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96층. 인류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그 올가 파티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금단의 구역.
“내가 96층에 오르지 않았던 것은 단지 평화를 위한 조건 중 하나….”
뭐가 되었든, 석찬은 인간 중 처음으로 96층에 발을 딛게 되었다. 물론, 96층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것이 있지는 않았다.
천마대전 이후로 악마의 소굴이 되어버린 사냥터와 무너진 신전들, 그리고 빽빽하게 들어선 악마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
“인간이 이곳에?”
맨 처음 그를 본 악마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인간을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흥미로움과 자신감. 그리고 당장에라도 녀석을 죽이겠다는 살기.
그에 비해 석찬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단 하나였다.
즐거움.
“악마 7만 마리… 어떻게 잡나 했더니 이렇게 널려 있으면 오히려 땡큐지.”
90층의 악마들은 이미 씨가 마른 지 오래. 그런 상황에서 96층의 악마들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7만 마리의 악마를 전부 학살하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악마가 너무 적어.’
사실 적지는 않다. 문제는, 석찬의 악명을 들은 악마들이 그를 피해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사냥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천사였다.
‘천사는 아예 보이지도 않으니.’
석찬 일행의 놀라운 활약으로 90층은 악마는 물론 천사조차 이미 박멸이 완료된 상태.
히든 퀘스트는 7만의 천사도 추가로 요구했기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악마를 잡아대고 있었을까?
[오빠!]
귓가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등급의 마력을 다루게 된 이후 마법을 통해 견고한 통신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그녀였기에, 대화를 나누는 게 한층 더 수월했다.
[빨리 와봐요!]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무언가 초조해 보였다.
‘문제가 있는 건가.’
빠르게 그녀의 마력을 추적해보니, 주변에 끔찍한 기운이 하나 포착되었다.
‘적? 아니, 적의는 아니야. 그럼 대체 뭐지?’
일반적인 마력은 아니다. 신력은 더욱이 아니며, 천무진 같은 악마의 마력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살기다. 그것도 엄청나게 깔끔하게 정제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석찬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10년 만에 만난 제자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힘으로 흠씬 두들겨 팬 스승의 얼굴이 말이다.
‘설마….’
속도를 내 목적지에 도착하니, 역시나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보였다.
“알렉산더?”
“오, 왔냐?”
평소와 같은 호쾌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한 알렉산더. 문제라고 한다면 그가 있는 장소가 96층 한가운데라는 것 정도?
“알렉산더? 어떻게 이곳에….”
“어떻게긴 뭘 어떻게야. 퀘스트 깨고 왔지.”
“퀘스트?”
“악마고 천사고 그냥 싹 잡아다 족치니까 히든 퀘스트란 걸 하나 주던데?”
아무래도 알렉산더 또한 같은 퀘스트를 받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미 95층까지 공략이 완료된 상태였기에 퀘스트를 깨자마자 96층으로 바로 올 수 있던 모양이고.
“그런데, 괜찮아요? 분명….”
“아, 형 말이냐? 괜찮아. 이젠.”
그와 동시에, 알렉산더의 전신에서 흉악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저번부터 궁금했던 건데… 이건 대체.”
“이거 말이냐? 글쎄다.”
알렉산더의 설명은 이러했다.
마력 저장소를 잃은 후, 평소 자랑하던 무식한 살기를 가다듬게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
“허망함을 채우려고 한 건지, 아니면 그저 심심해서 그런 거지. 어쨌든 한 10년쯤 했나? 살기가 변하더라고.”
보통 살기란 것은 상대의 기세를 제압하는 용도로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애초에 사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달라진 살기는 특이하게 마력처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기에도 씌울 수 있고, 자체로도 흉악한 공격력을 지니게 되었지.”
쾅!
동시에, 바닥이 터져나가며 거대한 땅지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샌드 웜.
먼 옛날, 15층에서 만난 끔찍한 보스 몬스터였다. 게다가 크기도 그때 본 녀석보다 몇 배는 큰 것이 완전히 자란 성체인 듯했다.
“위험….”
콰직!
하지만, 알렉산더가 내뿜은 붉은 살기에 성체 샌드 웜은 제대로 된 힘조차 쓰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샌드 웜의 껍질의 강도를 생각하면 정말 경악할 일이었다.
“그 정도 힘이면….”
“이제 형이랑도 싸워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맞다. 우리 형님 봤지. 어떻든?”
“강했어요.”
“너보다?”
그 물음에는 고개를 젓는 석찬.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지금의 전 강하거든요.”
알렉산더 또한 석찬에게 내재된 힘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러면 그런 거겠지.”
“아버지, 1층의 상황은 지금 어때요?”
“어이고, 우리 딸. 당연히 이 아빠가 다 족쳐…가 아니라 날려버렸지!”
이브에게 한껏 무용담을 늘여놓는 알렉산더를 지켜보던 석찬. 그런 그의 머릿속에 어떠한 것이 툭 하고 스쳐 지나갔다.
‘잠시만.’
생각해보니, 천사가 찾아온 곳은 90층뿐만이 아니었다.
‘라우르도 그랬지.’
사냥 층들을 포기한 대신 마을 층들은 아직 천사가 남은 채 악마랑 대치 중이라고.
‘좋았어.’
“갑자기 웃어? 혹시 조증이냐?”
“아니요. 고마워요, 알렉산더.”
다음 목적지를 잡은 석찬이 감사 인사를 건네며 상황을 설명 후,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 이브 또한 일행에게 이 소식을 알린 뒤 그를 따라갔다.
그로부터 6일이 흘렀고, 석찬은 80층 마을까지 존재하는 모든 악마와 천사를 쓸어버렸다. 당연히, 전쟁은 끝이 났다.
과거 수년 동안 두 종족이 피 터지게 싸웠던 1차 천마대전과는 다르게, 2차 천마대전이 끝나기까지는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이 모든 게 석찬 일행이 이뤄낸 업적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지닌 힘은 더더욱 커졌고, 이제 석찬은 라우르와 비슷하다고 자부할 정도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를 포함한 몇 일행은 99층에 도달했고, 마지막 히든 퀘스트를 받게 되었다.
[히든 퀘스트 : 신 죽이기(최종)]
[내용 : 무수히 많은 천사와 악마를 학살한 당신. 이제 끝이 머지않았습니다. ‘계승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증명을 마치십시오.]
[신 처치(완료)]
[보상 : 계승자의 자격, 100층 해금, 천계 입장권]
“허.”
마지막 히든 퀘스트는 스탯 보상이 없었다. 대신, 천계 입장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계승자의 자격은 뭐지?’
99층까지 오며 대부분의 정보를 읽을 수 있게 된 석찬의 눈에는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의 진짜 이름이 보였다.
계승자.
무언가를 계승하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무엇을 계승할지 알지 못했다.
‘뭐, 곧 알게 되겠지.’
과거 천신을 죽였던 일 때문일까?
퀘스트는 지급되자마자 클리어 처리가 되었고.
[히든 퀘스트 : 신 죽이기(최종)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100층으로 이동하겠습니까?]
석찬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이브와 진현. 다른 일행들보다 먼저 함께 탑을 오르기 시작한 사이로, 한 명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절친이었고 한 명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왜 보냐? 뭐, 설마 퀘스트 클리어라도 했어?”
“응.”
“그치, 아무리 너라도 받자마자… 응?”
진현이 귀가 안 들리는지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다시 해왔다.
“맞다니까.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미친. 진짜 미친 새끼.”
“역시 오빠네요.”
이브는 별다른 말없이 그에게 질문을 한 가지 해왔다.
“바로 올라가실 건가요?”
“응. 미안, 기다리고 싶은데….”
계승자의 자격, 그리고 100층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우리도 최대한 빨리 올라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요.”
“그래, 인마.”
“너희들… 알았다.”
“스탑. 나도 같이 가자.”
갑작스럽게 나타난 라우르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씩 웃어 보였다.
“나도 궁금하거든. 대체 100층에 뭘 숨겨놓았는지 말이야. 그리고… 100층에 가면 뭔가 중요한 사실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석찬이 두 사람과 짧은 작별 인사를 한 뒤, 명령어를 외쳤다.
“층 이동, 100층.”
그와 동시에, 두 남자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마계.
화려하면서도 거대한 성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벽부터 지붕까지 온통 검게 칠해진 성 꼭대기, 건물 다섯 층 정도 높이의 옥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백발에 붉은 눈. 양 머리에 난 작은 염소의 뿔, 퇴폐적이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느낌이 드는 그는 마계의 1인자, 마신이었다.
“재밌군, 정말 재밌어.”
그는 무자비하게 악마 귀족들을 학살 중인 석찬의 영상을 보며 흥미로운 듯 웃어댔다.
“들어보니 저 녀석, 네 놈이 키웠다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옥좌 아래에 쭉 무릎 꿇고 있는 악마 후작 타르킨이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정도 가르치긴 했다만, 저렇게 끔찍하게 성장할 줄은 몰랐….”
말을 끝마치지도 않았건만, 타르킨의 머리가 사라졌다. 마신은 들었던 손가락을 빙글 돌려 타르킨의 시신을 불태워 버렸다.
“몰랐어도 책임을 져야지.”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옮긴 그가 석찬의 옆에 붙어 있는 라우르를 보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봤을 때보다 더 강해졌군. 그것도… 전성기 때 이상이야.”
영상이 재생되면 재생될수록, 마신의 입가에 흐르는 침이 늘어갔다.
“두 사람 다… 정말 맛있겠어.”
비틀린 입술 사이로 긴 혀가 날름거렸다.
“안 되겠군… 식사를 가져와라!”
그 말에, 상시 대기 중인 마신의 전속 요리사들이 준비해두었던 음식을 대령했다.
“음, 맛있겠어. 정말 맛있겠어.”
음식을 먹으면서도, 석찬과 라우르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마신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확 지금 먹어버릴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마신이 돌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조금만 더 숙성시킨다면… 더 숙성된다면… 훨씬 맛있어지겠지?”
쾅!
식기를 집어던진 그가 풀린 눈으로 소리쳤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하면, 먼 옛날처럼, 전부 취하는 것이다! 크하하하!”
광기로 가득 물든 그의 목소리가 마왕성 가득 울려 퍼졌다.
* * *
100층.
탑의 꼭대기에 도달한 석찬은 살며시 눈을 떴다.
100층은 다른 층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작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타 층과는 달리, 100층의 공간은 사람이 열 명만 들어가도 꽉 찰 법한 공동이 전부였다. 공동 중앙에 세워진 작은 거치대 위에 올려진 두꺼운 책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달까.
“라우르?”
라우르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어느 곳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석찬은 의문에 휩싸인 채로 천천히 책을 향해 나아갔다.
턱.
책은 그 어떤 잠금장치조차 되어 있지 않은 채 손쉽게 펼쳐졌다. 그리고 책이 펼쳐진 순간, 석찬의 시야가 밝게 점멸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