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레오, 그는 여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탑에 소환되어 수십 년째 사냥을 하며 먹고사는 남자였다.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가 80층에 거주하는 강자라는 것 정도?
80층에 도달했다는 것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닌 소유자라는 증거였지만, 그런 레오조차도 80층 내에서는 재능이 떨어지는 편에 속했다.
근 50년간 꽤 많은 수의 사람이 그를 넘어섰고, 강해졌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뭔 놈의 기운이….’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난 두 남자가 지닌 기운은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스킬이지… 아니면 마력 운용자인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레오가 손을 뻗었다.
“누구냐, 네 녀석들.”
대뜸 경계하는 그에 석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석찬. 이쪽은…”
‘응?’
강석찬이라는 말에 레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라우르다.”
“그렇게 이름 막 말해도 돼요?”
“상관없어. 어차피 이놈들은 내 이름 한 번도 안 들어봤을 테니까.”
“신이나 천사가 알려줬으면 어쩌려고.”
“신들은 이런 쭉정이한테까지 신경 쓸 만큼 한가롭지 않다.”
신, 쭉정이 등등 자극적인 단어들이 한껏 들려왔지만 레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강석찬이라고?’
올킬러 강석찬.
방금 전까지 녀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놀란 점은 그 포인트가 아니었다.
‘이 녀석… 탑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조금 넘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강할 수가 있다고?’
10년에서 20년 사이면 어지간한 인간들은 30~40층, 천재라고 해봐야 50층에 도달하는 게 고작이다.
물론 녀석이 엄청난 이레귤러임을 잘 알고 있다. 강석찬이 누군가? 바로 전날에 탑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거대한 사건을 만든 장본인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강할 줄이야.’
그의 주변에서만 미증유의 기운이 느껴졌다. 필시 극도로 단련된 신체와 엄청난 양의 마력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진 현상이리라.
“생각보다 더 엄청나군….”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마워. 그보다…”
석찬은 아직까지 널브러진 천사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다른 친구들… 은발의 여자애랑 못생긴 애…”
“동료들을 말하는 거냐?”
“오, 혹시 아는 거…”
“미안하지만, 천사 학살극 이후로 모두 종적을 감췄어. 나도 너를 만날 줄은 몰랐다만… 정말 반갑군.”
“그래?”
석찬의 시선이 폐허가 된 전장을 향했다. 온 정신을 집중하자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뻗어나간 마력이 수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도보로 이동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 갑자기 사라졌다. 다른 층으로 이동한 건가?’
그렇다기엔 층 이동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라우르, 설마 뭔가 잘못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어이 거기, 그 천사 학살극인가 이후에 얼마나 흘렀지?”
“하, 하루가 흘렀다만?”
레오의 대답에 라우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봐라, 제대로 잘 해봐.”
이에 석찬이 더욱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허공 사이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감지되었다.
‘이 느낌은…’
석찬도 몇 번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G의 검은 공간.’
안내자 G가 만들어내는 특이한 검은 공간. G가 이중, 삼중으로 결계를 치며 감췄지만 끝끝내 석찬이 감지해낸 것이다.
“찾았어요.”
“오케이, 들어가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물론이죠.”
석찬이 마력을 조작해 검은 공간의 일부를 드러냈다.
“저건…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술식이 새겨진 것 같은데… 풀려면 꽤나 시간이…”
정체를 모르는 레오는 놀라워하며 그것을 관찰했다.
“잠시만 비켜봐.”
작업을 하려고 그를 밀어낸 석찬이 손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억지로 검은 공간 일부를 뒤틀었다.
그렇다. 술식? 그런 것은 압도적인 힘에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공간 안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충 사람이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을 열어낸 그가 레오를 향해 작게 말했다.
“지금까지 본 거는 다 비밀인 거, 알지?”
“헛… 옙, 명심하겠습니다. 무덤까지 들고 가겠습니다.”
엄청난 괴력을 선보인 그의 모습에 레오의 태도가 급격히 공손해졌다.
“그럴 필요는 없고, 알아서 잘할 거라 믿어. 그럼 라우르, 가죠.”
“오케이. 여기도 오랜만이네.”
석찬과 라우르가 들어서자, 찢어졌던 공간이 다시금 이어지더니 모습을 감췄다.
‘저것은… 내가 지금까지 뭘 본 거지…’
레오는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같은 80층 사람인데, 수준이 달랐다. 게다가 조금 전 보여준 퍼포먼스는 절대 80층의 수준이 아니었다.
최소 90층, 어쩌면 그 유명한 올가 파티의 파티원과도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주제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고층에서 수십 년간 수많은 천재를 봐온 레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함부로 떠벌리다 걸리면…’
온몸을 훑는 소름에 레오가 다짐했다.
‘오늘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다. 그냥 천사 시체나 구경하다 간 거야.’
그 무엇보다 목숨이 소중하다고 생각한 그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 * *
찌지, 치지직.
“흐으음…”
찢어진 공간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의 태평하고 심드렁한 인상은 어디 가고 오랜만에 놀라운 감정을 한껏 드러낸 안내자 G가 석찬에게 말했다.
“갑자기 경보가 울려서 왔더니 지금 무슨 짓을…, 아니 그보다 어떻게 한 겁니까?”
“그냥 열었는데.”
“그냥 열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석찬의 대답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다.”
“라우르… 님.”
라우르도 확답하자 G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십쇼. 이거 고치는 데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주의할게.”
“말은 항상 잘하셨죠. 저쪽으로 가보세요. 동료분들은 지금 수련에 한창이니 민폐 끼치지 마시고.”
찢어진 공간을 이어 붙이며, G가 뒤편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시선을 옮기니 한창 대련 중인 진현과 천무진이 보였다.
쾅, 콰직!
주먹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거대한 충격파가 일고 공간이 부르르 떨렸다.
‘더 강해졌어. 두 사람 다.’
한쪽에서는 이브와 렐이 한창 명상에 빠져 있었다. 두 여인 또한 한층 더 성장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점은.
‘돌파했어.’
이브의 피부 위로 흐르는 순백의 마력. 강제 돌파로 한 번 사용해본 적 있는 최강, 최후의 마력이었다.
렐 또한 기존의 마력을 깨부수고 초록 마력을 두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강해졌냐고 생각하셨죠?”
어느샌가 공간 수리를 마치고 다가온 G가 비실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별거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잠도 안 주무시고 명상 상태에 돌입하시더니, 어제 오후쯤에 저렇게 되셨습니다.”
“일주일? 그게 무슨…”
“시간 조작입니다. 당신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죠.”
뉘앙스를 보니 G는 이미 자신들이 어디에 다녀온 건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보다, 시간 조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석찬의 혼잣말에 G가 픽 웃으며 물었다.
“말이 안 되는 건 저나 이브 씨가 아니라 당신 같은데요.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석찬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한층 강해졌음을 진즉에 깨달은 그가 재차 물었다.
“마계에 다녀온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요?”
“열심히 굴렀죠. 덕분에.”
라우르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그에 G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름대로 열심히 하셨겠죠. 뭐, 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고맙다.”
“자자, 모두 우리의 주인공을 맞이합시다!”
훈련을 방해하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자신보다 먼저 동료들을 불러 모으는 G에 석찬이 혀를 내둘렀다.
“어? 이야, 이게 누구야?”
가장 먼저 석찬의 존재를 확인한 진현이 놀라워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새끼, 몸이 더 좋아진 것 같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석찬?”
“오빠?”
슬슬 다른 사람들도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고, 그는 한동안 격렬한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마계… 허어, 벨리아스라…”
석찬의 이야기를 듣던 G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어떻게 벨리아스를 상대하신 겁니까? 녀석은…”
“마계의 대공 아니던가?”
이번에는 오펠리아 쪽이었다. 비록 석찬의 동료는 아니었지만, 천사와의 전쟁에서 자신을 도와주기도 했고, 일주일간의 특훈에 동참했다고 하니 느껴지는 어색함은 별로 없었다.
“벨리아스를 알아?”
“물론이다. 내 주신이 말해준 적이 있어.”
오펠리아는 해신의 화신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살짝 경계가 되었다만, 석찬의 편에 선 시점부터 해신에게서 어떤 응답도 없다고 했다.
“물론, 내가 처리한 것은 아니야. 라우르가…”
“뭐, 그래도 이 녀석이 놈의 몸뚱이에 구멍 하나 시원하게 뚫어주긴 했어.”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에피르가 옆에서 대꾸했다.
마계 대공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그것도 인간이. 처음 보고 막연히 석찬이 강해진 것은 알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생각 그 이상이었다.
“나름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대단해요.”
이브를 포함한 동료들은 다시 멀찍이 떨어진 석찬을 동경하면서도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도, 언젠가는 잡는다.”
“석찬, 혹 대련을 해줄 수 있겠나?”
“물론이지.”
그렇게 공간에서 만 이틀을 더 있고 나서야, 석찬 일행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후아, 공기 좋다!”
진현이 하늘 높게 뜬 태양을 향해 양팔을 뻗고 공기를 음미했다.
“오버하지 말고, 자. 모두 모여봐.”
석찬의 말에 아홉 명의 남녀가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예상했겠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다시 탑을 올라야 해.”
“오, 드디어 오르는 건가.”
“너희라면 그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이미 90층까지 오른 오펠리아와 비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빠지지. 90층에 가서 미리 준비하면 되겠군.”
“그래주면 고맙고. 에피르랑 G는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에 백발의 천사, 에피르가 먼저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석찬 님을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이미 신들을 배신하고 천사까지 죽인 이상 그녀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저도 끼어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제 처지도 비슷한지라. 아, 맞아. 드릴 것도 아직 남았고요.”
아이테르에게 받은 상자를 떠올리며, G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두 남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석찬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다.”
자신 때문에 원래 있던 곳을 배신하고 같은 편이 되었는데, 돌봐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천사와 안내자의 합류와 함께 석찬의 탑 공략이 계속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