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석찬과 랜스.
두 사람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무력의 차이가 존재한다.
수십 년이나 레벨을 올려오며 힘을 축적한 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야 할 터인데.’
캉!
자신의 일격을 코앞에서 받아낸 석찬을 바라보며, 랜스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랜스에게 가르침을 받던 시절, 아니 라우르의 또 다른 영혼과 생사결을 펼칠 때까지만 해도 분명 석찬은 자신보다 한참 약했다.
“세상이 모두 생각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스승님!”
쾅!
있는 힘껏 내뻗은 주먹에 랜스의 몸이 주욱 밀려났다.
“크윽…!”
일격을 받아낸 랜스의 입에서 핏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무슨 힘이…’
이것은 신마력 이전에, 기초적인 근력의 문제였다.
‘녀석의 근력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100? 아니면 200?
어느 정도의 스탯을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전에 봤을 때와는 격을 달리하는 힘에 그도 빠르게 머릿속에 있는 계획을 수정했다.
‘설렁설렁 싸울 생각으로 싸우면 진다. 진심을 다한다.’
랜스는 핏물을 닦으며 호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꺼냈다.
“그래, 인정한다. 강해졌구나.”
“그건 뭡니까?”
“내 성의라고 해두지.”
으직.
알약을 씹어 삼키자, 랜스의 몸에서 거대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페널티 해제 캡슐이라고. 최고 층수의 10층 이내에서 1시간 동안 층간 페널티를 풀리게 해주는 약이다. 어떠냐, 이 정도면 제법 괜찮지?”
랜스 일행이 기록한 최고 층수는 95층. 90층은 10층 이내에 거뜬히 든다. 확실히 페널티가 없는 랜스의 힘은 강력했다.
“그게 본래 힘입니까?”
“그래. 수십 년간 단련한 내 진짜 힘을 보여주지.”
랜스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조금 전보다 더욱 강한 압력이 들어왔다.
“언제든지.”
이에 작게 미소 지은 석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주먹에 맺힌 신마력이 더욱 강력한 빛을 발산했다.
“녀석… 간다!”
후웅.
랜스가 창을 가로로 큼지막하게 휘둘렀다.
피슷.
석찬의 갑옷을 훑고 지나간 창날. 젖혔던 허리를 편 석찬이 반동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주먹을 내질렀다.
“힘 좋은걸? 그동안 무슨 짓을 해댄 거야!”
피슉!
어느샌가 어깨를 내리친 창끝에 피가 묻어났다.
“그러는 스승님도, 여전히 대단하십니다.”
“허, 너 같은 괴물 새끼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어색하구만.”
순식간에 회복되는 어깨를 보며 랜스가 혀를 찼다. 일반적인 마력도 아닌 신마력으로 사용하는 회복 마법의 효능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그것도 그런데… 그 힘, 역시 더 발전했군.”
“바로 알아보시네요.”
석찬은 연보랏빛 신마력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계에서의 수련, 비단 그것은 석찬의 신체 능력만 올려준 것이 아니었다.
마력 컨트롤 능력. 마력의 파동이 불안전한 마계의 특성상 한 달 동안 계속 마력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련이 되었다. 게다가.
‘신력의 생성도 훨씬 수월해졌어.’
과거에는 신력을 만들어내는 속도도 느리고, 과정도 번잡해 전투에서는 라우르의 신력을 빌려 싸움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나의 신력. 나만의 힘.’
당당하게 신력을 만들어낸 석찬이 마력과 뒤섞인 그것을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지막 자비입니다. 지금 비키신다면 다치지는 않을 거예요.”
“하!”
석찬의 경고에, 랜스가 피식 웃었다.
“솔직히 지금 네 힘은 조금 쫄리긴 하는데… 그 정도로 내가 물러설 것 같아? 건방진 제자 녀석아.”
콰아앙!
순간, 랜스의 몸에서 한 번의 폭발이 다시 일어나며 위태위태하던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우왁, 랜스 님!”
경비 대장이 놀라 잔해를 걷어내면서도 랜스에게 소리쳤다.
“두 분 사이에 무슨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마을 앞입니다! 이렇게 마을 기물을 파손하신다면… 힉.”
무언가 말하던 경비 대장은 랜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장의 명령이다. 불만이 있으면 그쪽에 따지도록.”
“대장?”
그 말에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랜스가 대장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단 한 명.
“알프레드 올가.”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어지는 침묵 속, 랜스가 입을 열었다.
“뭐, 너도 이유는 알아야 하니까 말해주지. 대장이 네 녀석의 목을 바란다.”
“그게 싸움의 이유입니까?”
“그래, 간단하지?”
“빌어먹게 간단한 이유네요, 그거.”
“솔직히 나도 싸우고 싶지는 않아. 그래도 오랜만에 대장이 주는 명령인데… 들어야겠지?”
“알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힘이 더욱 증폭되었다.
“모두 제 뒤로!”
범상치 않음을 느낀 이브가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거대한 방어막으로 그들을 보호했다.
“호오… 우리 조카, 언제 저렇게 강해졌대. 저거 그거 아니야? 하얀 마력. 문헌에서만 존재하는 것인 줄 알았건만…”
랜스는 잠시 기특한 눈빛으로 이브를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석찬에게 고정했다.
“뭐, 늙은이의 푸념은 여기까지고, 다시 놀아볼까!”
쾅!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랜스.
턱, 탁!
창날을 가볍게 비껴낸 석찬이 랜스의 명치를 후려쳤다.
“크읍, 역시 강하구만!”
촤악!
그가 당긴 창이 옆구리를 꿰뚫고 깊은 자상을 남겼다.
“어디 한 번 이것도 막아보거라!”
창을 이리저리 돌리는 랜스. 곧이어, 엄청난 풍압이 석찬의 몸을 죄어왔다.
“폭결투창.”
무언가 엄청난 뜻이 담긴 듯한 이름이었다. 게다가 이름이 전부가 아니었다. 창에서는 엄청난 이름에 걸맞은 굉장한 힘이 담겨 있었다.
“필살기 정도 되는 겁니까? 그걸 썼다간…”
“괜히 혀 놀리지 말고, 쫄리면 말해라. 그럼 예전의 정을 봐서 조금은 힘 빼고 날릴 테니까.”
“전혀 아니니까, 들어오십쇼.”
“오냐!”
랜스가 창을 던졌다.
후웅.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창이 석찬을 향해 날아왔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창이 목표물에 도달하기까지는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콰광!
석찬의 몸에 직격한 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석찬아!”
“오빠!”
주변을 초토화하는 일격을 직격으로 맞은 그를 보고 방어막 안의 동료들이 황급히 방어막을 뚫고 달려가려고 했다.
“저 키만 멀대같이 큰 놈이 감히 주인님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랜스에게 달려들려는 그들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허… 이런 미친.”
사라진 안개 속, 석찬이 창을 붙잡고 있었다.
“쿨럭!”
물론, 그리 무사해 보이지는 않았다. 바로 전에 치료했던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 터져 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창날을 막아낸 손 또한 피부가 완전히 찢어졌는지 건틀릿 아래로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이외에도 폭발에 휩쓸려 생긴 자잘한 상처까지. 절대로 작은 부상이 아니었지만, 석찬은 그것을 버티며 두 발로 서 있었다.
“징그러운 녀석이구만.”
“괜찮아요, 오빠?”
눈앞에 랜스를 두고 석찬에게 달려간 이브가 황급히 치료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난 괜찮아. 저쪽에 가 있어, 이브.”
“그래도…”
“정말 괜찮아.”
석찬의 요구에 결국 자리를 비킨 이브가 물러섰다.
“뭐냐, 네 녀석.”
“누군지 몰라서 묻습니까?”
상처를 대충 치료하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랜스가 질린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것마저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강해졌구나.”
“덕분에 말이죠.”
어느새 랜스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젠장, 나름 진심으로 날린 거였는데. 에이씨, 이제 남은 마력도 없네.”
“죽일 생각이셨습니까?”
“죽이기는 무슨, 그냥 팔다리 중 한군데 정도는 못 쓰게 해서 데려가기 편하게 만들려고 했지.”
하지만,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조금 아플 겁니다.”
“살살 해줘.”
그렇게 석찬의 주먹이 랜스의 얼굴을 강타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직!
갑자기 나타난 도끼가 석찬의 팔을 훑고 지나갔다.
“이건…”
은빛의 도끼날에 붉은 피가 배어 나온다. 그리고 그 도끼는 석찬도 잘 아는 자의 무기였다.
“드레이븐입니까?”
“랜스를 그 정도로 몰아붙이다니.”
백발의 중년, 드레이븐이 도끼를 닦으며 석찬을 응시했다.
“오랜만이다.”
“그리 반가운 상황은 아니네요.”
“이해해주길.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뒤이어 베로니카와 메리도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고 한다면 이름만 대도 살이 떨리는 미쉘 그레이스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할까?
“미쉘은 급하게 대장의 호출을 받아서 말이야. 아쉽지만 우리 상대로 만족해 줬으면 한다.”
“아쉽기는 개뿔. 그리고…”
석찬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힘을 뿜어내는 드레이븐 일행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젠장.”
생각하기를 포기한 석찬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억울해서라도 알프레드라는 분 면상을 봐야겠네요.”
무슨 악감정이 생겨서 갑자기 자신을 죽이라고 한단 말인가? 알렉산더의 제자라서? 아니면 단순한 원한?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궁금했다.
“우리를 이긴다면 알려주지.”
“전력을 다하죠.”
“히익… 어째서 올가 파티와…”
다시금 이들이 전투를 준비하자 경비대들은 공포에 질려버렸고, 반대로 석찬의 동료들은 전의를 다졌다.
‘이번에도 병풍처럼 서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타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지금까지 힘들게 사냥하고 훈련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런 상황이 오지 않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던가?
이브의 백색 마력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진현의 새 건틀릿은 보기만 해도 무서운 강기를 뿜어냈으며, 천무진의 흑도에서는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렐은 충분히 거리를 벌린 채 네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쳐 조용히 네 사람을 겨눴다.
그 모습에 드레이븐이 피식 웃으며 도끼를 들었다.
“동료? 확실히 강하긴 하군… 특히…”
그의 적안이 동료들의 안면을 하나둘 훑었다. 그리고, 가장 끝에 선 두 여인 앞에 멈춰 섰다.
“천사와 악마라… 왜 이 녀석을 따라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계해야겠군. 베로니카.”
“네.”
베로니카, 금발에 멍한 눈을 한 여성은 조심스레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거대한 나무줄기가 나타나 엘리자베스와 에피르의 몸을 휘감았다.
“저건…”
“꽤 성가셔 보여서 말이지. 그럼, 시작해볼까.”
“큭!”
나무줄기는 꽤나 질긴 데다가 회복력도 엄청났기에 두 여인이 아무리 부숴도 끈질기게 그녀들의 몸을 속박했다. 이걸로 가장 큰 전력은 잠시 아웃. 하지만 괜찮았다.
“둘만 맡아줘.”
“오케이.”
“알겠어요.”
석찬은 동료들의 실력을 믿었다.
그렇게 2차전, 동료전이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일어난 공방에 벽이 무너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확실히 전장으로 모였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장.”
“이젠 나도 모르겠다… 집에 가고 싶다.”
경비 대장의 한탄은 시끄러운 전장의 소음에 묻힐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