 공략한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15층을 돌파할 것이다.”
“옛!”
“옛!”
절도 있는 대답이 동시에 튀어 나왔다.
“정예 요원들이 대거 투입된 만큼 반드시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두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따라와 주기 바란다. 알겠나?”
“옛!”
“옛!”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대답에는 군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좋다. 출발하라.”
클랜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중간 간부들이 나서서 차례차례 인원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1번대부터 차례대로 들어간다.”
“함부로 열을 이탈하지 마라. 지금부터 지시에 따르지 않는 자는 바로바로 처벌하겠다.”
“거기, 똑바로 안 서?”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던전에 진입했다.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원수가 한참 걸렸다.
단순히 사람만 많은 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동안 사용할 물자까지 함께 가지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던전 입구를 전세 낼 이유가 있었군.”
“예.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지만 저 모습을 보니 길드의 조치가 타당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굉장한 결속력이긴 해. 저래서는 모험가가 아니라 용병단이나 군대 같은걸?”
“대형 클랜의 경우 모험가 활동과 용병단을 병행하기도 합니다.”
“그래?”
“예. 어차피 하는 일은 대부분 비슷하니까요.”
“하긴, 똑같이 힘쓰는 업종이긴 하지.”
카일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스톰 클랜의 행동에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체계를 구성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상세하게 관찰했다.
마치 자신의 먼 미래를 미리 공부해 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몇 시간 후.
스톰 클랜의 인원이 다 들어가고 던전의 입구가 개방되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어.”
그러나 카일은 계획을 수정해서 오늘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오늘 던전에 들어가 봐야 정체되서 이동에 속도가 안 날 거야. 포기하자.”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주인님.”
스톰 클랜이 들어가고 나서 일반 모험가들이 때지어서 던전의 입구에 몰렸다.
던전 안에서 서로 간격을 두고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건 틀림없이 정체를 일으킬 것이다.
“내일 다시 오자.”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카일의 파티는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서 던전의 입구가 한산해지자 카일도 다시 던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자, 들어가자 6층으로.”
“예. 주인님.”
대형 클랜만큼은 아니지만 카일의 6층 도전도 그들에게는 고무적인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