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잘 정돈된 백발과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지적인 느낌을 가득 풍기는 차분한 벽안. 얼핏 보면 그저 굉장한 미소년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절대 평범한 미소년 따위가 아니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천신.”
천신.
남자의 등장에 주변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천신이라…’
석찬 또한 라우르의 기억에서 그를 본 기억이 있었기에, 그에 대해 나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천신. 천계의 중재자.
전투에 미쳐 있는 호전적인 신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중재할 수 있으면서도 최선의 해답을 찾아내는, 어찌 보면 신들을 상대할 때 가장 까다로울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러면서 본신의 무력도 비전투 신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그런 자가 왜 자신들 앞에 찾아왔는지 몰랐지만, 우선은 경계하며 물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지?”
“제가 이곳에 찾아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말투는 온화하지만, 그 안에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살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석찬 일행도 평범한 일간은 아닐뿐더러 노골적인 적의를 멀뚱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팡!
일순간 일어난 살기의 폭풍이 천신의 몸을 쫙 훑고 지나갔다.
‘큭.’
적지 않게 당황한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조금 무례를 범했던 모양이군요. 사과하겠습니다.”
“조금이 아닐 텐데?”
“사과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천신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파괴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파괴신?”
라우르의 인상이 단박에 험악해졌다.
“크흡!”
영혼 조각을 전부 되찾으며 본래의 힘을 되찾은 라우르다. 게다가 이번 전투로 잃어버렸던 전투의 감각까지 전부 되찾았으니, 현재 그의 힘은 과거의 전성기 이상이었다.
실제로 천신은 조금 전, 석찬 일행의 살기를 맞은 것보다 훨씬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무슨… 이 힘은 그 시절, 아니 그보다 더….’
동공이 파르르 떨리는 그를 뒤로하며 석찬이 라우르를 물렸다.
“진정하시고,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죠.”
“컥. 가, 감사합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천신이 말했다.
“파괴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입은 피해가 큰 것은 맞지만, 반대로 얻은 이득도 적지 않으니.”
현재 석찬 혼자의 손에만 죽어 나간 천사의 수만 10만이 훌쩍 넘는다.
천계 입장에서는 괴멸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피해였지만, 그만큼 많은 수의 악마도 무로 돌려보냈으니, 이득을 본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은 불문으로 부치고, 지금이라도 천계의 편으로 오라. 그리하면 인간으로서는 누릴 수 없는 무한한 영광을….”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석찬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한 짓을 생각해봐.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그때, 쭉 가만히 있던 검은 도포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군. 아무래도 그 건방진 파괴신이라는 분께 본보기를 조금 보여줘야겠어.”
천무진. 한층 더 검어진 검을 치켜든 그가 붉은 살기를 내비쳤다.
“외팔이 주제에 건방지군.”
천신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아무리 전투 계열 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도 어엿한 신.
게다가 비전투 신 다섯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무력을 지녔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라우르도, 석찬, 높게 쳐줘서 뒤편의 은발 여인도 아닌 검은 머리 검사 따위가 나오니 가소로울 뿐이었다.
“무진 아재가 상대하게?”
“넌 또 무엇이냐.”
어느샌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검은 머리 투사. 진현이었다.
“나? 조금 전에 너랑 말하고 있던 놈 절친이다.”
“너라… 말이 짧군.”
“그러는 너도… 우왁!”
갑작스럽게 옆구리를 얻어맞은 진현이 바닥을 굴렀다.
“인간들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아주 건방져.”
“…….”
천무진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진현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천신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지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잔뜩 헝클어진 백발, 날카로운 눈매, 악귀처럼 흉악해진 인상, 전투 태세에 들어간 천신이 신력을 끌어올렸다.
파직, 지직.
스파크가 튀며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심해. 저 녀석, 전투가 특기는 아니어도 신이니까.”
석찬의 경고에, 천무진은 나지막이 물었다.
“네 녀석보다 강한가?”
“어….”
그 말에 석찬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스탯이 몇 배로 오르고 실제로 신과 마주해본 결과, 석찬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힘은 전투신 정도다.’
라우르나 파괴신 같은 천외천의 무력은 아니지만 천계의 최상급 전력 정도의 힘. 그것이 그가 지닌 힘이었다.
고로, 전투신도 아닌 천신 따위가 비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석찬이라는 사람은.
“아니.”
“그럼 됐다.”
쿠오오.
시커먼 악마의 마력이 온몸을 뒤덮었다. 천무진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악마의 졸개였나. 더럽군.”
“더러운지 아닌지는 부딪혀보면 알겠지.”
“필멸자 따위가!”
쾅!
신과 인간이 전투를 시작했다. G와 에피르는 전투의 여파가 새지 않게 보호막으로 둘을 감쌌다. 석찬은 전투를 관찰하며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엘리가 봤을 때 어때?”
“무엇이요?”
“누가 이길 것 같아?”
“흠….”
엘리자베스는 말없이 검을 휘두르는 천무진을 바라봤다.
콰광! 콰직!
천신이 일으키는 번개마저 갈라버리는 그의 검격은 신의 육체에도 조금씩 대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건방진… 하찮은 인간 따위가 신에게 맞서려 들어!”
천신은 예상치 못한 분전에 분노한 듯 소리를 지르며 다시금 번개를 불러냈다. 천신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 그는 하늘이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자연 현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전투신은 아니었지만, 전투신에 가장 가까운 전력. 하지만, 인간 천무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악마 공작이자 일곱 권능의 소유자인 엘리자베스에게서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마력, 수년이 흘러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닌 악마의 그것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게다가 이번 전투로 스탯까지 폭발적인 상승을 거쳐 오히려 천신의 힘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약하군. 네 녀석은.”
“큭.”
어느새 구름을 베고 천신의 목에 검을 겨눈 천무진이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이미 결판이 난 것 같네요.”
싱긋 웃는 엘리자베스는 통쾌하면서도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쿡.
1cm쯤 파고든 검날에 피가 묻어나왔다.
“네 녀석… 파괴신께서 가만….”
천신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천무진은 들어줄 가치도 없다는 양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의 목을 완전히 꿰뚫었다.
명성에 비해 상당히 허망한 최후였다.
“많이 강해진 건 알았지만, 이 정도라니… 재밌네요.”
“엘리자베스라고 했나. 잘 키웠는데?”
어느새 옆으로 온 라우르가 재로 변하는 천신을 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제자를 키우고, 성장을 지켜본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건 줄 몰랐어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저 녀석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어.”
서로의 제자를 보며, 스승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천신의 사망 소식은 빠른 시일 내에 천계 전역은 물론 탑 내부에도 퍼져나갔다.
신이 죽었다.
하늘로만 여겨지던 존재의 죽음은 일파만파 퍼져나가, 신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저층지대에조차 소식은 큰 영향을 끼쳤다.
‘신이 있었어?’
신이 존재했다는 것을 몰랐다고 치더라도, 신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이름값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신을 죽인 사람이 누구라고?’
당연하게도, 석찬의 이름값 또한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변수군.”
파괴신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천신을 보낸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전언을 전하기 위함. 절대 싸움을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천신의 돌발행동으로 애꿎은 신이 하나 죽어버렸다. 안 그래도 석찬 일행으로 인해 피해가 컸던 천계 입장에서는 비보도 이런 비보가 따로 없었다.
담당하는 영역만큼이나 드높은 자존심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뼈아픈 실책이었다.
‘제길.’
게다가 악마 진영에도 이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니, 천신의 죽음을 들은 녀석들이 얼마나 기세가 오를지도 불분명했다.
‘어쩔 수 없군.’
결심한 듯한 파괴신이 어디론가 향했다.
덜컹.
긴 복도를 걷고 걸어 낡은 문을 열자, 거대한 방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구, 갑옷, 검, 창, 도끼, 등등, 수많은 보구들이 방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하지만, 파괴신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주지 않고 오로지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곧 그의 앞에 수정구 하나가 나타났다. 평범한 수정구와는 다르게, 내부가 오색으로 빛나는 특이한 수정구였다.
‘젠장. 이것을 쓰게 될 줄이야….’
수정구를 사용하기 싫었다는 양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본 파괴신이 마지못한 얼굴로 투명한 수정구 위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수정구 안에 작은 회오리가 생성되더니, 오색깔이 전부 한데로 뭉쳐 섞였다. 잠시 후, 그의 앞에 한 남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저 잔상에 불과하지만 파괴신마저 경계할 만한 힘을 가진 남자, 절대신 고든이었다.
‘젠장. 이래서 쓰기 싫었던 건데.’
라우르를 쫓아낸 이후, 파괴신은 부단히도 노력했다. 벽을 넘었을 때, 그는 전성기의 라우르마저 뛰어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고든의 잔상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직 미치지 못해.’
무력감이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껏 고든의 힘이 담긴 수정구를 사용하기를 꺼려왔던 이유이기도 했다. 다시는 약하다는 무력감을 느끼기 싫어서.
‘하지만.’
파괴신은 실리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 천계는 사상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고든의 형상이 무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을 쓴다는 것은, 천계가 크나큰 위험에 빠졌다는 것이겠죠. 라우르는 이걸 쓸 인물이 아니고, 파괴신이신가요?]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나 보군요. 제 2차 천마대전.]
‘뭐…?’
고든은 삼천 년 전 죽었다. 이번 전쟁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아마 궁금하겠지요. 저는 이미 셀 수도 없이 오래전 죽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도 말이지요.]
‘뭐라고?’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도 안다니.
“어떻게 말이지?”
무의식적으로 질문했지만, 잔상만 남은 고든은 녹화된 영상을 재생하듯 자신이 할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래도, 저는 천계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힘을 빌려드리죠.]
그 말과 함께, 파괴신의 앞에 구슬 하나가 떨어졌다.
“이건…”
[구슬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 안에는 제가 온 힘을 다해 창조한 정예 천사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아마 전세를 바꾸는 데에는 충분할 겁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준비해 두었죠.]
‘이런 것 마저 준비해두고 있었다니.’
세삼 고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는지 깨닫는 파괴신.
[그렇다면 가십시오. 가서, 천계를 유지시키십시오.]
고든의 형상은 직후 완전히 굳었다. 무언가 더 있을까 싶었지만, 10분째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이것이 전부인 듯싶었다. 파괴신은 구슬을 챙긴 채 방을 벗어났다.
쿵.
그런데 문이 닫힌 뒤 홀로 뜬 고든 형상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들 모든 것은 계획된 대로.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파괴신.]
그는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강석찬… 그 인간에 의해 말이죠.]
길고 긴 하루가 흐르고 아침이 밝았다. 석찬은 96층에 도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