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태초에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 남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태초신, 절대신, 혹은 ‘창조신’이라고 불리는 남자.
고든.
왜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고든이 홀로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고든은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드넓은 우주, 천국과 지옥, 수없이 쏟아지는 은하와 별, 그리고 행성들까지. 행성들에는 저마다의 개성을 부여하고, 생명체를 불어넣었다. 마지막에는 작고 푸르른 아름다운 행성, 지구를 만들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름답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석찬은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지구의 생명체들이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하며 조금씩 문명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창조신 고든이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세상을 관찰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아름답게 피어난 창조물들을.
가끔씩 문제가 생기는가 싶으면, 그는 직접 만든 든든한 부하들을 세상에 보내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저자는….’
그중에서 익숙한 모습이 몇 보였다.
파괴신, 대지신, 천신, 마신 등, 라우르의 기억에서 본 기억이 있는 신들이었다.
‘신들마저 고든이 만들어낸 피조물일 줄이야.’
그렇다면 고든의 강함은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아니, 강하고 말고를 논하기 앞서 과연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지. 고든은 이미 죽었잖아?’
천계 중앙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채 발견된 고든. 왜,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이가 알지 못했다.
‘도대체 뭐야?’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신의 반란. 예정되어 있던 사항이었다. 현시점에 이르러 그는 마계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악마를 거느리며 천계와 대적하고 있었으니.
그는 감히 고든의 허리를 찌른 뒤 또 다른 피조물인 천사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아버지시여, 정녕 저 녀석을 가만히 두시려는 겁니까? 아버지의 권세를 위협하는 녀석입니다!”
파괴신이 고든을 향해 소리쳤지만, 고든은 그저 몸을 치유한 뒤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위치,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다.”
“아버지!”
“그리고, 녀석을 처단할 녀석은 따로 있다.”
“저 녀석을요?”
고든은 별들이 수놓아진 하늘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먼 훗날,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중에는 트로이, 지금의 네가 상상하지 못할 일도 있겠지.”
트로이. 처음으로 파괴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 이름은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내가 사라지고 난 후, 난세에 계승자가 나타날 것이야.”
“계승자?”
‘계승자?’
파괴신과 석찬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승자가 무엇인가? 90층 너머로 받은 히든 퀘스트에서 쭉 나온 키워드가 바로 계승자다.
“계승자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지만, 아직 계승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것에 대한 단서를 얻을까 싶어 귀를 바짝 기울였다.
“말 그대로다. 그는 내 힘을 물려받아 다음 시대의 왕이 될 것이야.”
“왕… 말입니까?”
예상보다 더 큰 스케일에 석찬이 놀란 사이. 불안에 찬 파괴신에게 고든이 한 마디를 건넸다.
“자격이 있는 자라면 그 누구든 계승자가 될 수 있을 거야. 너도, 아니면 부모를 찌른 못된 아들도, 그도 아니면…”
고든의 눈길이 저 아래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는 인간들을 향했다. 아직 문명의 발전이 덜 되어 조잡하게 엮은 돌도끼로 땅을 때리는 인간들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는 고든.
“저 인간들 중 한 명이 계승자가 될 수도 있겠지.”
“인간이요?”
“자격만 된다면 말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석찬이 알고 있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라우르의 등장, 천마대전, 그리고 고든의 죽음.
이렇게 보니 왜 파괴신이 그렇게 라우르를 미워하고 배척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그는 아마도 라우르를 계승자에 가장 가까운 자로 판단했던 것 같았다.
이후로 탑이 건조되고, 석찬 일행이 탑을 등반해 2차 천마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수 만 년에 걸쳐 이어지는 역사를 고작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훑어본 석찬의 앞에 하나의 형상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쭉 봐온 인자한 노인이 석찬을 향해 웃어 보였다.
“고든.”
[오랜만이구나.]
역시, 고든은 라우르의 기억에서 보았던 자신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우선은 너에게 주어야 할 것을 먼저 주도록 하겠다.]
고든이 손바닥을 펼치자, 작은 인장이 생겨났다.
“이건….”
[계승자의 증표다. 아마 밖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겠지?]
“그렇습니다.”
[너라면, 그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거다.]
“제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는 계승자니까.]
석찬은 고든에게서 받은 계승자의 증표를 들었다. 시스템 창은 작동되지 않아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나는 만물의 아버지이니.]
“그 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 만물의 아버지라는 분이 어떻게 살해당하신 거예요?”
그동안 쭉 궁금했던 것에 대해 질문하는 석찬에게, 고든은 한 가지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마신에게 등을 내준 고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이건….”
[원래 처음이 어려운 것이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저럴 줄 아예 몰랐던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
고든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자신의 시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저것이 순리이기에 따랐을 뿐이다.]
“그게 무슨….”
순리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다니? 그것도 세상을 만들어낸 창조신이?
[나라고 죽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 나 또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가 죽었기에 라우르가 천계에서 추방될 수 있었고, 덕분에 탑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탑이 없었다면 너와 너의 친구들은 탑에 소환될 일도 없었겠지.]
“오히려 좋은데요?”
그렇다.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인간들을 밑도 끝도 없이 탑에 소환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미친놈들이다. 신이란 녀석들은.
[전에 들었지 않았느냐. 그대로 가다간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은 못된 아들의 침공을 받아 멸망할 예정이었으니.]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탑이 있었기 때문에 너는 강해질 수 있었다. 지구에는 없는 마력을 얻었으며, 작금에 와서는 인간을, 어쩌면 신을 초월할 수도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넘실넘실 흘러넘치는 신마력을 보며, 고든이 미소 지었다.
[인간의 몸으로 신을 뛰어넘는 힘을 얻은 것, 그리고 나의 인정까지 받은 것까지. 너는 이제 계승자가 되기 위한 자격을 전부 갖추었다.]
계승자의 증표가 서서히 석찬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이건…’
계승자의 증표가 흡수됨과 동시에 석찬의 몸에서 전능감이 흘러넘쳤다.
[뭐,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스탯 상승 같은 기능은 없다. 그저….]
“그저?”
[겪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너와의 만남은 이것이 마지막이겠구나.]
“엥? 저기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당황하는 잠시. 고든의 몸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목숨이 다한 상태. 물론, 영혼체인 상태로도 영겁의 세월 동안 살아갈 수도 있지만, 내 핵심은 너에게 흡수된 상태다.]
아무래도 핵심이란, 계승자의 증표를 말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것. 내가 천국에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제는 머리와 몸밖에 남지 않은 고든. 그의 마지막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했지 않느냐? 전쟁을 끝내러 가면 되는 것이다.]
“그다음 말입니다.”
고든에게 받은 이 힘. 이것으로 전쟁을 끝마친다고 치자. 그렇다면 신들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다음을 모르겠다.
모든 일이 해결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석찬의 물음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을 뭐 하러 미리 생각하고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 보려구나. 너에게 허락된 시간은 무한하니.]
“쩝,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마지막이구나. 전대 창조신이자 절대신으로서, 잘 부탁한다.]
“옙, 편히 쉬고 계십시오. 나중에 한번 찾아나 뵙겠습니다.”
[오지 말고, 라우르나 잘 챙겨 줘라. 녀석… 나나 자식 놈 때문에 고생 많이 했는데.]
“알겠습니다.”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다시 한번 시야가 암전되었다.
‘여긴….’
석찬은 처음 있던 작은 공동으로 돌아와 있었다.
‘책이 사라졌다.’
처음 펼쳤던 책은 온데간데없었고, 온몸에는 힘이 흘러넘쳤다.
“스탯 창.”
[힘 : 2170 + 1085]
[민첩 : 2250 + 1125]
[체력 : 2310 + 1386]
[내구 : 2240 + 1344]
[마력 : 2600 + 1300]
고든의 말대로 스탯은 변한 것 없이 100층까지 올라오며 달성한 것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면.
‘한 번 해볼까.’
석찬이 눈앞에 세워진 거대한 기둥을 향해 정권을 날렸다.
쾅!
굉음과 함께 무너지는 기둥. 석찬이 손을 뻗자, 산산이 부서진 밑동에서부터 새로운 기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원래 모습을 되찾은 기둥을 보며, 석찬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되네.’
계승자의 증표를 받은 이후, 스탯 상승 대신 석찬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지식이 입력되었다.
다름 아닌 창조신 고든이 사용하는 스킬. 창조였다.
증표가 준 혜택은 이게 전부였지만, 이 스킬 하나가 그 어떤 스킬, 장비, 스탯보다 크고 위대했다.
‘창조. 이것 하나만으로도 전투 상황에서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어.’
게다가 석찬에게는 라우르에게서 전수받은 파괴의 힘까지 있다.
‘좋았어. 준비는 이쯤 하면 된 거 같고. 이제 한 번 가볼까?’
석찬이 전장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아, 맞다. 라우르.’
생각해보니 라우르가 같이 왔었는데, 아직도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디 보자.’
하지만, 신마저 초월한 감지 능력은 금세 라우르의 위치를 특정했고, 석찬은 공동을 벗어나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창조신의 힘 덕분인지 몰라도, 탑 내에서의 이동이 자유로웠다. 이제 층 이동 따위를 말하지 않고도 언제든지 층을 왕복할 수 있었다.
석찬이 선택한 곳은 그 어떤 곳도 아닌 바로 탑의 꼭대기.
탁.
천장을 넘어, 지붕 위에 안착한 석찬이 라우르와 눈이 마주쳤다.
벽 위에 걸터앉은 라우르는 끝없이 펼쳐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우르.”
“왔냐? 보니까… 힘은 잘 받은 것 같네.”
“아셨어요?”
“응. 고든 그 양반. 나한테도 와서 다 말해주더라고.”
“정말요?”
하긴, 창조신인 고든에게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랴.
“뭐, 혼자 있을 시간이라도 드릴까요?”
충격을 받은 건 아닐까 우려해 자리를 비키려고 했지만.
“염병. 헛소리 말고, 어디 다녀오기나 하자.”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겠어?”
라우르가 재차 위를 가리켰다.
“거길 먼저 들르게요?”
예상외라는 질문에 라우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우선… 기강을 먼저 잡아줘야지. 마신 녀석은 마지막이다.”
그 말에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첫 천계 행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