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천사와 안내자, 둘 다 탑을 오르면서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희귀한 녀석들이다.
천사는 존재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이들이 수십 배는 많을뿐더러, 특히 안내자는 처음 탑에 소환되었을 때의 악몽 때문인지 고층 사람들도 만나기를 꺼리는 작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두 희귀 생명체를 동시에 대동한 채 사냥 중인 한 파티가 있었다.
콰과광!
천사장 에피르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일어난 번개가 대지를 갈랐다. 안내자 G는 채찍으로 수많은 몬스터를 휘감아 지져버렸다.
“졸라 세네.”
진현이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몬스터의 멱을 따버렸다.
“너도 인간치고는 굉장한 거니까, 너무 그런 표정 지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누님…”
권능의 반동을 모두 회복한 엘리자베스 또한 엄청났다. 그녀가 만들어낸 검은 불꽃은 몬스터는 물론이고, 끝없이 펼쳐진 대지 또한 완전히 불태워버릴 만큼 거대하고 강력했다.
필요 이상으로 날뛰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기에, 석찬은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엘리, 그렇게 막 힘을 써도 돼?”
이전에 그녀는 말했었다. 아무래도 탑 안에서는 힘을 아껴야 한다고.
‘전혀 아끼는 거 같지 않은데 말이지.’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엘리자베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괜찮아요. 이제 이런 거 저런 거 신경 쓸 필요는 없어서요.”
“응?”
“말 그대로예요. 더 이상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거죠.”
“키에…”
화르륵!
때마침 날아오는 거대한 붉은 새를 말끔히 태워버린 엘리자베스가 검붉은 눈을 빛냈다.
“주인님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곧 엄청난 일이 일어날 테니 말이죠.”
“엄청난 일?”
엘리자베스는 추억에 잠긴 듯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쟁은 삼천 년 만이니까요. 즐겁지 않을까요?”
“전쟁?”
“지금 사건들을 보면 모르겠어? 게다가 주인님이 벨리아스 님까지 처리해 버리는 바람에, 마신께서도 꽤나 진심이신 모양이야.”
진현의 되물음에, 엘리자베스가 당연하다는 양 말했다.
“젠장. 어떤 놈이야, 그런 미친 짓을 벌인 새끼가.”
“바로 옆에 있잖아?”
“젠장. 내 친구지만 진짜 막 나가는 놈이란 말이야.”
물론 절대 나쁜 의미가 아니다.
“뭐, 그래도 주인님 정도면 쉽게 죽을 것 같지는 않겠어요.”
엘리자베스는 한층 더 늠름해진 석찬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누님, 저 녀석이 죽을 것 같아요?”
진현은 질색하며 그의 건틀릿을 바라봤다.
석찬의 건틀릿은 평소와 같은 흰색의 강철을 여러 겹 덧댄 형태였다. 하지만 이번 일로 달라진 것이 있었는데, 바로 중앙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그 건틀릿을 어떻게 되먹은 거냐?”
“무구에서 이리도 강력한 힘이 느껴지다니, 엄청나군.”
무뚝뚝함의 대명사, 천무진도 동조했다.
“이거?”
석찬은 잠시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했다.
때는 오펠리아, 비유와 헤어진 직후.
‘맞네, 그게 있었지.’
마계에서 받았던 보석을 뒤늦게 떠올린 석찬이 새빨간 보석을 꺼내 들었다.
라우르가 처음으로 준 물질적인 보상이었는데 벨리아스와의 전투, 재회 등 연이은 사건으로 정신이 없어 이제야 사용하게 됐던 것이다.
사용 방법은 간단했다. 라우르의 영혼 조각이 빠져나가며 비어버린 자리에 붉은 보석을 끼우면 되는 것.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봉인 풀린 건틀릿]
[등급 : 레전더리]
[공격력 + 2000]
[내구도 : 1000/1000]
[모든 스탯 + 50%]
[약점을 타격할 시 30배의 대미지가 적용됩니다.]
[대상의 방어력을 관통합니다.]
[공격 시 소량의 HP를 회복합니다.]
[일정 확률로 적이 즉사합니다.]
유니크 등급을 넘어 레전더리 등급으로 변해버린 건틀릿은 조금 더 고풍스러운 장식이 추가되었으며, 성능 또한 이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높아졌다.
또한 건틀릿에는 석찬이 모르던 또 다른 비밀이 있었다.
“예전에 라우르가 사용하던 물건이라니.”
“나도 놀랐다. 그때는 검게 칠해져 있긴 했는데, 누가 봐도 내 것이었으니까.”
1층, 고블린 왕의 궁전에서 라우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처음부터 건틀릿에 대해 아는 뉘앙스를 풍겼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석찬이 진실을 알게 된 후 쭉 궁금했던 점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라우르의 기억을 봤을 때 분명 녹색 건틀릿을 쓰는 것 같았데.”
그렇다. 기억 속 라우르는 제 눈과 머리색을 꼭 닮은 진녹색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 내가 주력으로 쓰는 녀석이 두 녀석이라서 말이야. 흰 놈은 안 쓴 지 몇천 년이 다 되어서 아마 기억에도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야.”
“…….”
“뭐, 그래도 손질은 제때제때 했으니까.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이네.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기도?”
뭔가 허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건틀릿 말고 ‘새로운 방어구’는 마음에 드냐?”
그 말에 석찬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옙. 정말 마음에 듭니다.”
석찬의 모습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50층에서 최고의 대장장이 프레드릭 레나토에게 받았던 무구들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하지만 원래 착용하던 무구들은 또 다른 라우르의 영혼과 겨루며 박살 난 지 오래.
새로운 방어구를 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안내자 G가 건네준 상자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투신 라우르의 전신 갑주]
[등급 : 신화]
[방어력 + 10,000 + ?]
[내구도 : ∞/∞]
[방어구 외형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재현된 방어구의 방어력과 효과를 적용받습니다.]
심플하지만 굉장한 효과였다.
덕분에 원래 사용하던 방어구의 효과를 고스란히 받은 채, 추가로 1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방어력도 얻게 된 석찬이 기분 나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G야, 이건 도대체 어디서 난 거냐?”
“아이테르 님께서 주셨습니다.”
“아이테르? 허어, 이런 걸 가지고 있었다고?”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라우르의 부하라던 천사장이었다.
“아이테르? 그건 또 누구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진현의 질문에 에피르가 말했다.
“얼마 전에 대천사가 되신 위대한 천사이십니다.”
“대천사? 걔 대천사가 됐어?”
라우르의 질문에 에피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녀석이 대천사라… 하긴, 그 녀석 정도면 대천사가 될 만하지.”
잠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몬스터 떼를 처치한 석찬 일행 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89층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드디어인가?”
“드디어 왔다. 90층.”
일명 ‘천사 대학살’이라고 명명된 대사건이 일어난 지 고작 2개월, 석찬 일행은 10개의 층을 돌파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지만, 한 명 한 명이 범상치 않은 강함을 지닌 데다 천사, 악마, 안내자 마지막으로 신이 함께하는 파티는 불가능도 가능케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기겁했겠어요. 뭐, 이미 소문은 다 퍼진 것 같다만.”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목격자가 널린 최고층을 시작으로 석찬 파티에 대한 정보는 이미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파티’, 석찬 파티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었다.
가끔가다 사냥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을 놀라움 반 그리고 두려움 반이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물론 이마저도 라우르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생긴 인식이니, 만약 라우르가 전대 투신이자 최강의 신이었다고 말한다면 아마 놀라 뒤집어지리라.
“응?”
때마침 90층에 당도한 석찬 일행의 앞에 선 남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들은…”
거대한 벽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석찬 일행을 둘러봤다.
“진짜입니까? 진짜 올킬러…”
“맞습니다. 마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명패를 꺼내 드는 그에게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왔다. 그런데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놀라움, 눈앞의 경비원과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놀라움은 점점 두려움과 공포로 바뀌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빠르게 석찬 앞에 선 경비대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올킬러 님, 그리고 동료분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당장 여길 떠나십시오.”
“예?”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당황하기도 잠시.
“지금 사냥꾼 길드가 으아악!”
콰앙!
갑자기 남자의 왼편 벽이 폭발했다.
“또 폭발? 이번엔 또 뭐야?”
석찬은 전투태세를 갖추면서도, 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라, 당신은…”
바다같이 푸른 청발을 올백으로 넘긴 채 씩 웃고 있는 중년의 미남자, 랜스가 씩 웃으며 석찬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다. 제자 녀석아.”
제자. 비록 일주일이지만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놀란 점이라고 한다면.
“무슨 일입니까, 랜스.”
“척 보면 모르겠어?”
아니, 기다란 장창을 빙빙 휘두르며 노골적인 살기를 내뿜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과 싸우려 하고 있었다.
일행들도 그 모습에 각자 무기를 꺼내 들며 싸울 준비를 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유? 글쎄… 나를 이기면 알려주지.”
그와 동시에, 랜스의 전신에서 가공할 만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일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강한 보라색 마력.
페널티가 훨씬 완화되어 본신의 힘에 가까워진 그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석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란 말이지.’
[이름 : 강석찬]
[레벨 : 오류]
[HP : 150,400/150,400]
[MP : 14,985/14,985]
[힘 : 850 + 425]
[민첩 : 875 + 437.5]
[체력 : 940 + 564]
[내구 : 999 + 599.4]
[마력 : 999 + 499.5]
[잔여 포인트 : 오류]
[잠재력 : 무한]
석찬의 시야 한편에 새롭게 변한 상태창이 들어왔다. 레벨과 잔여 포인트는 마계에서의 특훈 이후 어째서인지 오류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그 외의 스탯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추가 스탯을 포함하지 않고도 평균 수치가 900을 넘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석찬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평소와 같은 진한 보랏빛 마력이 아닌 연보라색의 마력이었다.
“그 힘이냐?”
평범한 마력과는 다른, 석찬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힘을 랜스는 단박에 알아챘다.
“역시, 바로 아시네요.”
“모를 수가 있나?”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이론이라고 할지라도, 그 힘은 랜스가 석찬에게 가르쳐준 힘이었다.
신마력.
이제는 전신에 두르고도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석찬이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조금 아플 겁니다.”
“오냐, 와라.”
잠시 후, 두 사람이 격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