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가슴을 펴고, 호흡은 진정시켜라. 팔의 떨림은 지금 신경 쓰지 마. 우선 중요한 건 리듬이다.”
“예. 오라버니.”
스스로 전문은 아니라고 했지만 검은 바람은 활도 제법 잘 쐈다.
‘하긴, 활 못 쏘는 유목민족은 말이 안 되지.’
카일은 그 광경을 곁눈으로 지켜보면서 자신의 수련에 매진했다.
첫째 날, 아리시아는 활을 당겼다 놨다만 반복했다. 팔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온 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렀지만 우는 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좋아. 여기까지.”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한계야. 들어가자.”
검은 바람은 오히려 고집 부리는 아리시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카일은 아리시아의 코어를 활성화시켜 주기 위해서 그녀의 방을 방문했다.
“주인님. 여기는 어쩐 일로?”
“말했잖아. 네 코어를 매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런 수고를 끼쳐서.”
“괜찮아. 미안하면 빨리 코어를 활성화시키던가.”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건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카일은 굳이 말하지 않고 아리시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럼 시작한다.”
“예 주인님.”
그리고 카일은 검은 바람을 관리할 때와 같이 아리시아의 초능력 코어를 자극했다. 당연히 코어는 꿈적도 하지 않았지만 아직 굳어버리지 않은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해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자.’
그리고 작업이 끝나고 카일은 아리시아를 보고 말했다
“훈련 첫날인데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
카일은 슬쩍 손을 뻗어서 아리시아의 어깨 근육을 꾹 눌러 봤다.
“아흑…….”
순간 아리시아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나왔다.
“괜찮기는. 첫 날부터 너무 무리했어.”
“괜찮습니다. 주인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카일의 말에 아리시아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카일은 그런 아리시아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아리시아.”
“예. 주인님.”
“침대에 엎드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리시아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카일은 그런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고 아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침대보를 꽉 움켜쥐었다.
‘괜찮아. 괜찮아. 주인님이라면 뭐든지…….’
“아흑!”
순간 아리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비명을 지른 원인은 다름 아닌 카일의 손이었다.
카일은 손으로 아리시아의 숭모근과 광배근을 꾹꾹 눌러주며 말했다
“완전히 뭉쳤군. 이대로 자면 내일은 훈련에 지장이 있을 정도야.”
“주… 주인님, 지금 무슨…….”
“가만히 있어봐. 근육을 풀어 주려는 거야.”
카일은 그대로 손을 움직여서 아리시아의 어깨와 등 근육을 정성껏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으로 꼼꼼하게 꾹꾹 눌러가는 카일의 마사지에 아리시아는 황급하게 말했다.
“이… 이러시면…….”
“왜?”
“노예에게 이런 행위를 하시면 안 됩니다. 주인님. 차라리 제가…아흑.”
“가만히 있어. 근육 뭉친 건 너지 내가 아니란 말이야.”
“그… 그런…….”
“명령이야. 얌전히 엎드려서 내 마사지를 받아라.”
아리시아는 베개에 얼굴을 박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주인님.”
“좋아. 그래야 착한 아이지.”
카일은 다시 집중해서 아리시아의 상반신 근육을 정성껏 마사지했다.
너무 집중해서일까?
카일은 아리시아의 귀가 완전히 빨갛게 물든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 * *
다음 날.
아리시아는 멀쩡한 몸으로 다시 훈련에 임했다.
“회복이 빠르구나. 분명 근육통으로 꿈쩍도 못 할 줄 알았는데?”
“…….”
아리시아는 그저 붉어진 얼굴로 아무 대답도 못했다.
‘뭐지?’
검은 바람은 조금 이상했지만 바로 신경 껐다. 지금 중요한 건…….
“훈련에 집중해라.”
“예. 오라버니.”
아리시아를 빨리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검은 바람은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최대한 정성껏 가르쳤고 아리시아는 혼신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그 훈련을 배웠다.
그리고 1주일.
아리시아는 활을 당기는 훈련만 했다.
검은 바람은 지금 기초 자세를 정확하게 잡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꾸준하게 자세를 지적하며 활을 당기게 했다.
훈련 2주일.
아리시아는 처음으로 활에 화살을 걸고 과녁을 향해 발사했다. 화살은 크게 빗나갔지만 검은 바람은 명중률과 상관없이 일정한 리듬으로 계속 쏠 것을 지시했다.
훈련 3주일.
아리시아의 화살이 드디어 과녁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리시아는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검은 바람은 엄격한 표정으로 그런 아리시아를 나무랐다.
“아직 한참 멀었다. 이 정도 솜씨는 실전에서는 못 써먹는다. 만족하지 말고 더 매진해라.”
“예. 오라버니.”
아리시아는 한 번 말하면 바로바로 알아듣고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검은 바람의 입장에서는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었다.
훈련 4주일.
아리시아의 화살을 열 발을 쏘면 열 발 모두 과녁에 맞아 들어갔다.
그러자 검은 바람은 기존의 과녁보다 절반 이상 작은 과녁을 가져왔다. 이전에 쓰던 과녁의 지름이 1미터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그 절반 정도 되는 것을 가져온 것이다.
검은 바람이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열 발 쏴서 모두 맞춰라.”
“예. 오라버니.”
당차게 대답하는 아리시아를 보고 검은 바람은 미소 지었다.
훈련 5주일.
아리시아의 앞에는 과녁은 사라졌다.
그 대신 사과 다섯 개가 걸려 있었고 아리시아는 똑같은 리듬으로 활을 당겼다.
퉁. 퉁. 퉁. 퉁. 퉁.
그렇게 발사된 화살은 정확하게 다섯 개의 화살을 모두 꿰뚫었다.
“어떤가요? 오라버니.”
검은 바람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명중률은 충분하구나.”
‘과연 쿼터라도 엘프라는 건가? 활에 대한 숙련도가 터무니없이 빨라.’
태연한 표정과 달리 검은 바람은 지금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검이나 창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무기다. 사용법을 모르면 화살이 똑바로 날아가지도 않으니 말이다.
인간의 경우 지금 아리시아와 같은 수준으로 활을 익히려면 5주로는 어림도 없다. 아마 5년? 감이 없는 놈이라면 평생을 해도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엘프의 피가 흐르는 아리시아의 경우 태어나서 처음 활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숙련되었다.
검은 바람도 엘프에게 활을 가르쳐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 정도로 빠르게 성장할 줄은 몰랐다. 검은 바람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세 배는 더 빠르게 아리시아는 숙련되었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자.”
“예. 오라버니.”
그날 밤.
카일은 어김없이 아리시아의 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코어를 관리해준 후.
“엎드려.”
“주인님. 이제 안 이러셔도…….”
“명령이야.”
“예.”
아리시아는 쓰게 웃으며 침대에 엎드렸고 카일은 그 위에서 마사지를 해줬다.
아리시아가 아무리 강해지고자하는 집념이 강하다고 해도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고작 마사지일 뿐이지만 이거라도 해주는 편이 확실히 더 낫기는 하겠지.’
그 서포트를 하기 위해서 카일은 매일 밤 아리시아의 근육을 마사지 해주고 있었다.
근육을 꾹꾹 눌러서 지압 하면서 카일이 말했다.
“검은 바람이 말하더구나. 이제 곧 던전에서 실제 훈련을 해봐도 되겠다고?”
“정말인가요?”
“그래. 준비는 됐나?”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
아리시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자신을 거둬 주고 노예에게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 준 카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래. 믿겠다. 아리시아.”
‘예. 주인님.“
* * *
다음 날.
거의 한 달 만에 카일은 던전에 들어갔다. 던전에 들어간 목적은 아리시아의 실전 훈련이었다.
1층의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카일과 검은 바람은 최소한으로 나서기만 하면서 아리시아에게 상대하게 했다.
“끼르륵!”
“케륵 케륵.”
아리시아는 멀리서 달려오는 고블린에게 화살을 쐈다.
퉁. 퍼억!
정확하게 날아간 아리시아의 화살은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고블린은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다.
“잇…….”
그 기세에 아리시아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 활을 쐈다.
퉁. 퍼억!
퉁. 퍼억!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갔고 그 화살 모두가 고블린의 머리를 정확하게 맞췄다. 하지만 그사이 두 마리의 고블린이 살아남아서 아리시아의 지척에 도달했다.
“키에에에에!”
“키륵!”
놈들은 힘껏 뛰어올라서 아리시아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놈들은 아리시아에게 닿지 못했다.
퍼퍽!
아리시아에게 닿기 전, 검은 바람이 주먹으로 그 두 마리를 박살 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리시아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에게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분했더구나. 겁도 좀 먹었고…….”
“겁은…….”
“어느 쪽이든 좋은 현상은 아니야. 활을 쏘는 사람은 감정이 얼음장처럼 냉정해야 해.”
“…….”
“한 번 떠난 화살의 궤적은 절대 수정할 수가 없지. 그렇기에 화살이 손끝에서 떠나는 순간까지 최대한 냉정해야 한다. 감정의 흔들림은 방해물일 뿐이다.”
“예. 명심할게요.”
“좋아. 계속하자.”
지금 아리시아의 활은 인간으로 치면 상당한 수준이다. 아마 명중률만 높고 보면 수년간 활에 매진한 사람들과 별 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연습과 실전은 다를 법.
더구나 첫 실전이다 보니 부족함이 다소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검은 바람은 옆에서 그런 아리시아를 차분하게 지켜보며 조언을 해주었다.
‘좋은 사제지간이네.’
카일은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괜히 참견을 하는 것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지켜만 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던전 진입 첫날.
아리시아는 고블린을 상대로 초보자치고는 훌륭한 전투를 보여 주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그녀의 시력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고블린을 포착해서 자신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화살로 저격할 수 있었다. 다만 초보자 치고 훌륭하다는 것이지 아직은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카일이 길드의 카운터에서 마석을 매매하고 얘기를 하는 동안 아리시아가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지금 제 실력으로 주인님에게 도움이 될까요?”
“아직은 조금 더 단련해야 할 거다. 부족한 게 많아.”
“구체적으로 뭐가 더 부족한 걸 까요?”
“우선은 너 자신이 이동하면서 화살을 쏠 수 있어야겠지.”
“아아…….”
“뛰지는 못해도 걸으면서 화살을 쏠 수 있게 되면 정지 상태에서 화살을 사용하는 것과 효율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또 뭐가 부족하죠?”
“아무리 궁수라고 해도 근거리에서 자기 한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있는 게 좋다. 짧은 단검술 정도라도 익히고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겠지.”
“그렇군요.”
자신에게 부족한 면이 많다는 것을 안 아리시아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바람은 그런 아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많이 서운하냐?”
“예. 주인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제가 한 사람분의 몫을 해야 하는데…….”
아리시아의 범상치 않은 노력의 동기부여는 결국 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