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기본적으로 아리시아의 머릿속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건 카일이었다.
지독한 절망속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카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하는 일념만으로 생전 잡아본 적도 없는 활을 잡고 손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한 것이다.
검은 바람 역시 그런 아리시아의 마음을 알았기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너에게 부족한 것은 내가 모두 가르쳐 주마.”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하지만…….”
“하지만, 뭐지?”
아리시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주인님의 발목만 잡고 있는 걸 보면 저는 역시 쓸모가 없네요.”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아리시아를 보고 검은 바람은 생각했다.
‘마음의 빚이 너무 무겁다는 건가?’
카일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나 무거워서 아리시아는 지금 당장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다.
실제로 카일이 본격적인 활동을 쉬고 있는 시간이 한 달을 넘어가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정말로 주인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있기는 있다.”
“그게 뭐죠?”
반색하며 물어보는 아리시아에게 검은 바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검은 바람이 아리시아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아리시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런, 그게 도움이… 될까요?”
“분명 될 거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
“할 수 있겠니?”
“예.”
아리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 * *
그날 밤.
카일은 여전히 아리시아의 코어를 관리해 주었다.
‘오늘은 실전 훈련일 뿐이었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해둘까?’
평소 하던 것처럼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한 마사지를 하려고 손을 풀던 그때였다..
“주인님.”
“응? 무슨 일이야?”
“오늘은 제가 주인님을 마사지 해드려도 될까요?”
“나? 나는 멀쩡한데?”
“그래도 꼭 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언가 비장한 결심까지 느껴지는 아리시아의 말에 카일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알았어. 한 번 해봐.”
그리고 카일이 아리시아의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했으면 좋겠네. 팔에 힘이 없을 테니까 그냥 밟으라고 할까?’
카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카일은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르륵.
천이 맨살을 스치고 흘러내리는 소리에 카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 아리시아?”
“…….”
아리시아가 겉옷을 벗고 속옷 차람인 상태로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
카일의 물음에 아리시아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손을 뒤로 돌려서 가슴의 속옷을 벗고 이윽고 하의도 밑으로 내려서 벗었다.
어느새 카일의 눈앞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리시아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여체의 굴곡에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아름답다.’
아리시아가 아름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카일이 평소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부터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리시아는 알몸으로 카일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더니 그대로 품 안에 안겼다. 마치 자신의 전부를 맡길 테니 뜻대로 해달라는 듯이 말이다.
“괜찮겠어?”
카일의 물어보는 말에 아리시아는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래.”
아리시아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받은 카일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아리시아의 얼굴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가에 글썽이는 눈물조차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카일은 그런 그녀에게 부드럽게 키스를 하고 그녀를 자연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주인님. 부디 불을…….”
아리시아의 요청에 카일은 촛불을 끄고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에 자신의 몸을 눕혔다
* * *
“다행이 잘 된 모양이군.”
카일이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자 검은 바람은 작게 중얼거렸다.
“등을 너무 많이 밀었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런 건 시간을 오래 끌면 좋지 않아.”
검은 바람은 나름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이런 상황을 일부러 유도했다.
검은 바람이 보기에 카일이 가지고 있는 힘과 가능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그는 분명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아직 정신적으로 다소 미숙한 면이 보이긴 하지만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다만, 사람이 그렇게 성장하는 과정에는 온갖 유혹과 시련들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여자 역시 그중에 하나다.
검은 바람은 예전부터 모험가나 용병들이 여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나태해지는 자들을 많이 봐왔다. 하는 일이 험하다 보니 그 반동으로 단순하고 자극적인 쾌락을 찾는 것이다.
보통 술, 도박, 여자, 심하면 마약 정도까지 번지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원석이라고 해도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나태함의 함정에 빠져버리는 이들을 많이 봤었다.
‘주인님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지.’
그래서 카일은 아리시아의 등을 밀었다.
사실 노예 시장에서 아리시아를 봤을 때부터 이런 생각은 했다.
엘프라고 하면 미의 종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으니 카일을 여자로서 충분히 만족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검은 바람의 예상을 빗나가는 오산도 있었다.
바로 아리시아가 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졌다는 것과 카일에게 은혜를 입은 아리시아가 연심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행이 이 둘은 기쁜 오산이었다.
문제는 카일에 아리시아에게 전혀 손을 뻗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검은 바람은 첫날 카일이 아리시아의 방에 찾아갔을 때 분명 둘이 함께 밤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카일을 태연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카일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검은 바람은 노예다. 비록 크게 카일을 위해서라고 해도 카일에게 건의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내밀하고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노예인 아리시아는 달랐다.
아리시아는 카일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녀는 훈련 중에 한계가 와도 주인님을 위해서라고 하면 이를 악물고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이렇게 기특한 아이라면 주인님에게 총애를 좀 받는다고 해도 태도가 변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모험가로서 전력이 될 수 없다면 여자로서 카일을 기쁘게 해보라고 말이다.
결국 다 검은 바람이 설계한 것이다.
“내일 훈련은 조금 늦게……. 아니 그냥 쉬어도 괜찮겠지.”
젊은 두 사람을 배려해서 검은 바람은 내일은 푹 쉬겠다고 생각했다.
* * *
“으음…….”
얼굴에 닿는 아침 햇살의 자극에 카일은 눈을 떴다. 그리고 카일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리시아를 볼 수 있었다.
아리시아는 진작 일어났는지 졸음기 없는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나셨나요? 주인님.”
“그래. 먼저 일어났구나.”
“예. 조금 전에요.”
“불편하면 먼저 일어나지 그랬어?”
“제가 어떻게 감히…….”
카일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그 품 안에서 얌전히 안겨 있었던 아리시아였다.
사실, 아리시아 본인도 1초라도 좋으니 카일의 품 안에 더 안겨 있고 싶었다.
카일은 그런 아리시아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몇 초간의 농밀한 키스가 이어지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해서 더 강하게 달라붙었다.
“주인님.”
“아리시아.”
하루의 일정대로라면 이미 일어나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늘 만큼은 다 잊어버리고 서로에게 매몰되어갔다.
* * *
점심이 훌쩍 지나서 오후 세 시경.
카일은 멋쩍은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음, 그래.”
“뭔가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난 괜찮아. 그보다 오늘 하루는 아리시아 훈련을 쉬어 줘.”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배고프니까 식사 좀 가져오고. 2인분으로.”
“예. 알겠습니다.”
검은 바람이 방을 떠나고 카일은 자기 침대에 누워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 거렸다.
“이런 거였나? 이런… 상상도 못할 정도로…….”
카일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으로 여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쇼크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경이적인 체험이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 행위에 집착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몸의 친부인 루트비안 자작의 여성 편력이 난장판이 것도 어떤 의미로는 이해가 갈 정도로 말이다.
‘이래도 괜찮을까?’
카일은 맨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 종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계속 아리시아를 탐닉하기만 했다.
그녀의 하얀 피부에 하나하나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자신의 손길에 튀어 나오는 그녀의 몸짓 하나 목소리 하나 마저도 너무나 감미로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만이 가득했다.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리시아 뿐이었다.
“여자로 사람이 망가지는 이유가 이래서 그런 건가?”
천만다행인 것은 카일의 머리 한 구석에는 ‘이러면 안 된다.’ 라는 의식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때때로 감성적인 충동에 휘둘리고 심지어 인생관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카일은 그 충동을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좋게도 나쁘게도 해석 할 수 없다.
그저 억압과 탄압으로 가득했던 카일의 지난 인생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만약 그런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카일은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모험가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그냥 아리시아와 열렬한 밤만 보내며 남은 평생을 살면 나는 분명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이다.
그만큼 지난밤의 자극은 카일에게 강렬한 것이었다.
식사를 하고 좀 휴식을 취한 후.
카일은 다시 아리시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님. 오셨어요?”
아리시아는 자신의 방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가 카일이 일어나자 황급하게 일어났다.
“괜찮아. 앉아 있어. 식사 중이었어?”
“예. 이제 다 먹었어요.”
“그래.”
아침부터 점심까지 밥 먹을 틈도 없이 아리시아를 괴롭혔던 것은 카일이었다.
카일은 조금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말했다.
“몸은 좀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리시아는 노예로 태어나고 자랐지만 사정이 있어서 한 번도 남자에게 안기지 않은 처녀였다. 그런 그녀가 거의 10시간 넘게 카일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다만, 노예인 자신의 몸을 걱정하는 카일을 위해서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지금도 다리가 후들 거리고 온 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이건 훈련으로 인한 근육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카일은 그런 그녀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괜찮을 리가 없지.’
카일은 지금 당장 아리시아와 다시 섹스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아리시아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왔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는데… 만약 네가 싫다면 다시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아리시아는 펄쩍 뛰면서 부정했다.
카일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까지 강력하게 부정하는 그녀의 모습은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이건 명령이야.”
종속 마법이 걸린 이상 여기서 아리시아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카일은 내심 아리시아가 자신을 환멸하고 매도하는 발언을 해도 모두 이해할 생각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주인님이 저를 사랑해 주신다면 오히려 과분할 뿐이에요. 부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맹목적인 충성과 애정의 애원.
그것뿐이었다.
‘진심이라는 거구나.’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강제로 이런 대답하게 해서…….”
“괜찮아요. 주인님.”
“계속 괜찮다고만 하네?”
“…….”
아리시아는 조금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침묵했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푹 쉬어. 많이 피곤할 테니까.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시 일상 훈련을 시작한다. 알았지?”
“예. 주인님.”
“좋아.”
카일은 아리시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