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리시아의 진심이 전해진 걸까?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래는 이뤄졌다.”
그리고 카일의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미안하지만 고통스러울 거다.”
“무슨… 아아, 아아악!!”
어마어마한 고통이 아리이사를 덮쳤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는 아리시아를 보며 검은 바람은 말했다.
“후우우우우. 저건… 아프지.”
초능력의 각성은 강건한 전사인 검은 바람조차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이것만큼은 나도 어쩔 수가 없지.’
카일은 그저 고통에 울부짖는 아리시아를 지켜볼 뿐이었다.
* * *
세상일 대부분은 대가가 있어야 결과도 있는 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가?’라는 것이다.
죽어라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변변치 않으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바꿔서 말하면 결과가 대박이면 지난 시간에 자신이 치렀던 대가에 대한 고통과 고난도 모두 희석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이, 이게… 나?”
아리시아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전신에 입은 화상으로 추악해졌던 피부는 하얀 대리석처럼 매끈하게 변했고, 머리에는 손가락에 스치기만 해도 사르륵 거리는 부드러운 금발이 매끄럽게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상처가 깨끗하게 나아서 원래대로, 아니 원래의 그녀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그런 아리시아의 모습에는 검은 바람조차도 감탄할 정도였다.
‘엘프의 피가 흐르니 미모가 좋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반면에 카일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견디느라 수고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리시아.”
카일은 이미 그녀가 아름다워질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전생에도 각성자들은 이상적으로 골격과 피부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도 여자들도 모두 잘생겨지고 아름다워지고는 했다.
‘뭐, 그중에서도 이 정도면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긴 하네. 엘프의 피가 흘러서 그런가?’
하지만 카일 본인의 넋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흑.”
털썩.
아리시아가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마를 바닥에 가져다 대면서 카일에게 진심으로 외쳤다.
“고, 고맙… 습니다. 주인님.”
감격에 벅차서 말조차 제대로 잊지 못하는 그녀에게 카일이 말했다.
“이제 의심의 여지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저 아리시아,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을 바쳐서 주인님을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죽으라면 죽을 것이며, 원하신다면 이 몸을 지옥의 불길에 던지는 것도 기쁜 마음으로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짓은 안 시켜. 뭐, 고생은 좀 해야겠지만 말이야.”
카일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검은 바람.”
“예. 주인님.”
“아리시아가 입을 만한 옷을 좀 사와라. 그리고 가능한 생필품도 사오고.”
“예.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본인을 데리고 가서 고르게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아리시아가 입고 있는 옷은 거의 넝마나 다름없어서 그녀의 속살이 다 드러나 있었다. 이런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니면 무슨 시비가 붙을지 몰랐다.
‘예쁘긴 진짜 예쁘게 변했네.’
그런 생각을 하는 카일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아리시아의 예쁨은 꽃이나 보석을 볼 때의 감상과 비슷한 것이었다.
“어때?”
검은 바람은 아리시아가 입을 만한 바지와 셔츠, 그리고 여성용 가게에 들어가서 속옷까지 사왔다.
가능하면 거기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카일의 명령을 우선해서 사온 것이다.
눈대중으로 샀을 뿐인 옷이지만 사이즈는 거의 맞았다.
“좋아요. 검은… 바람씨. 감사합니다.”
아리시아는 정말 오랜만에 입어 보는 정상적인 옷에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검은 바람이라고 불러도 좋다.”
“안 되죠. 그래도 저보다 먼저 주인님을 섬겼는데 그럴 수는 없죠. 서열이…….”
“아… 그건 그렇군.”
노예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서열이 중요했다.
그 서열은 주인을 섬긴 세월이나 공적에 따라서 정해지는 게 보통이었지만 노예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민감한 일이었다.
“알았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오라버니요?‘
“그래. 앞으로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나도 너를 동생처럼 대하마.”
그 말에 아리시아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그 모습에 검은 바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 거렸다.
“나쁘지는 않네.”
그때 카일이 방으로 올라와서 말했다.
“식사하러 내려가자.”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가 얌전하게 카일을 따라갔다.
1층의 식당에 도착하자 카일과 검은 바람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아리시아는 순간 당황했다.
“오라버니, 주인님과 같은 자리에 앉으면…….”
“괜찮다. 우리 주인님은 관대한 분이시다.”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오라버니?”
“예. 서로 호칭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습니다.”
검은 바람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네.”
“그렇습니다.”
“아리시아 너도 앉아.”
“…예. 주인님.”
카일의 말에 아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주인과 같은 식탁에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정식 3인분 나왔습니다.”
식탁에 올라온 메뉴도 카일과 노예인 자신의 것에 차이가 없었다.
카일이 밥을 먹기 시작하자 검은 바람은 익숙하게 그런 자리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만 특별히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가?’
보통 노예들을 첫날에만 잘 대해주는 주인들은 가끔 있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인심을 쓰면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주인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검은 바람의 익숙한 모습을 보면 지금 이 모습은 특별대우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아리시아.”
“예. 주인님.”
카일은 아리시아에게 열쇠를 주면서 말했다.
“네 방은 따로 잡아 놨다. 거기서 자면 돼.”
“따로… 말인가요?”
“그래. 여자인 네가 우리하고 같이 잘 수는 없잖아?”
“…….”
아리시아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노예한테 각방을 준다?
심지어 그 이유가 여자이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얘기지만 노예로 태어나고 자란 아리시아는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대우였다.
“주… 주인님. 제가 노예인 건 알고 계시죠……?”
“알아. 그게 뭐?”
“그런데 왜 이런 대우를 해주시는 건가요?”
그러자 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자인 네가 남자인 우리하고 같은 방을 쓰면 불편할 것 아니야. 이건 특별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이 거들 듯이 말했다.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들여라. 우리 주인님은 이런 분이시다.”
노예의 인생은 개인의 능력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카일보다 더 좋은 주인은 세상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로서 존중을 받아본 그녀는 크게 감동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리시아는 나오려는 눈물을 꾹 눌러서 참으며 카일에게 말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은 바람과 방으로 들어갔다.
“검은 바람. 얘기를 좀 할까?”
“예. 말씀하십시오.”
“아리시아를 구입한 건 좋은데 그 아이가 과연 던전에서 전력이 될까?”
카일은 사실 이 부분을 좀 염려하고 있었다.
지금 겉으로 보기에 아리시아는 전투 노예로서 필요한 전투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은 바람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지금 아리시아는 전투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님도 아시다시피 엘프들이 인간보다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적 열세로 인간들에게 세력권을 빼앗기고 오지로 도망갔지만 개개인의 재능을 보면 엘프의 전투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순발력, 유연성, 민첩성 등의 신체 능력도 뛰어나고 특히 시력과 청력은 인간의 수십 배가 넘는다. 유일하게 뒤지는 건 근력 정도였지만 그 마저도 큰 차이는 아니었다.
거기다 엘프들만이 다룰 수 있는 정령술까지 생각하면 엘프들의 전투력은 인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아리시아는 쿼터야. 일단 정령술은 못 쓸 거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전에 아리시아와 같은 쿼터 엘프 전투 노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자는 정령술 없이도 충분히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전투 노예로서 충분한 단련을 받은 경우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아리시아는 즉시 전력이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나?”
“아마도 조금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조금이라…….”
카일은 생각했다.
원래 카일이 생각한 것은 초능력으로 신체를 회복시킨 순간 즉시 전력이 되는 존재였다.
검은 바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리시아는 지금 당장은 전투에 써 먹기는 불가능 하다. 결국…….
“시간을 두고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는 거군.”
“…….”
“검은 바람. 앞으로 나뿐만 아니라 아리시아도 가르쳐야 한다. 잘 할 수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좋아. 그럼 믿고 맡기겠다.”
카일은 화를 내는 대신에 아주 조금 더 먼 미래를 바라보기로 했다.
최근에 큰돈도 벌었으니 당분간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아리시아의 기초 교육만 시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카일은 아리시아를 데리고 행크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장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엘프족이 사용할 무기라면 뭐니 뭐니 해도 이게 최고죠.”
점원은 두 가지 무기를 건네며 추천했다..
그건 활과 석궁이었다.
“활과 석궁이라. 분명 엘프라고 하면 궁술이 유명하긴 하지. 그런데 너무 다른 두 가지 무기를 추천한 것 아닌가요?”
카일의 말에 점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각자 장단점이 있습니다. 활은 숙련되는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석궁은 단기간에 익숙해질 수 있죠. 그리고 연사력은 활이 더 좋지만 파괴력은 석궁이 더 좋죠.”
“양쪽 중에 굳이 추천한다면요?”
“초보자일 때는 석궁이 더 좋을 겁니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활을 사용하는 숙련된 궁수가 훨씬 더 강한 전력이 되죠.”
“주인님. 저는 활을 다루고 싶습니다.”
옆에서 아리시아가 마음을 먹은 것처럼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그리고 카일은 아리시아에게 목궁을 사주었다. 그리고 장비로 가죽 갑옷과 부츠, 근거리용의 무기로 짧은 단검도 하나 샀다.
“다 해서 얼마죠?”
“활이 2골드, 가죽 갑옷이 2골드 50실버, 부츠가 50실버, 단검이 90실버. 화살 두 묶음은 20실버, 다 해서 6골드 10실버입니다.”
아리시아는 자신의 몸값보다 두 배는 더 비싼 가격의 돈을 듣고 카일을 바라봤다.
혹시나 부담이 되면 사양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카일은 순순히 돈을 지불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아리시아는 가게를 나오면서 카일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저를 위해서 이렇게 귀한 장비까지 사 주셔서…….”
“앞으로 모험가로 일하려면 장비가 필요한 건 당연한 거야.”
그렇다고 해도 아직 전투에 대한 기초도 없는 아리시아에게 이 정도로 후하게 장비를 마련해 준 것은 카일이 좋은 주인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활과 화살만 사주었을 것이다.
“주인님의 기대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리시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아리시아는 당장 그날부터 여관의 뒤뜰에서 활 연습에 매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