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가끔씩 내 허락도 없이 몸을 사용하기도 하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미쉘은 마치 자신의 사고가 정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사용한다고? 신이?’
“신은 멋대로 제 화신의 몸을 사용할 수 있다.”
확인 사살과도 같은 다음 말에, 미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멋대로 몸을 사용했다고? 언제부터? 처음 대장이 화신이 되었을 때부터?’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진짜 알프레드의 말이고, 어디까지가 파괴신의 말이란 말인가?
고작 두 문장에 불과했지만 미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데는 충분했다.
“정말… 싸울 건가요?”
조심스레 다가오는 이브를 향해, 미쉘이 팔을 뻗어 제지했다.
“잠시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줄 수 있을까?”
“…알았어요.”
바로 옆에는 석찬과 알프레드가 정말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고, 미쉘은 마법으로 다 쓰러져 가는 카페 건물을 보호하면서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다스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녀가 눈을 떴다.
‘그래, 이렇게 있는다고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아. 우선…’
“그래, 그거다!”
오랜만에 대등한 상대를 만나 신이 났는지, 알프레드가 더욱 거세게 석찬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상대는 오랜만이구나!”
“겁나 세네, 아저씨!”
콰광!
신마력과 강마력이 부딪치며 거대한 번개가 얼마 남지 않은 천장을 갈랐다.
‘큭.’
욱신거리는 팔을 털어내며, 석찬이 눈을 좁게 떴다.
‘괴물.’
알프레드에게는 그 외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강마력, 알렉산더가 고안해낸 그 힘은 마력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지만, 신마력에 비해 한 수 아래인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파괴력만을 따졌을 때 알프레드의 강마력은 석찬의 신마력에 비해 꿇릴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조금 앞서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단해.’
수십 년의 관록이 느껴지는 동작 하나하나를 두 눈에 담으며, 석찬은 천천히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걸로는 부족해.’
마검 카세타쥬를 주먹으로 상대하기 꺼려진 직후, 마력 무기를 생성해내 싸우던 석찬이었다.
‘강도를 더 높인다.’
그의 손에 들린 신마력 검이 점점 예리해지고, 또 단단해졌다.
“그새 성장하는 거냐? 괴물 녀석.”
“누구보고 괴물이래!”
콰직!
강도를 한껏 올렸음에도 한 번에 박살 나는 신마력 검을 다시 재생한 석찬이 몇 번이고 일격을 받아냈다.
공방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검은 점점 단단해지더니 한 번, 두 번, 조금씩 알프레드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이대로는 녀석의 성장을 도와주는 꼴만 되겠군.’
점점 줄어드는 마력도 슬슬 아껴야 할 타이밍이라고 판단을 마친 알프레드가 공격 대신 회피를 선택했다.
‘빈틈을 노려 한 방에 끝낸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도약하려는 찰나였다.
파밧.
무언가가 그의 몸을 꽁꽁 휘감았다. 그것은 단단한 나무줄기였다.
촤자작.
게다가 그 위로 빙결 마법까지 더해지니 어지간한 힘으로는 풀지 못할 속박 마법이 완성되었다.
“미쉘?”
알프레드가 자신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고 있는 미쉘 그레이스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지금 싸울 때가 아니에요, 대장.”
“싸움을 방해하려고 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는다.”
쩌적, 쩍.
어중간한 힘으로는 풀 수 없는 속박이었지만, 알프레드는 어중간한 남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강마력까지 두른 상태였기에 금세 마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장, 아니 알프레드.”
“…왜 그러냐, 미쉘.”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미쉘에 알프레드가 힘을 풀고 그녀를 쳐다봤다.
아무리 싸움에 미친 그라도 알 건 알았다. 미쉘이 자신을 대장이 아닌 이름으로 부를 때는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이니.
“아까 전에 대장이 한 말, 제대로 설명을 들어야겠어요.”
“무슨 말.”
“몸을 조종한다는 거 말이에요. 제대로 설명이 가능할까요?”
“고작…이라고 말하기에는, 꽤나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군. 알았다.”
알프레드는 잠시 석찬과 미쉘을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주신은 화신에게 접신할 수 있다. 하지만 라우르가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화신의 동의 없이 주신이 마음대로 접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정말이에요?”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라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악질인 신은 자신의 화신을 이용해 마음대로 지상을 활보하기도 하지.”
그를 본 알프레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라우르, 전 투신이라고 하셨습니까? 파괴신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뭐래디?”
“너무나도 작은 혼잣말이라 제대로는 못 들었지만, 녀석 정도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자주…”
쾅!
이어지는 주먹질에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내 기술이고 뭐고 다 베껴간 주제에 뭐?”
“라우르, 진정하시고. 마저 들어야죠. 그래서…”
“파괴신께서 내 몸에 강신하시면 나는 줄곧 기억을 잃곤 했지.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는 알아차렸지만, 그것이 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어.”
“왜? 알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알프레드는 어느새 전부 몰려와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왜긴 왜겠어, 그가 막았으니까. 주신의 명을 들먹이면서.”
“그러는데 가만히 있었다? 찜찜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고?”
“들긴 했지.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 주신의 명을 거역하면 화신은 막대한 페널티를…”
“어떤 페널티였죠?”
미쉘의 압박 질문에 알프레드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하 거래 내용을 파기한다고 했다.”
그제야 파괴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당한 거래를 통해 말이지.’
“그래, 거래. 처음에 그를 주신으로 받아들일 때 조건을 몇 개 걸어뒀는데, 그게 없으면 곤란해서 말이야. 미쉘… 네 얼굴을 보니 생각보다 더 심한 일들을 저질렀나 보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말을 왜 안 했던 거예요?”
“그거야 거래 때문에…”
“라우르, 우리는 그런 거 없었잖아요?”
“말했잖아. 저런 건 악질들이나 사용하는 인질극이라고. 파괴신 새끼, 저 정도면 갈 데까지 갔는데?”
파괴신의 험담을 까는 사이에, 한 여인이 알프레드를 향해 다가왔다.
“너는…”
은발에 은안을 가진 여인을 본 알프레드의 눈이 커졌다.
“그래, 네가 녀석의 딸인가.”
“아버지 보고 녀석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래, 네가 알프레드의 딸이냐?”
“전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저희 아버지에게, 왜 그랬던 것이죠?”
이브의 질문에 알프레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왜 말씀을 못 하시죠?”
“잠시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들릴 테니까.”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왜 아버지를 배신했는지.”
그 말에 알프레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우선, 한 가지만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건 배신이 아니다.”
“뭐라고요?”
“뭐, 배신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 둘의 뜻이 달랐던 것이니… 그때의 우리는, 지쳐 있었다.”
“그 말은 많이 들었어요.”
“그럼 이야기가 편하겠군. 너 그리고 거기 꼬맹이들까지, 탑을 오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지?”
알다마다.
석찬 일행이 괴물 같은 속도로 탑을 올랐다고 한들, 그 과정에서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석찬 또한 전신의 가호로 육신의 피로는 상당 부분 덜었을지언정, 정신적인 피로까지는 꼬박꼬박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때의 알렉산더는… 정말이지 열정이 넘쳤어. 우리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지. 그에 비해 우리는… 죽을 맛이었지.”
94층, 95층을 연이어 오르면서 쉰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네가 아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사람을 10년 내내 휴가도 거의 보내지 않으며 굴린 것이다.
무슨 심정인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알렉산더 그리고 그의 부하들을 완전히 재기 불능으로 만든 것에 대한 분이 풀릴 정도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었다.
“물론, 나도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다. 딸과 제자의 입장에서 내가 미운 건 당연할 테니까. 그저, 우리 상황이 이랬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했던 거다.”
“…….”
“분이 안 풀린다면… 쿠엑!”
콰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폭발에 튕겨 나간 알프레드가 세 바퀴 굴러 넘어졌다.
“이브….”
“일단 이걸로 만족할게요. 그렇다고 용서한 건 아니에요.”
“용서는 바라지도 않았어. 너에게도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못 하겠다.”
미쉘은 일전에 몇 번 보았던 그리운 표정을 짓더니, 알프레드에게로 다가갔다.
“그래서 알프레드, 깨어 있는 거 아니까 그만 누워 있고, 빨리 얘기해봐요.”
주제가 다시 파괴신으로 돌아왔다.
“뭐, 딱히 더 없어. 파괴신이 계속 나 몰래 내 몸으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모양인데,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 때문에 너희에게 짜증스럽게 굴었던 적도 많았던 것 같고.”
“항상 볼 때마다 꿀꿀해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던 건가요?”
“응.”
알프레드는 짧게 동의했다.
그의 말을 최종적으로 정리해보면 이거였다.
알프레드는 파괴신과 계약을 맺을 때 몇 가지 조항을 보탰고, 파괴신의 명을 따르지 않을 시 조항은 무효가 된다.
이로 인해 강제적인 강신이 여러 번 있었고 그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쭉 모르고 있었다.
“요컨대,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거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대장이 너무 달라져서 뭔가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그런데 이거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거야? 계약에 이 조항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라우르의 물음에 알프레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거, 더 이상 계약 조항이고 뭐고 상관없다는 겁니까?”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계약 조건이 뭐였어?”
“계약 조건? 별거 없소. 그저…”
쿠궁.
알프레드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와중, 한 차례 땅이 크게 울렸다.
“방금 지진은…”
“밖에서 신력과 악마의 마력이 느껴진다. 이게 대체…”
갑작스러운 현상에 놀라고 있는데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
“거 주인님 주인님 하지 말라니까. 왜, 엘리?”
그녀는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아무래도, 시작한 모양이에요.”
“시작? 뭘?”
그때, 부서진 잔해 사이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쾅!
“어이, 강석찬! 혹시 거기 있나?”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정체는 비유.
“비유? 여기는 어떻게 알고…”
“소문 쫙 났어! 여기 자네들과 올가 파티가 있다고. 조금 전에 박 터지게 싸워놓고 그런 걸 물어보면 안 되지.”
“아.”
“그게 문제가 아니네. 빨리 밖으로 나와 보게!”
그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이건…”
쾅! 쾅!
거대한 검은 번개가 내리친다. 하늘이 부서지고, 그 틈새로 익숙한 검은 날개의 종족이 들이닥친다.
“악마…”
하급 상급 가릴 것 없이 몰아닥치는 악마 무리에 이어, 하늘이 열리며 한 무리의 천사가 나타났다.
“가증스러운 천사 녀석들! 죽어라!”
“추악한 것들!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
갑작스럽게 싸움이 전개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가 하던 말을 이었다.
“방금 후작 타르킨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전쟁이라고, 빨리 합류해 싸우라고.”
제2의 천마대전 개막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