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카일.
루트비안 자작의 서자인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도 마구간을 청소하고 있다.
자작의 아들이라고 해도 서자인 그의 대우는 평민만도 못했다.
성 안의 더럽고 힘든 허드렛일을 하며 억지로 연명해야 했고, 성의 고용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거기다 평소 어두운 성격과 남들과 거리를 두는 행동이 그를 더욱더 고립시켰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마구간을 청소하는 그의 표정에 미소가 서려 있는 것이다.
“드디어 내일이면 성인이다.”
카일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지난 16년.
그는 오직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자신이 성인이 되어서 이 자작령을 떠나서 독립할 수 있는 이 순간을 말이다.
카일.
전생의 이름은 KA―98746번.
전생에서 비참하게 죽었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을 때는 이 기적 같은 현실에 감사했다.
카일은 전생에 윤회나 환생은 믿지도 않았고, 신 따위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랬던 자신에게 다시 한번 인생을 시작 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했다.
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초능력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누리는 만큼의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처지는 썩 좋지 않았다.
우선 출신부터가 안 좋았다.
카일이 태어난 곳은 율리우스 왕국이라는 나라였다.
이 나라에서 카일은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다.
카일의 아버지인 루트비안 자작이 술김에 하녀를 안아서 태어난 것이 그였다.
그가 바라던 평범하고 제대로 된 가족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나도 평범한 가족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서자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루트비안 자작은 카일을 하인과 다름없이 키웠다.
거기다 유일하게 카일을 위해주던 모친은 카일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죽었다.
남들은 사고라고 했지만 카일은 알고 있었다.
자작의 본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남몰래 죽였음을 말이다.
실제로 루트비안 자작이 건드린 여자들은 한 둘이 아니었는데 그녀들은 전부 죽었다.
사인은 가지각색이었지만 혹시라도 본부인의 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작 부인이 죽여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자작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다.
왜냐하면 자작 부인이 여자들을 죽이는 타이밍이 절묘했기 때문이다.
자작의 총애를 받는 동안은 일절 건드리지 않고 묵인하다가 그 총애가 식는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처리해 버렸다.
이렇다 보니 자작은 부인을 탓하기는커녕 자신의 뒤처리를 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카일은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이번 생에서도 평범한 행복 같은 것은 바랄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큭… 큭큭큭…….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전생에는 인간 병기로 살다 죽었고, 이번 생은 노예나 다름없는 하인으로 살고 있다
이쯤 되면 오기가 생겨서라도 비참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카일은 계획을 세웠다.
이 세계의 기준으로 열여섯이 되면 성인이다.
루트비안 자작은 성인이 된 서자들은 돈 몇 푼을 주고 성 밖으로 독립시킨다.
말이 독립이지 자신의 치부가 될 수 있는 서자들을 추방시키는 것이다.
카일을 그날을 노리기로 했다.
스스로 성을 도망쳐 봤자 부랑자나 노예로 전락할 게 뻔했다.
적어도 공인받는 신분과 쥐꼬리만큼이긴 해도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16세가 되기까지는 참고 또 참으면서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
내일이면 카일은 16세가 된다.
“카일!”
마구간을 청소하고 있는 카일에게 집사가 찾아와서 불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주인 어르신이 찾으신다.”
“예. 알겠습니다.”
집사는 평민 출신이긴 하지만 영주의 측근으로 서자인 카일보다는 훨씬 더 신임받고 있었다.
그래서 카일은 항상 집사에게 비굴할 정도로 머리를 숙이고 지냈다.
집사도 그런 카일의 행동에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고 말이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카일은 당장의 굴욕을 참고 오직 먼 미래만 바라봤다.
눈앞의 소인배가 느끼는 사소한 우월감에 반발해서 자신이 설계한 큰 미래를 망칠 수는 없었다.
집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루트비안 자작의 서재였다.
“주인어르신. 데리고 왔습니다.”
“음, 들어오도록.”
그리고 카일이 집사를 따라서 안에 들어가자 루트비안 자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서재에는 큰 책장과 거기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장식품일 뿐이다.
책은 건드리지도 않아서 먼지가 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책 대신에 비싸 보이는 술병과 술잔이 놓여있었다.
‘대낮부터 한잔 했군.’
카일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자작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되기를 원했고 항상 누군가를 만날 때 서재로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카일은 알고 있다.
그가 사실상 문맹이나 다름없어서 편지를 읽을 때도 집사에게 읽게 하고 쓸 때도 집사에게 대필을 시킨다는 것을 말이다.
무식하고 허세만 넘치는 주제에 무책임하기까지 한 쓰레기.
그게 지금 카일의 아버지였다.
“부르셨습니까?”
공손하게 말하는 카일에게 루트비안 자작이 말했다
“그래. 네가 이제 나이가 몇 이지?”
“열여섯입니다.”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자작에게 카일이 겉으로 불쾌한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이제 성인이로군.”
카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예상대로라면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일이 생길 것이다.
툭.
자작은 카일의 발치에 작은 주머니를 던졌다.
“주인어른, 이것은 무엇입니까?”
카일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루트비안 자작이 말했다.
“독립 자금이다.”
“독립, 그 말씀은…….”
“떠나라.”
“그런…….”
카일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작은 냉정하게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 줬으니 내 역할은 다 했다. 이제 너도 알아서 살아가라.”
“꼭 그래야 합니까?”
“내 결정에 변복은 없다.”
‘번복이겠지. 이 무식한 새끼야.’
카일은 침통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돈 주머니를 집어 들고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음……. 그럼 물러나라.”
그리고 카일이 서재 밖으로 나가자 집사가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안에 짐을 싸서 떠나라. 내일 해가 떴을 때 영주성안에 있으면 크게 혼이 날 것이다.”
‘안다. 이 X새끼야.’라고 말하고 싶은 카일이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알겠습니다.”
이제 바라고 바라던 독립의 기회가 펼쳐졌다.
여기까지 와서 사소하게 울분을 풀고자 기회를 망칠 수는 없었다.
카일은 허름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자작에게 받은 주머니를 확인해 봤다. 거기에는…….
“X발, 고작 은화냐?”
주머니가 제법 묵직하다 싶어서 사실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은화 300개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300실버, 이럴 거면 그냥 골드로 세 개 주면 되잖아? 제길, 꼭 뭐 있어 보이려고 이 지랄이지.”
300실버면 일반 성인 가정의 두 달 생활비 정도다.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세상 밖으로 독립을 시키면서 주는 지원금이 고작 이거라니.
애당초 풍족하게 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이걸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미리 준비를 해놔서 다행이지.”
카일은 자기 방의 침대를 들어 올리고 그 밑에 숨겨둔 것을 꺼냈다. 그러자 금화 몇 개와 은화 몇 개가 보였다.
“13골드 80실버인가? 간당간당하다는 느낌이군.”
카일이 몰래 챙겨둔 돈은 그동안 자작가에서 없어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금액을 조금씩 용의주도하게 훔쳐서 만든 돈이다.
카일은 그 돈까지 모두 챙겨서 품에 넣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작별 인사 따위는 하지도 않고 최대한 빠르게 자작가의 저택을 떠났다.
저택 밖으로 나가서 외부 도시로 가는 정기 이동 마차를 잡았다.
“바이에른까지 얼마죠?”
“50실버. 탈 거요?”
“예. 언제 출발 하나요?”
“두 시간 후에 출발합니다.”
“알겠습니다.”
카일은 마차 삯을 내고 바로 올라탔다.
잠시 후 마차에 손님 몇 명이 더 타고 마차는 출발했다.
덜컹거려서 불편한 마차의 짐칸에 탄 카일은 점점 멀어지는 자작령을 보며 드디어 안도감을 느꼈다.
“하아아아…….”
전생의 34년은 세계 정부의 도구로 살았다.
그리고 이번 생의 16년은 쓰레기 같은 자작가의 하인으로 살았다.
도합 50년 만에 그는 지금 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을 누리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 속에서 카일은 속으로 되새겼다.
‘이제 시작이다.’
* * *
미궁 도시 바이에른.
이름 그대로 끝을 알 수 없이 거대한 미궁을 도시 중앙에 두고 발전한 도시다.
이 도시의 탄생 배경은 원래 군사 도시였다.
미궁에서 빠져 나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서 국가에서 군대를 주둔시켰다.
하지만 군대를 계속 투입해서 미궁을 관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속적으로 군비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미궁의 몬스터에게서 얻어지는 마석으로 수익을 올릴 수는 있었지만 군비의 주둔비가 너무 들었다.
결국 국가에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중에 한 가지가 모험가와 용병들에게 던전을 개방하는 것이다.
모험가나 용병들이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고 마석을 채집해서 수입을 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군비가 줄어들고, 국가에 마석을 꾸준하게 공급할 수 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돈을 위해서 몰려든 모험가나 용병들로 인해서 그들에게 장비를 팔기 위한 상인들이 몰렸고, 그런 상인들이 먹고 잘 수 있도록 여관이 만들어졌다.
자연스럽게 돈이 돌고 인구가 늘어났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나자 바이에른은 군사 요새에 거대한 상권을 지니고 있는 미궁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 대륙에 미궁을 성공적으로 관리하는 시범 케이스가 되어 여기저기에 바이에른과 비슷한 미궁 도시들이 생겼다.
하지만 가장 먼저 생긴 바이에른이 가장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미궁 도시였다.
그리고 카일은 새 출발을 하기 위해 바로 이 미궁 도시를 찾아왔다.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카일은 미소 지었다.
몇 주일 동안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불편하게 지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유와 희망.
이제까지 자신에게 없었던 이 두 가지 동기가 그를 무한하게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일은 그저 무작정 이 미궁도시로 상경한 게 아니다.
치밀한 계획과 함께 이 도시에서 성공 할 수 있다는 근거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미궁 탐사는 위험한 일이고 실력에 자신이 없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벌이가 짭짤한 괜찮은 일이라는 뜻이지.”
카일은 손안에 있는 작은 동전 하나를 주먹으로 힘껏 쥐었다. 그러자 카일의 손 안에서 구리를 주조해서 만든 동전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후후후…….”
카일은 찌그러진 동전을 보고 만족할 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에 환생하고 나서 여러 가지로 절망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자신의 초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지구의 학자들에 의하면 초능력은 3차 대전으로 인해 발생한 이상 기후로 인간의 DNA가 변이를 일으켜서 만들어진 능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몸으로 환생한 자신에게 초능력이 따라온 것일까?
그건 지구에서 학자들이 만든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뜻한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지만 말이야.’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순간부터 카일은 전생의 기억에 기초해서 초능력을 계속 수련해 왔다.
특수 능력인 육성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띌 우려가 있었지만 기초 능력인 염동력은 꾸준하게 수련했다.
이 힘들고 비참한 인생 속에서 유일하게 구원의 희망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비록 전생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힘을 되찾았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호리호리한 체형의 카일이지만 신체강화를 사용하면 근력의 몇 배나 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앞으로 신체 단련과 병행하면 초능력도 점차 강해지겠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전생에 자신을 세계 정부에서 위험인물로 지정했던 능력도 남아 있었다.
능력자의 육성.
이 능력을 잘만 사용한다면 카일은 이 세계의 정점에 올라서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을 막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강해지기도 전에 이 세계의 권력자들에게 자신의 힘이 들킨다면?
‘잘못하면 전생하고 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 아니, 분명 그럴 거야.’
이미 한차례 지독한 배신을 당해 본 카일은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 신중에 신중을 더 했다.
그래서 카일은 자신의 능력을 잘 살리면서도 보안을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이 세계에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었다.
카일은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말했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이오?”
“혹시 노예를 구입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바로 노예 구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