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검은 바람이 다가와서 말하자 카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크가 다르긴 다르군.”
“오크부터는 제대로 된 몬스터라고 해도 될 만한 놈들이죠. 상위종 중에는 익스퍼트 못지않은 놈들도 있습니다.”
그런 상위종의 오크는 던전의 지하 깊숙한 곳에 있다. 적어도 5층에서 만날 일은 절대 없으니 아직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먼 미래가 아닌 지금의 현실이다.
카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은 바람. 지금 내가 오크와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님의 그 특수한 능력을 감안해도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역시, 아직은 내가 약하다는 거군.”
“어디까지나 아직일 뿐입니다. 주인님은 반드시 강해지실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카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인 신체강화는 이 세계의 전사들을 기준으로 보면 오러 유저 하급에 달하는 능력이다.
몸속의 오러를 활성화 시켜서 신체 능력 자체를 몇 배로 끌어 올리는 능력.
보통의 오러 유저 하급이라면 오크 네 다섯 마리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만 카일은 아직 많이 부족했다. 능력의 발전도, 기술의 숙련도도 한참 말이다.
‘서두르지 말자.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꾸준하게 성장하면 돼.’
“그럼 마석을 챙기고 출발하도록 하죠.”
“그래. 그러자.”
카일과 검은 바람은 오크들에게서 나온 마석을 챙겼다. 오크 일곱 마리를 잡았는데 마석은 딱 두 개 나왔다. 하지만…….
“운이 좋군요. 바로 중급 마석이 나왔습니다.”
“20실버짜리군. 좋은데.”
오크들 중에 중급 마석을 주는 놈들이 가끔씩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첫 사냥감부터 이런 행운이 따라주니 기분이 좋았다.
“가죽이나 무기는 어떻게 할까? 지금 챙길까?”
오크의 가죽과 놈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돈이 되는 전리품이다. 다만 마석과 달리 부피와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게 문제였다.
“일단 챙겨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좋아. 그럼 가죽 벗기는 것 가르쳐 줘.”
“예. 알겠습니다.”
검은 바람은 능숙하게 오크의 가죽을 벗기면서 시범을 보였다.
“오크의 가죽 중에서 가장 넓고 질긴 등가죽만 벗기면 됩니다. 전신을 다 벗기는 건 오래 걸리죠. 우선 뒷목에 칼집을 넣고…….”
“흠, 그렇군.”
카일은 진지하게 보면서 검은 바람이 하는 것을 따라했다.
노예인 검은 바람이 있는 이상 그냥 다 시켜도 되지만 그래서는 곤란했다.
‘일단 검은 바람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다 할 줄 알아야지.’
첫 사냥에서 하급 마석 하나와 중급 마석 하나.
그리고 가죽 일곱 장과 잡철로 만든 무기까지 챙긴 카일과 검은 바람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 *
몇 시간 후.
“슬슬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 그렇군.”
카일은 다리가 후들 거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대답했다.
5층에서 사냥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5층의 오크들을 상대로도 검은 바람의 강함은 끄떡없다는 것이다. 최대 스무 마리의 무리를 발견해서 전투를 벌였어도 좁은 지형을 이용해서 압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카일이었다.
‘아직 오크는 무리라는 건가?’
초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모험가가 되고 나서 이제 두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 카일에게 오크는 버거운 상대였다.
일대일로 상대해도 버티는 게 고작이었고 둘 이상을 상대로는 1분도 버티기 힘들었다.
검은 바람이 적절하게 나선 덕분에 부상은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체력을 다 소진해서 목소리조차 가늘게 떨렸다.
검은 바람은 그런 카일의 상태를 알았지만 모르는 척 했다.
‘의지가 강한 분이다. 저 의지의 원동력이 뭘까?’
다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검은 바람이 보기에 카일은 모험가로서 성공하는 것에 굉장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저 성공을 바라는 젊음의 욕망이라고 보기에는 설명이 부족한 의지였다.
자신의 젊음을 돌려준 신비한 능력과 달리 지금 당장은 부족한 전투 능력. 거기에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 보여 주는 심상치 않은 집념.
오랜 세월을 살면서 많은 유형의 인간을 만나 본 검은 바람이었지만 카일은 좀처럼 단정 짓기가 어려운 타입의 인간이었다.
‘앞으로 모시면서 차차 알게 되겠지.’
검은 바람은 카일을 그냥 주인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자신을 무기나 도구로 취급하던 주인들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여기쯤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가?”
휴식을 위해서 검은 바람이 자리를 정했는데 그 곳은 미궁의 구석진 통로였다.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뚫려 있는 지형을 보고 카일이 말했다.
“여기보다 완전히 밀폐된 구석이 좋지 않아?”
“구석진 막다른 길의 경우 망을 보기에는 편하지만 여차할 경우 퇴로가 없습니다.”
“그렇군.”
“그보다는 인적이 드물고 사람들이 오지 않을 만한 구역의 길목이 가장 좋습니다.”
“알겠다. 그럼 여기서 쉬도록 하자.”
카일과 검은 바람은 배낭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건량과 말린 육포로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검은 바람이 말했다.
“먼저 주무십시오. 주인님.”
“알겠다.”
검은 바람은 카일에게 수면을 권한 후 자신은 잠자리를 지켰다.
경지가 높은 검은 바람의 경우 며칠 정도는 하루에 30분 정도만 수면을 취해도 버틸 수 있다.
단, 그렇게 할 경우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게 문제지만 5층의 오크들이 상대라면 딱히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라도 문제는 없었다.
덕분에 카일은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카일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검은 바람은 잠들기 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카일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잤지?”
“여섯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이런…….”
카일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오래 잤다고 생각했다.
‘던전 안에서 꿀잠이라니. 무슨 생각이냐.’
카일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빨리 깨우지 그랬나?”
“만만치 않은 전투로 인해서 주인님의 피로가 생각보다 심하십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카일은 검은 바람의 판단을 존중했다.
“이제 너도 쉬어라.”
“예. 알겠습니다.”
검은 바람은 벽면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대로 앉은 자세로 잠이 들었다.
‘빨리도 잔다.’
쉬라고 명령한 후 1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잠에 든 것 같은 검은 바람이었다.
저것도 혹시 무언가 고수의 능력이 아닌가 싶었다.
카일은 검은 바람이 잠든 사이 건량과 말린 과일을 물과 함께 씹어서 삼켰다.
그리고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면서 혹시 무언가 접근하지 않을지 살폈다.
다행이도 30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검은 바람이 잡은 이 장소가 굉장히 절묘해서 모험가도 오크들도 잘 오지 않는 좁은 길목이었던 것이다.
카일은 검은 바람을 깨우지 않고 조금 더 쉬게 하려고 했지만 검은 바람은 정확히 30분이 지나자 스스로 눈을 떴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인님.”
“잔 거 맞아?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거 아니야?”
“체력도 기력도 충분히 회복했습니다. 그럼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으음…….”
실제로 거뜬하다는 듯이 움직이는 검은 바람을 보니 찍소리도 안 나오는 카일이었다.
* * *
“취이이익! 취익!”
“합!”
푸우욱.
카일의 숏 소드가 날카롭게 오크의 목을 파고들었다. 순간 오크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전신에 힘을 빼고 푹 늘어졌다.
“후우우…….”
카일이 검을 거두며 숨을 정리했다.
그리고 검은 바람이 그런 카일을 보며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주인님.”
“검은 바람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쩐지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검은 바람의 뒤에는 수십 마리나 되는 오크들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그 말에 검은 바람은 인자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타인과 비교하기 전에 지난날의 자신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틀 전의 주인님은 오크 한 마리를 상대로 비기거나 간신히 이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뭐, 그거야…….”
“주인님의 성장 속도는 훌륭합니다. 제가 주인님의 나이 때는 이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아부 그만해.”
카일은 손을 들어서 검은 바람의 말을 멈추게 하고 오크의 시체에서 마석을 채취했다.
지난 사흘의 시간.
카일과 검은 바람은 미궁의 5층에 머물면서 열심히 사냥에 매진했다.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검은 바람, 지금 우리 수익이 얼마지?”
“마석만 치면 하급 마석이 서른일곱 개, 중급 마석은 다섯 개입니다.”
순수하게 마석의 수입만 해도 2골드 85실버였다.
“부산물은?”
“너무 많아서 다 챙기진 않았지만 오크 가죽이 스무 장, 그리고 놈들이 사용하던 무기 중에 상태가 좋아 보이는 것들로 열 개 챙겼습니다.”
“팔면 얼마나 할까?”
“부산물은 그때마다 시세가 다르고 흥정하기에 따라 달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단검 몇 개는 제법 상태가 좋아 보이니 이것만 해도 2골드는 넘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번에 5층에 내려온 최소한의 목적인 돈을 번다는 행위는 충분히 충족시켰다는 말이다.
“올라가시려면 이제 슬슬 좋을 때입니다. 식량도 절반 이상 떨어졌으니까요.”
“그래. 그럼 올라가자.”
그렇게 카일은 이번 던전 탐험을 여기까지로 결정했다.
좀 더 욕심을 내면 며칠 정도는 더 던전에 있을 수 있었지만 항상 그런 욕심이 위험을 부르는 법이다.
‘몸으로 먹고사는 직업에서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는 법이지.’
충분한 여유가 있을 때 물러나는 게 좋다는 것이 카일의 생각이었다.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은 카일은 최단 루트로 빠르게 지상으로 올라갔다.
중간에 몬스터들이 가로막기는 했지만 검은 바람이 앞장서서 불도저처럼 밀어 버리면 방해가 되지못했다.
사실 몬스터보다는 4층의 악취가 더 힘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상으로 올라온 카일은 가장 먼저 마석부터 정산했다.
“2골드 85실버다.”
“감사합니다.”
마석의 가격은 예상한 대로였다.
‘하긴 독점 매입이고 가격도 정해져 있으니.’
카일은 마석을 모험가 길드에 매입하고 바로 도구점과 대장간을 돌면서 부산물을 팔았다.
오크 가죽 스무 장은 개당 2실버에 팔려서 총 40실버의 수익을 냈다.
그리고 오크들에게서 수거한 무기가 제법 복잡했는데, 원래 오크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조잡한 경우가 많지만 개중에는 인간 모험자의 무기를 약탈해서 사용하는 놈들도 있다.
이번에 얻어낸 무기들 중에 몇 개가 그런 것들이었는데,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이 정도면 손해는 아니지.”
“아니 그래도 말이야. 날도 다시 세워야 하고 그밖에도 자잘한 수리를 해야…….”
“그럼 다른 곳에 가겠소.”
“아. 잠깐만, 알았네. 알았어. 그 가격에 매입하지.”
검은 바람이 앞장서서 흥정을 한 덕분에 열 점의 무기를 다 해서 3골드 50실버에 판매할 수 있었다.
“잘했다. 검은 바람.”
“운이 좋았습니다. 특히 상태가 좋은 무기라서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걸 알아채고 가격을 협상한 건 너다. 잘 했어.”
“감사합니다. 주인님.”
카일은 검은 바람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사흘 동안 던전에 들어가서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 고생의 열매는 달콤했다.
‘다 해서 6골드 75실버. 이러니 모험가가 고소득을 올린다고 하지.’
카일이 16년 동안 바이에른 공작가에서 알뜰하게 모은 돈이 14골드 정도였다.
그런데 모험가로 5층을 탐험함 결과 단 번에 7골드에 가까운 돈을 모은 것이다.
‘이 정도면 경제적으로 풍족까지는 아니라도 일단 적자는 면했지.’
소지금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던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