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질문을 받은 남자는 카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도시 외곽의 노역장에 가면 되오. 뭐, 구입할 돈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알겠습니다.”
쓸데없이 한 마디가 많은 상대였지만 카일은 그냥 무시하고 움직였다.
‘노예를 손에 넣는 게 우선이야.’
지금 카일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노예였다.
이 세계의 노예 제도는 실로 지독하다.
카일이 이 세계에서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음을 한탄하다가도 ‘그래도 노예로 안 태어나서 다행이야.’라고 위안을 삼을 정도로 노예들의 처지는 혹독하다.
노예에게 인권에 대한 존중이나 개인의 권리 같은 것은 일절 주어지지 않으며 그들은 절대 주인에게 항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노예에게는 종속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에 개발한 이 종속 마법은 그동안 수년 단위로 일어나던 노예 반란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그 어떤 거부권도 행사할 수 없으며 반항이나 도주도 불가능했다.
이 마법이 개발되고 나서 사람들은 노예를 더 혹독하게 다루기 시작했고 노예 제도는 거의 완벽하게 이 세계에 자리를 잡았다.
노예가 해방되려면 우선 노예들 스스로가 해방을 바라며 피를 흘리며 소리치고 싸워야 하는데 종속 마법은 그 근간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린 것이다.
카일이 자신의 능력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보안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는 인물만을 육성시켜야 했고, 그럴 수 있는 상대는 노예밖에 없었다.
“도시 외각의 노역장이라고 했지?”
카일은 조급한 마음에 걸음을 빠르게 했다.
* * *
도시 외곽의 노역장.
이곳은 도시의 건설이나 성벽의 보수와 상하수도 정비 등의 험한 막노동으로 인해 항상 인력의 수효가 끊어지지 않았다.
즉, 건장한 노예들을 팔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는 것이다.
“건장한 성인 노예가 10골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습니다.”
“튼튼한 하프 오크 노예입니다. 단 돈 15골드. 3년만 부리면 본전은 뽑고도 남습니다.”
“북방 토벌전에서 공수해 온 야만인 노예입니다. 아주 튼튼합니다. 말을 가르쳐야 하기는 하지만 몸 상태는 최상입니다. 단돈 7골드.”
여기저기서 노예 상인들이 노예들을 경매에 붙이고 있었고, 현장이 감독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그런 상인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카일을 그런 광경을 구경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내 생각보다 더 비싸.’
지금 카일이 가지고 있는 돈은 13골드 정도였다.
노예 하나를 구입하고 나면 대략 10골드 정도가 빠지는데 그렇게 되면 수중에 남는 돈은 3골드뿐이었다.
거기다 노예를 구입하면 그 노예를 먹이고 입히고, 또 던전에서 함께 싸우기 위해서 무장도 해야 한다.
거기에 들어가는 돈까지 생각하면 13골드는 절대 풍족한 예산이 아니었다.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해야 돼.’
카일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최대한 저렴한 가격의 노예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실컷 돌아다녀 봤지만 대부분의 노예는 10골드 수준에서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싸고 좋은 물건 같은 건 진짜 환상 속의 존재구나.’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돈을 더 벌지 않으면 지금 당장 노예를 구입해 봐야 유지하기도 벅찰 것 같았다. 그런데…….
“쿨럭, 쿨럭…….”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또 지랄이군.”
커다란 석재를 지고 나르던 늙은 노예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뒤에서 현장의 감독관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서 회초리를 내리쳤다.
“뒤지던가, 일어나서 일하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하란 말이야. 매일같이 골골거리면서 밥이나 축내지 말고!”
감독관이 거칠게 회초리를 내리쳤지만 늙은 노예의 입에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허 참, 독하군.”
“근성이 장난 아닌데?”
“저래서 북방의 야만인들이 인기 있는 거겠지.”
주변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수근 거렸다.
‘북방의 야만인? 그럼 저 노인은 투란의 인간인가?’
투란은 대륙의 북쪽에 있는 대초원을 지배하고 있는 유목민족이다.
그들은 말 위에서 태어나서 말 위에서 죽는다고 할 정도로 우수한 기마술을 가지고 있으며, 투란의 전사라고 하면 대륙에서 기사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그 강대한 군사력으로 대륙의 절반 이상을 휩쓸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몰락해서 북부에 소수의 부족으로 근근이 이어져 내려올 뿐이다.
대륙의 인간들은 혹시라도 투란이 과거의 위세를 되찾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토벌을 했는데 그렇게 토벌하고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만든다.
투란의 남자들은 하나하나가 억세고 강력하기 때문에 노예로서는 그 인기가 높았다.
저 노인도 지금은 오늘내일할 정도로 쇠약해졌지만 젊은 시절에는 드넓은 대초원을 질주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잠깐, 이건 혹시…….’
카일은 그 상황을 보고 한 가지 깨달았다.
‘저렇게 다 죽어 가는 노인이라면 저렴한 가격으로 흥정해서 구입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카일은 바로 매질을 하고 있는 감독관에게 가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뭐야? 무슨 일이냐? 이 애송이.”
“그렇게 치면 죽겠습니다.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카일은 어디까지나 동정심으로 이 사태에 끼어든 애송이인 척 연기를 했다.
그 연기가 제대로 먹혔는지 상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골 촌뜨기가…….”
그는 카일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꼬마야. 이건 노예다. 노예를 주인이 어떻게 다루든 그건 주인의 권리야.”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지 않습니까?”
“대도시에서 이런 일은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보기 싫거든 네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이나 파면서 살아라. 꼬마야.”
“그런…….”
카일은 수치스럽다는 듯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카일에게 감독관이 말했다.
“그렇게 불쌍하면 네가 이 노예를 사갈 테냐? 다 죽어가서 오늘내일하는 노예니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텐데 말이야.”
조롱 섞인 상대의 말이야 말로 카일이 기다리던 한 마디였다.
“제가… 제가 구입을 한다면 얼마에 파실 겁니까?”
카일은 크게 고심하다가 결심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자 감독관은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은 것처럼 눈을 빛냈다.
잘하면 다 죽어가는 늙은 노예를 시골뜨기한테 팔아 치워서 수익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구입한다면 5골드에 해주지. 이 가격이면 거저나 다름없다.”
‘사기나 다름없다는 말이 맞겠지.’
오늘 사면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노예를 팔면서 잘도 저따위 말을 하는 상대에게 기가 차는 카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표내지 않고 어디까지나 어리숙한 시골뜨기를 연기하며 말했다.
“5골드……. 그렇게 큰돈은…….”
그러자 감독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마까지 낼 수 있냐?”
“제가 가진 돈은… 이게 전부입니다”
카일은 수중에서 1골드짜리 동전 하나를 꺼냈다.
“하아아… 돌겠군.”
감독관은 실소를 하며 말했다.
“꺼져라. 시간만 낭비했군.”
“그런……. 알겠습니다.”
카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련이 남은 시선으로 노예를 바라봤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렇게 열 걸음 정도 걸어갔을 때…….
“잠깐!”
‘그렇지!’
감독관이 부르는 소리에 카일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길, 술값 정도는 되겠지.”
그리고 그는 카일에게 말했다.
“1골드에 팔아주마."
“정말입니까?”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사가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카일은 감독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서 1골드를 내고 노예를 구입했다.
“이쪽으로 와서 계약서에 네 피를 떨어트려라.”
“예. 알겠습니다.”
나중에 카일이 노예가 죽고 나서 돈을 돌려 달라고 할까 봐 그는 계약서를 정식으로 작성했다.
종속의 마법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상대가 서두른 덕분에 계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 제프리는 노예 검은 바람의 소유권을 카일에게 넘긴다.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그러자 계약서가 빛이 나며 종속 마법의 소유권이 카일에게로 넘어왔다.
“좋아. 이제 끝났다. 데리고 가.”
“예. 알겠습니다.”
카일은 이제 자신의 노예가 된 노인, 검은 바람이라는 이름의 노예를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났다.
‘좋아. 이제 시작이다.’
* * *
카일이 1골드에 구입한 노예 검은 바람은 이미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고령의 노인이었다.
카일은 우선 숙소를 잡았다.
“2인실 방 하나 부탁합니다.”
“알겠소. 뒤에는…….”
“내 노예입니다.”
“그렇군.”
여관 주인을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방을 내주었다.
방으로 들어간 카일은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거기 앉으…지.”
순간 존댓말이 나오려고 했지만 급하게 수정했다.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난다고 해도 노예와 주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는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일의 명령에 검은 바람은 반대편의 바닥에 앉았다.
바로 옆에 침대가 있는데도 굳이 거기에 앉는 것을 보면 그가 오랫동안 노예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일은 우선 검은 바람에 대한 신상을 캐묻기로 했다.
“이름이 검은 바람이라고 했지? 투란의 이름인가?”
“예. 그렇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낮은 톤에 굵직한 목소리였다.
“나이가 몇이지?”
“예순다섯입니다.”
“고향을 떠난 지는 얼마나 됐나?”
“30년 정도 됐습니다.”
“고향에서는 뭘 했지?”
“…….”
이제까지 막힘없이 대답하던 검은 바람이 처음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대답해라.”
거듭된 물음에 검은 바람이 체념한 듯이 말했다.
“한때는 부족의 전사였습니다.”
“전사였다고? 투란의 전사?”
“젊은 시절의 얘기입니다.”
“흐흠… 그렇군. 그렇다면 투란을 떠난 후에는 어떻게 지냈지? 전사 출신의 노예를 그냥 막노동이나 시키지는 않았을 텐데?”
검은 바람은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했다.
“검투사 노예로 5년 넘게 있다가 모험가였던 전 주인이 구입한 후 던전에서 전투 노예로 5년 정도 살았습니다.”
“호오… 그래?”
“예. 그러다 큰 전투를 겪고 몸이 망가진 후에는 광산을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광산이 폐광이 된 이후에는 농장이나 노역장 같은 곳으로 팔리다가 이 도시까지 흘러왔습니다.”
“그렇군.”
카일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억지로 억눌었다.
‘그래. 전사 출신이란 말이지.’
투란의 노예들은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말을 타고 무기를 다룬다.
카일 역시 그 점을 기대하고 검은 바람을 구입한 것이다.
하지만 전사 출신이라니?
제대로 된 전문가라는 말이 아닌가?
카일의 입장에서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심지어 검투사 노예로 5년, 그리고 던전에서 전투 노예로 5년을 살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 정도 세월을 싸우면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검은 바람의 실력이 보통 이상이라는 말이다.
거기다 던전에서 활동한 경력까지 있다면 더욱더 훌륭했다.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노예야.’
비록 몸이 망가졌다는 것이 문제지만 거기에 관해서라면 해결책이 있다.
그때 검은 바람이 카일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주인님이 저를 어째서 구입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아마 쓸모가 없을 겁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동정심이 있다면 제가 죽으면 제 고향의 법도대로 태워서 재를 바람에 날려 주십시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겁이 없다고 하던가?
노예가 주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검은 바람은 간 크게도 이런 말을 했다.
거기에 카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만 물어보지.”
“말씀하십시오.”
“만약 네 몸이 정상으로 회복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