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오크를 처리하고 얻은 자금 덕분에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카일도 오랜만에 주머니를 느슨하게 하고 기분을 풀기로 했다.
“검은 바람. 술집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
“괜찮겠습니까? 주인님.”
“그래. 가끔은 숨도 좀 돌려야지.”
이 도시, 아니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뒤를 따랐다.
카일과 검은 바람은 적당한 술집에 들어가서 안주와 술을 시켰다.
소시지 볶음과 맥주.
딱히 비싼 메뉴는 아니었지만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순수하게 즐겨보는 사치였다.
특히 검은 바람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그랬다.
수십 년 동안 노예로 살아온 검은 바람에게 이런 술자리는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뭐해? 안 먹고?”
“주인님. 노예인 제가 주인님과 이렇게 마주 앉아서 술잔을 기울인다는 것은…….”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러겠다는데?”
노예는 어떻게 하든 그건 철저하게 주인의 자유다. 즉, 잘 대해주는 것도 주인의 자유란 것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편하게 먹고 마셔. 아니면 나 먹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 그게 더 불편한데?”
“알겠습니다. 그럼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카일과 검은 바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맥주를 들이켰다.
“크으으… 좋다.”
카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맥주의 감촉에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의 맥주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좋군요.”
검은 바람 역시 실로 오랜만에 들어온 술의 취기에 약간 감동한 듯 했다.
“여기 두 잔 추가. 그리고 안주도 추가로 더 갖다 줘.”
“예. 알겠습니다.”
카일은 추가 주문을 하고 둘은 본격적으로 술자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일단 즐기기로 한 이상 카일은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카일을 보고 검은 바람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주인님께 이런 면도 있는지는 몰랐군요.”
“이런 면? 어떤 면을 말하는 거야?”
“저는 주인님이 굉장히 금욕적이고 자기 성장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구도자 같은 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도 않군요.”
“내가 그렇게 보였나?”
카일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구도자같이 답답한 인간하고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검은 바람에게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그동안 술은커녕 식사도 검소한 것만 드셨으니까요. 그리고 도박이나 여자 같은 것도 관심을 안 두셨고…….”
검은 바람의 말에 카일을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돈을 아끼느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이제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시면 달라지시는 겁니까?”
그 말에 카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글쎄? 그때가 되어 봐야 아는 거긴 하는데 흠… 아직 돈을 많이 벌어 보지 못해서 모르지.”
그리고 카일은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돈이 많아지면 행복해지는 걸까?”
“행복… 말입니까?”
너무 뜬금없는 말에 검은 바람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래. 행복 말이야.”
카일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말이다.
사실 모험가라는 직업 자체가 제법 특수한 것이니 이제 평범한 행복은 바라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카일은 간절하게 그것을 바라고 있다.
전생에 세계 정부에게 철저한 관리와 통제를 받는 전략 물자 취급받았고, 이 세계에서는 친부인 루트비안 자작가에서 하인 취급받으며 자랐다.
불행에 질리고 질린 카일은 그저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게 과연 무엇인지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다만 그게 너무 막연한 목표라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평범한 행복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하기에는 그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카일의 환상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검은 바람은 좀 생각하다가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인생의 행복이라는 말은 너무 뜬구름 잡는 것 같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목표이기도 하죠.”
“그렇지.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응?”
오랜만에 술이 좀 들어갔기 때문일까. 카일은 평소보다 입이 좀 가벼워졌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마도 행복이란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만족감이 아닐까요? 보통은 돈, 권력, 명예 그런 것 말이죠.”
“가장 원하는 것?”
“예. 가장 원하는 것이 충족되면 인간은 행복감을 느끼기 마련이죠.”
“…….”
“주인님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한 삶이지.”
“그건 과정은 다 생략하고 결과만을 말하는 겁니다. 좀 더 그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
하지만 카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과정은 없었다.
마치 간절하게 원하는 보물이 짙은 안개 너머에 있는 듯한 막막한 느낌이었다.
대답이 없는 카일에게 검은 바람이 말했다.
“아직 모르겠다면 조급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은 길고 그만큼 시간은 많으니까요.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 그래야겠어.”
카일은 많은 생각을 하며 술을 마셨다.
* * *
다음 날.
“숙취는 없네. 다행이다.”
카일은 환생하고 나서 거의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 몸은 술에 강한 체질인지 꽤 많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숙취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제 술김에 검은 바람과 나눈 대화도 뚜렷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
지금 당장은 막연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먼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오늘부터 집중하자.’
먼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지금의 현재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 * *
몇 달 후.
5층에서의 던전 탐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카일은 그 후로도 꾸준하게 던전에 들어갔다.
주 활동 영역은 5층.
한 번 들어갔을 때의 활동 기간은 짧으면 3일 길면 5일로 잡았다. 그리고 던전을 나오면 재충전을 위해서 반드시 이틀은 쉬었다.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한 번 던전에 들어가면 꾸준하게 5골드에서 8골드 사이의 수익을 올렸다.
이 정도면 모험가로서 카일의 생활은 충분히 안정권에 들어간 것이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가 않군.”
카일은 아직 현 상황에 만족하지 못했다.
“불만족스러우십니까?”
“음, 던전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흑자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뭐랄까…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야.”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으신 거군요.”
“그렇지.”
카일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직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감은 잘 오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편리한 인생을 위해서는 풍족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저 먹고살기에 충분한 정도의 검소한 수입이 아니라 억 소리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리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게 주인님의 목표라면 거기에 맞춰서 더 깊은 던전을 목표로 하는 게 좋겠죠.”
“가능할까? 지금 내 실력으로는 오크 두세 마리를 상대하는 게 고작이다.”
불과 한 달도 전만 해도 오크 한 마리를 상대로 일대일을 장담하지 못했던 카일이다. 하지만 검은 바람의 엄격한 단련과 본인의 강렬한 의지, 그리고 5층에서의 실전 경험이 쌓인 덕분에 이제는 혼자서 오크 두셋 정도를 상대할 수 있었다.
분명 훌륭한 발전이긴 했다. 그렇지만…….
“분명 지금 주인님의 실력으로 6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아직 무리입니다. 적어도 오크 열 마리 정도는 혼자서 상대하실 수 있어야 6층으로 내려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강해질 때까지 착실하게 기다려야 하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죠.”
“그게 뭐지?”
“전력을 증강시키는 겁니다. 주인님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흠…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자는 거지.”
검은 바람의 말은 카일도 생각했던 것이다.
카일이 모험가가 되고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던전의 5층까지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검은 바람의 힘 때문이다.
만약 검은 바람과 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영입할 수 있다면…….
‘6층, 아니 7층까지 내려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실력 있는 사람을 파티에 영입할 수 있는 방법이 막막하다. 정보도 인맥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파티원을 구하는 것은 어렵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섣불리 믿는 건 어려운 일이야.’
카일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충분해 지기 전에는 자신의 능력을 숨겨야 했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노예를 구입하는 방법인데 이건 돈이 문제였다.
“검은 바람. 너하고 비슷한 수준의 전투 노예가 보통 얼마에 거래되지?”
“제가 투기장에서 전투 노예로 팔렸을 때의 가격을 생각하면……. 대략 500골드에서 700골드 정도는 할 겁니다.”
“어림도 없군.”
지금 와서 생각해도 검은 바람을 1골드에 구입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싼 노예를 구입해서 주인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건 무리야.”
검은 바람은 몰랐겠지만 카일의 능력에도 한계는 있다.
그건 한 번에 각성시킬 수 있는 초능력자의 숫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생에 능력이 한참 좋을 때도 한 번에 다섯 명 정도가 한계였다.
지금은 검은 바람 한 명을 유지하는 것도 아슬아슬했다.
‘검은 바람의 초능력 중추가 제대로 각성해서 자리 잡은 후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다.’
매일같이 꾸준하게 관리를 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검은 바람의 초능력은 아직 개화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다른 이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장비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요?”
“장비를?”
“예. 지금 주인님이 사용하시는 장비는 사실 5층에서 사용하시기에는 조금 허술한 면이 있습니다.”
“흠, 그런가?”
숏 소드와 라운드 실드, 그리고 오크 가죽 갑옷.
모험가로서 막 시작한 초보자라면 딱 표준적이라고 할 만한 장비다.
하지만 진짜 일류 모험가는 실력만이 아니라 장비도 일류의 것을 사용하는 법이다.
카일은 아직 그런 일류 모험가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장비를 사용할 만한 실력과 경제적 요건은 되었다.
“좋군. 하는 김에 너도 바꾸는 게 어때?”
“좋은 물건을 발견한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대장간으로 가자.”
“옛.”
쇠뿔도 단김에 배라고 카일과 검은 바람은 당장 대장간 거리로 향했다.
* * *
행크의 대장간.
카일과 검은 바람이 찾아간 곳이다.
대장간 거리에는 수많은 대장간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를 찾아온 것은 이곳이 전에도 찾아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의 대장간들은 대부분 실력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믿을 만한 곳이 좋습니다.”
검은 바람의 후한 평가에 카일이 물었다.
“그럼 행크의 대장간이 믿을 만하다는 건가?”
“거래에서 믿음은 처음부터 요구하는 게 아니라 서로 신뢰를 쌓으면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골이 되면 그들도 우리를 점점 우대하기 마련이죠.”
“과연, 그렇군.”
어차피 품질이 대체적으로 상향평준화되어 있다면 한곳을 집중해서 거래의 실적을 쌓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행크의 대장간에 들어가자 점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장비를 바꾸고 싶은데요. 예산은 10골드 안으로 해서 말이죠.”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이쪽의 진열대에 있는 상품들이 적당할 겁니다.”
카일은 점원의 안내를 받아서 걸려 있는 물건을 봤다.
거기에는 다양한 무기와 방어구가 있었는데 대장간에서 만든 것도 있었고 다른 모험가들이 중고로 판 것도 있었다.
카일과 검은 바람은 신중하게 장비를 살펴봤다.
검이나 칼 같은 일반적인 장비도 있었지만 클로같이 독특한 무기도 있었다.
‘채찍? 저게 던전에서 쓸모가 있나?’
카일은 너무 독특한 무기는 내버려 두고 자신이 쓸 만한 물건을 살펴봤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이건…….”
카일이 집어든 것은 한 자루의 태도였다.
지금 카일이 쓰고 있는 숏 소드보다 두 배 이상 긴 태도는 카일이 전생에 지식으로 알고 있던 태도와 동일했다.
그 무기를 보고 검은 바람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고향에서 사용하는 무기군요.”
“네 고향에서?”
“예. 날이 한쪽만 있고 휘어 있는 것은 저희 투란 민족이 사용하는 무기의 특성입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