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오만의 발록.
분노의 벨리아스, 질투의 엘리자베스와 더불어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일곱 권능 중 하나를 가진 최강의 악마 공작.
그런 그의 허망한 최후를 지켜본 악마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발록 님이?”
저마다 내뱉는 경악성은 다 달랐지만, 눈동자에 새겨진 공포는 전부 같은 곳을 향했다. 바로 발록을 손쉽게 잡아버린 인간, 강석찬.
“어떻게 인간이….”
“잠시만, 저 녀석… 들어본 적 있다. 분명 레벨리온 남작 각하가….”
그 와중에 석찬을 알아보는 악마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저 인간이었나? 그때 들은 것에 비해….”
“더 강하다고? 맞아.”
“어, 어느새….”
순식간에 상급 악마 앞에 나타난 석찬이 녀석의 명치를 가격했다.
콰직!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산화된 악마가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네 녀석, 더러운 천사의 편이냐?”
“아니?”
석찬이 최상급 악마의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주며, 맞은편에 있던 천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네 녀석은 대체….”
“기대하지 마. 어차피 너희들은 여기서 전부 죽을 테니까.”
석찬이 발록을 잡을 때 사용했던 신마력을 재가동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끔찍한 기운이 최상급 악마의 발끝을 타고 등골까지 전해졌다.
“크윽!”
남작급 악마에 준하는 힘을 가진 악마답게 공격에 반응해 보려고 했지만, 터무니없는 시도였다.
후우웅!
그저 풍압에 불과했지만, 신마력이 일으킨 마력의 폭풍은 수백의 악마와 천사를 쓸어버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일행들도 어지간한 악마나 천사 따위는 일격에 처리했으며, 중상급 다수나 남작급 이상의 고위 전력이 출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석찬 일행을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얼마나 치고받고 싸웠을까? 석찬의 눈앞에 메시지 창 하나가 출력되었다.
[10,000마리의 악마를 처치하셨습니다.]
[10,000명의 천사를 처치하셨습니다.]
[퀘스트가 변화합니다.]
각각 1만씩 도합 2만. 인간으로서는 이뤄내기 힘든 업적을 이뤄낸 결과는 퀘스트의 예상치 못한 변화로 이어졌다.
[히든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히든 퀘스트…?’
탑에서 족히 15년 이상을 살아온 석찬이었지만, 히든 퀘스트를 받아본 적은 기나긴 탑생 중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샌드 웜 잡기.’
‘히든’이라는 키워드가 붙은 만큼 클리어 조건도 무지막지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어마무시하다. 샌드웜을 잡고 보상으로 받은 샌드웜의 가죽 주머니를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이건….’
하지만, 이번 히든 퀘스트의 내용은 석찬마저 감히 예상하기가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히든 퀘스트 : 신 죽이기]
[내용 : 1만의 천사와 1만의 악마, 당신은 ■■■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을 증명해냈습니다. 계속해서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천사 처치 20,000(미완료)]
[악마 처치 20,000(미완료)]
[보상 : 연계 퀘스트, 모든 스탯 100 업, 상위층 해금]
“뭐?”
천사와 악마를 2만 마리를 학살하라는 클리어 조건은 뒤로하고, 내용과 보상이 심상치 않았다.
‘■■■?’
필터링이 되어 있었다. 90층에 올라선 만큼 어지간한 정보는 전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이것만큼은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보이지 않았다.
‘보상도 엄청나.’
연계 퀘스트를 제외해도 모든 스탯을 100씩 올려준다니? 게다가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까지.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을 지닌 퀘스트가 과연 존재할까?
“좋아, 다 뒤졌어.”
석찬이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것은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그의 손길에 새겨진 신마력이 우악스럽게 변화했다.
“히익….”
그 모습을 본 천사와 악마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인간보다 몇 배, 몇십 배는 강한 상위 종족이지만, 그들의 본능마저도 울부짖고 있었다.
당장 저 미친 학살귀를 피해 도망쳐라!
하지만, 이미 목표를 지정한 석찬이 그것들을 놓칠 리가 없었다.
하루가 지났을 때, 석찬은 95층까지 입장할 수 있게 되었다. 사냥이 계속될수록, 석찬의 집중도는 높아져만 갔고, 사냥 속도는 끝을 모를 정도로 빨라졌다.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추가로 오른 500개의 스탯. 스탯의 종류가 5개이니 총 2,500개의 스탯이 올라 몸을 다루기 힘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투에 몸은 알아서 새로운 스탯에 적응해갔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보상으로 오른 스탯 외로도 모든 스탯이 전체적으로 향상되었다.
‘설마 탑에서도 스탯을 성장시킬 수 있게 된 건가?’
원래 탑에서는 마력을 제외한 그 어느 스탯도 성장시킬 수 없었다. 오직 스탯 포인트를 투자하는 것이 전부였다. 노력으로 스탯을 올릴 수 있는 것은 마계뿐.
하지만.
‘레벨도 포인트도 오류가 나더니 이렇게 된 건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계에 갔던 것이 또 하나 좋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스테이터스.’
[힘 : 1490 + 745]
[민첩 : 1575 + 787.5]
[체력 : 1630 + 978]
[내구 : 1550 + 930]
[마력 : 1910 + 955]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날 정도로 궤를 달리하는 수치였다. 스탯 하나하나가 2,000을 가볍게 돌파한 인간이 있을까?
‘이 힘이라면….’
드레이븐 일행을 도시에 상대하는 것을 넘어, 알프레드 올가가 와도 금세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종국에 든 생각은.
‘지금이라면 신들도….’
라우르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신들. 처음에는 범접 불가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인물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거겠고.’
석찬이 주먹을 꽉 쥐며 위를 바라봤다.
‘더, 더 높이 가야 한다.’
100층. 그 너머에 있는 신들한테까지 닿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더욱 강해져야 했다.
‘싸움을 해볼 만한 정도여서는 안 된다.’
압도, 그것을 넘어서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함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부여받은 히든 퀘스트는 이에 부합하다 못해 석찬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사흘, 아니지. 이틀 안에 100층을 뚫는다.’
히든 퀘스트에서 이어진 연계 퀘스트는 보상은 그대로인 채 본래 퀘스트에 천사와 악마 처치가 1만 마리씩 더해져 갔다.
95층을 돌파한 시점에서 받은 퀘스트는 천사와 악마를 각각 6만씩 잡으라고 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탯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석찬에게 있어서 그들은 맛있는 먹잇감일 뿐이었다.
‘좋았어.’
무한히 펼쳐진 성장 가능성을 앞에 두고 만족스러워하는 석찬의 앞에, 한 여인이 다가와 섰다.
“이브.”
“그새… 더 강해지셨네요.”
“하하, 그랬지.”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자, 그녀 또한 밝은 미소로 응대했다.
“이러다가 정말 신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거리감 생기려고 해.”
그렇게 말하는 이브마저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는 강자였다. 게다가 그녀를 포함해 악마와 천사를 모두 사냥하는 일행들 전원 같은 히든 퀘스트를 얻었다는 모양이었다.
물론 석찬의 것처럼 터무니없는 숫자의 사냥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1천에서 많게는 5천. 이 퀘스트로 그들 전부 두 개의 층 이상을 올라섰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90층 이후부터는 십여 년이 지나도 층을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공식적으로 탑이 개척된 층은 95층에 불과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루 만에 두 개의 층을 오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질투가 나 미칠 것이 분명했다.
물론, 다섯 개의 층을 오른 석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오늘 전투로 그의 무력 또한 사람들의 눈에 정확히 각인되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몇십 배는 앞서는 공적,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학살하는 무시무시한 성정, 그리고 공작급 악마마저 홀로 토벌하는 그는 이미 새로운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석찬 일행은 이 모든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투로 지친 몸을 회복한답시고 전부 G의 검은 공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오빠는 라우르 님과 비교해서 어때요?”
이브의 물음에 석찬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아직은 라우르가 위. 만약 히든 퀘스트를 100층까지 클리어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누가 내 얘기 하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라우르가 하품을 쩍쩍하며 나타났다.
“라우르.”
“아이고, 그사이에 얼마나 더 강해진 거야?”
라우르 또한 이번 전투에서의 공이 석찬 못지않았다.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천의 악마가 쓸려나가는 모습에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다.
“바쁘지 않아요?”
그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었는데, 성정상 그들을 내치지 않고 질문마다 하나하나 전부 대답해주고 있었다.
“몰라? 다 가던데? 속보라면서.”
“속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뭐, 내가 인간이 아니고 신이라는 거 정도?”
“…….”
하긴, 저 사람, 아니 신은 원래 저런 신이었다. 진중해 보이는 것도 싸움뿐, 그 외에는 애나 다름없는 것이 바로 전 투신 라우르.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또 한동안 시끄러워지겠네.”
“뭐 어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닐 텐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때, 라우르가 드물게 진지한 투로 말했다.
“이제부터 매일매일 살아남기 바쁠 텐데, 그깟 신 하나가 중요하겠어?”
“……”
그의 말이 맞는다. 석찬 일행의 엄청난 활약으로 피해가 없어 보이는 것뿐이지, 사실 수십만의 악마와 천사가 싸우는 와중에 피해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G 녀석이랑 알아본 결과, 90층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닌 모양이구나.”
“그 말은….”
“아래층들은 이미 악마와 놈들이 풀어놓은 몬스터로 가득하고, 마을만 천사들이 투입된 모양이야.”
“필드가 전부 뚫린 건가요?”
“그래. 녀석들. 준비를 단단하게 하고 온 모양이야. 게다가… 모든 녀석들이 뭉쳐서 움직이고 있어. 개인주의에 찌든 녀석들이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꽤 난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
마계의 시간은 그저 수행의 특수성만 지닌 것이 아니다. 몇십 배는 느리게 흘리는 시간에서 탄생하는 무수한 생명체들.
개개인의 무력은 천사가 더 강할지 몰라도, 숫자는 감히 천사 따위가 비할 바가 못 된다.
“라우르 님, 혹시 1층의, 아버지의 상황을 아시나요?”
이브가 초조한 눈빛으로 물었다. 알렉산더가 걱정되는 것은 석찬도 매한가지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 안 그래도 조금 알아봤는데, 그곳은 멀쩡한 모양이야.”
“하아….”
이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내가 인정한 두 번째 인간이니까. 그리고 그 녀석 걱정하기 전에 네 녀석들 걱정이나 먼저 해라.”
라우르가 경고하듯 말했다.
“오늘 그렇게 깽판을 쳤는데 녀석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 히든 퀘스트가 뭔가, 빨리 클리어 하는 게 좋을 거야.”
충고는 그게 끝이었다. 길지 않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라우르가 말한 대로 한 남자가 석찬을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