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카일은 이 칼이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 이런 무기는 아시아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투란 민족이 주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쓸 만은 한가?”
“물론입니다. 한쪽으로 휘어 있는 날이 베기 공격에 힘과 예리함을 더해 줍니다. 찌르기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죠. 다만 무기가 길어진 만큼 지금 사용하시는 숏 소드보다 조금 느려질 겁니다.”
“그래? 괜찮군.”
카일이 오크를 상대할 때 속도에서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보다 오크의 두껍고 질긴 가죽을 베지 못하는 공격력의 부족함이 더 아쉬웠다. 그래서 항상 오크와 싸울 때 결정타는 베기가 아니라 찌르기여야 했다.
하지만 이 태도를 사용함으로서 공격의 무게가 더해진다면 베기 공격도 오크에게 유효타가 될 수 있었다.
“사용법은 네가 가르쳐 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걸 본격적으로 배우시려면 한 자루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카일은 대장간 주인을 불러서 말했다.
“이것을 구입하고 싶습니다.”
“투란의 태도군요. 좋은 물건이죠. 가격은 7골드입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숏 소드보다 네 배는 더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이것을 구입하고 싶었다.
“혹시 한 자루 더 구입할 수 있나요?”
그것도 한 자루가 아닌 두 자루를 말이다.
“한 자루 더 말입니까?”
“여기 뒤에 있는 제 노예가 사용할 겁니다.”
“흠,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물건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잠시 후 나온 점원이 말했다.
“지금 당장의 재고는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문하시면 열흘 정도 후에는 완성할 수 있습니다.”
“투란의 물건인데 만들 수가 있나요?”
“물론이죠. 우리 대장간에서는 투란 출신의 대장장이 노예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노예라는 것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세계였다. 어쩌면 여기저기에 보이는 신기한 무기들도 투란 출신의 노예가 만들었을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주문하면 얼마나 들 까요?”
“똑같은 걸 만들면 8골드입니다. 하지만 사용자의 주문에 따라서 길이나 무게를 조정한다면 가격이 더 붙을 수 있습니다.”
“그렇군. 검은 바람 뭔가 원하는 것이 있나?”
“주인님. 저는 지금 사용하는 무기로도 5층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더 밑으로 내려가면 모르잖아? 지금 당장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먼 미래를 보고 말해 봐.”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검은 바람은 대장간의 주인에게 말했다.
“장인을 만나서 직접 대화하고 싶은데 가능하오?”
“물론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바람 못지않게 건장한 체형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색 머리에 구리빛 피부.
검은 바람과 같은 투란인이었다.
‘저 친구가 이 대장간에서 일하는 노예라는 건가?’
그는 검은 바람을 보더니 퉁명하게 말했다.
“동족은 오랜만에 보는군.”
“당신은 어디서 왔소?”
“아보트 강의 동쪽 유역에서 왔소. 그러는 당신은?”
“메라 평원의 북쪽.”
그 말에 상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험한 곳에서? 그렇다면 진짜배기 전사겠군. 뵙게 되어서 영광이오.”
“그래 봤자 지금은 서로 같은 신세일 뿐이오.”
“훗, 그건 그렇지.”
“크흠…….”
둘의 대화에 옆에 있는 대장간 점원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 노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문이 있다고 들었소.”
“태도를 주문하고 싶소. 다만 저것보다 더 길고 날도 두꺼웠으면 하오.”
“그렇군. 대전사들이 들소 사냥을 할 때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로 만들면 되는 것이오?”
“얘기가 빠르군. 손잡이도 더 길었으면 좋겠소.”
“알겠소. 그렇다면 철도 좀 더 단단하게 접어야겠군.”
둘은 동족이라서 그런지 서로 간에 말이 잘 통하는 듯 했다.
대략적인 주문이 끝나자 대장간의 점원이 말했다
“붉은 바위. 주문대로 만들면 생산 단가가 얼마나 나오지?”
“대략 10골드는 들어갈 듯합니다.”
“그렇군.”
점원은 다시 카일을 보고 말했다.
“손님이 이미 구입하신 무기와 합쳐서 17골드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10골드까지 예산을 생각하고 왔으니 상당한 예산 오버다.
카일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무기를 매각하면 얼마나 깎아 줄 수 있습니까?”
점원은 카일이 사용하는 숏 소드와 검은 바람이 사용하던 롱 소드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
“두개 합쳐서 2골드에 매입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서 살 때는 두 개 합쳐서 3골드 50실버였습니다만?”
“중고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도 조금은 남겨야죠.”
“…….”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15골드군요.”
“예. 대금은 지금 지불하시겠습니까?”
“10골드는 지금 지불하고 나머지 5골드는 물건을 찾으러 올 때 지불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거래를 마쳤다.
“잘 부탁하네. 동포여.”
검은 바람은 나가기 전에 붉은 바위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붉은 바위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네 동포여.”
그렇게 둘은 서로 한 번 손을 마주잡더니 떨어졌다.
대장간을 나오고 나서 카일이 말했다.
“오랜만에 동포를 만나서 좋은가 보군.”
“혹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오히려 네가 기분 나빴던 게 아닌가 모르겠군.”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일일이 분노하기에는 제가 지나온 세월이 너무 깁니다.”
“그런가?”
“예. 그리고 저 친구는 노예 치고는 처지가 괜찮은 편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기술을 대우받고 있는 모양이니까요.”
“그렇군.”
종속 마법으로 인해서 노예 제도가 굳건하게 자리 잡은 이 세계에서 검은 바람은 붉은 바위 정도면 노예 치고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 * *
주문한 물건이 올 때까지 카일은 던전에 내려가지 않았다. 검은 바람의 무기가 완성되기 전에는 사실 가기도 힘들었다.
대신 검은 바람에게 새로운 무기의 사용법을 가르침 받고 있었다.
“베는 순간 날붙이를 자연스럽게 당겨야 합니다. 팔이 아니라 몸 전체를 써서 휘두른다고 생각하십시오.”
“흐으읍!”
부우우웅!
검은 바람이 시키는 대로 태도를 휘두르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렸다.
“예.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정확한 자세를 기억하면서 반복하십시오.”
“알겠다.”
카일은 검은 바람이 시키는 대로 태도를 휘둘렀다.
검은 바람은 그 옆에서 카일의 자세를 봐주면서 틀어지면 바로바로 수정했다.
“예. 여기까지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주인님.”
“수고는 네가 했지.”
오전 수련이 끝나고 땀을 닦은 후 카일이 말했다.
“오늘이지? 무기가 완성 되는 게.”
“예.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찾으러 가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카일은 대강 땀을 닦고 검은 바람과 함께 대장간으로 찾아갔다.
찾아가니 이전에 봤던 점원이 카일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에 주문하신 물건을 찾으러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완성 되었나요?”
“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점원은 카일의 앞에 한 자루의 태도를 가져왔다.
“호오오… 이거군요.”
카일이 사용하던 태도도 꽤 길었지만 검은 바람이 주문한 물건은 카일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날의 폭도 더 두꺼웠고 길이도 50센티미터 정도는 던 긴 것 같았다.
“뽑아서 확인해 봐라.”
“예. 주인님.”
무기의 주인이 될 검은 바람은 직접 태도를 뽑아서 확인했다.
스르렁―
새로 만든 무기의 날카로운 쇠가 칼집을 스치는 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소리를 냈다.
무기를 뽑아 본 검은 바람은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지.”
아무래도 무기가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혹시 무기를 시험해 볼 장소가 있소?”
검은 바람의 말에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뒤뜰로 가시죠.”
이런 일이 흔한지 대장간의 뒤뜰에 가니 제법 넓은 장소와 표적으로 쓸 만한 허수아비가 있었다.
검은 바람은 새로운 무기를 들고 허수아비의 앞에 섰다. 그리고 곧바로 태도를 휘둘렀다.
“흡!”
호흡음과 함께 검은 바람의 태도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
그러나 분명 칼로 벤 것같이 보였는데 허수아비는 멀쩡했다.
‘검은 바람이 실수했나?’
카일이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바로 사라졌다.
스르르륵.
작은 산들바람이 불자 검은 바람의 앞에 있던 허수아비가 스르륵― 하고 떨어졌다.
“오오오……!”
대장간의 점원도 그 모습에 크게 감탄했다.
짚단을 최대한 짱짱하게 엮어서 만든 허수아비는 보통 검사들의 경우 어설프게 베거나 반쯤은 부수는 경우가 많았다.
저렇게까지 깔끔하게 베어 넘기는 모습은 점원도 좀처럼 보지 못했다.
‘생각보다 유능한 노예였군.’
대장간의 점원은 감탄했고, 검은 바람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 이렇게 훌륭한 무기를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카일은 대장간에 남은 잔금을 치르고 물건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감사합니다. 또 이용해 주십시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카일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내일쯤에 바로 던전에 가서 무기를 시험해 보도록 하자. 괜찮겠나?”
“예. 물론입니다. 실전 투입은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사실 돈도 거의 별로 안 남았거든.’
새롭게 무기를 구입하면서 생각보다 지출이 많았다. 빨리 던전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던전 5층.
검은 바람과 카일은 무기를 바꾸고 바로 다음 날 던전에 내려와서 탐험에 열중했다.
사실 검은 바람은 무기를 바꾸기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합!”
“쿠위이이익!”
“뀌이이익!”
어차피 원샷 원킬이라는 말이다.
이전에 투박한 롱 소드를 쓸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오크 사체의 절단면이 조금 더 깔끔해졌다는 것 정도의 차이였다.
다만 그동안 사체의 절단면이 깔끔하지 못했던 것은 바람이 워낙 강해서 그런 것이었다. 바꾼 무기의 덕은 카일이 톡톡히 보고 있었다.
“흡!”
“뀌이이익.”
카일의 날카로운 일격이 오크의 뱃가죽을 길게 잘랐다. 그러자 오크는 태도에 잘린 배 사이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카일은 바로 베기의 원심력을 살려서 옆에 있는 다른 오크를 상대로 태도를 휘둘렀다.
“쿠위이익!”
그 오크 역시 카일의 공격에 팔을 깊숙하게 베이고 황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좋다. 훨씬 더 쉬워졌어.’
오크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카일의 입가에 여유 있는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