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90층.
인간이 개척한 마을 중 가장 높이 위치한 곳이자, 그 유명한 올가 파티가 거주 중인 마을이었다.
사방이 검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안, 한 남자가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쩐 일로 소집이래냐. 흐아암.”
등 뒤에 거대한 장창을 매단 청발의 미중년, 랜스였다.
“심심하다. 오랜만에 날뛰고 싶은데… 어디 대련 상대 없으려나?”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힐끔거리자,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갔다.
“에잉, 싱거운 녀석들.”
물론 도망친 이들도 절대 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은 탑을 90층까지 오른 강자들. 하지만, 올가 파티의 일원인 랜스는 그 강함이 궤를 달리했다.
모두가 과거 호기롭게 그에게 덤벼들었다가 불구가 될 뻔한 기억이 있기에 이제는 눈만 마주쳐도 도망칠 뿐이었다.
‘오랜만에 녀석이나 만나러 가볼까?’
랜스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석찬.
몇 달 전, 강해지고 싶다기에 가르침을 주었던 알렉산더의 제자였다.
‘녀석과 싸울 때는 재미있었는데.’
물론 페널티가 있었기에 가능한 싸움이었지만, 그런 짜릿함은 마지막 공략 이후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랜스는 더더욱 석찬을 그리워했다.
‘게다가 마지막 그 힘.’
석찬만이 사용 가능한 힘, 신마력.
신마력을 처음 본 랜스는 그 힘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힘.
탑을 95층까지 오르며 별의별 사건을 겪고, 역대 최강의 인간이라고 불리던 알렉산더 올가를 바로 옆에서 봐온 그조차도 신마력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녀석이 정말 그 힘을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석찬과의 짧은 훈련을 진행하던 도중, 그의 괴물 같은 컨트롤 실력을 보고 이론으로만 알려진 신마력을 조금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그것을 성공시켰다.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다루는 힘. 랜스가 보았을 때 그것은 탑 내에 존재하는 그 어떤 스킬과 기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범접 불가능한 힘이었다.
몇 명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고작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다루는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신마력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저 두 힘을 동시에 다루는 것이 아니지.’
마력과 신력. 두 힘은 서로 비슷한 면이 있되, 물과 기름 같은 존재다. 마력은 악마의 힘에 가까운데 신력은 천사와 신들이 사용하는 힘이니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힘들은 단순히 섞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심력이 소모된다. 하지만 상반되는 힘에서 오는 엄청난 폭발력, 그것은 이론상 신력이나 악마가 사용하는 마력을 초월한다.
“뭐, 그것도 숙련도가 극에 달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만약 신마력을 완벽하게 사용할 줄 알고 그것을 뒷받침해줄 그릇까지 갖춰진다면 석찬의 무력은 최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그래도 녀석이 무난하게 성장하면서 90층까지 올라온다고 가정한다면…’
그때 싸워도 늦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랜스가 석찬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근질거리던 손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기에 랜스는 대충 주변을 둘러보며 가까운 산으로 향했다.
벽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은 랜스가 별다른 절차 없이 밖을 나가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딱 좋은 산을 찾은 랜스가 창을 빼 들었다. 잘 정돈된 창끝에서 광이 흘렀다.
스캉!
가볍게 휘두른 것에 불과하지만, 하늘을 가리던 태산이 단번에 조각나 무너져 내렸다.
“휴우…”
가볍게 산을 다섯 개 정도 무너뜨린 랜스가 창을 닦아 집어넣었다.
“기대되네.”
끓던 마음을 진정시킨 그가 다시 마을로 들어섰다. 뒤늦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늦겠어.”
최대한 빨리 달려보았지만, 도착해서 뜨거운 눈총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죄송, 죄송. 하하…”
머쓱하게 웃은 랜스가 빠르게 착석했다. 그의 주변으로 네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사냥꾼 길드 부길드장 미쉘 그레이스.
사냥꾼 길드 최고 간부 드레이븐 멜튼, 메리 로저, 베로니카 하프, 마지막으로 랜스 롯퍼.
석찬과 알렉산더를 보러 간 뒤로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빈 의자를 바라봤다.
1분만 기다리자 의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정돈된 금발은 휘황찬란했으며, 인상에서는 강인함이 팍팍 느껴졌다.
허리에는 거대한 장검을 찬 사내, 알프레드 올가가 조용히 착석했다.
“다 왔나?”
“대장, 오랜만이야!”
“그럼, 시작하지.”
메리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알프레드가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들의 머리 위로 한 남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머물던 남자, 석찬이었다.
“대장? 녀석을 왜…”
“이 녀석을 알고 있나?”
“어… 알고는 있지? 하하.”
알프레드는 강석찬의 형상을 띄워놓은 채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을 찾아서 제거한다.”
“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메리.
“문제라도 있나?”
“이유가 뭔지는 들어봐야겠군.”
백발의 거구, 드레이븐의 물음에 알프레드가 말했다.
“주신의 명령이다. 더 궁금한 거 있나?”
주신이라는 말에 드레이븐을 포함한 동료들이 전부 인상을 찌푸렸지만, 빠르게 표정을 풀고 재차 물었다.
“주신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갑자기 사람 하나를 죽이라고 하는 이유는 잘 납득가지 않는군. 녀석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탑의 존망에 큰 영향을 끼칠 녀석이라고 하더군. 미리 씨를 제거하라는 명이다.”
그 말에 랜스가 탄식했다.
‘그 정도였나?’
석찬을 가르칠 때 그런 생각은 했다. 녀석이라면 시간이 지나서 엄청난 녀석이 될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성장하고 큰 인물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밑에서 꽤 큰일이 일어났다고 한 것 같은데. 녀석과 관련된 일인가?’
80층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사건. 무려 수백의 천사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탑 전역에 퍼진 이 사건은 지루하기만 한 탑의 일상에서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묻자 알프레드는 말없이 맞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 알았다.”
드레이븐이 일어났다. 그가 허리춤에 달린 양날도끼를 치켜들었다.
“녀석만 처리하면 되는 거겠지?”
그 말에 반발한 것은 메리였다.
“드레이븐, 녀석을 죽이게?”
“…대장의 명령이다. 불복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우리가 녀석을 얼마나 봤다고. 설마 녀석을 대장보다 소중히 여기는 건가?”
“…그 녀석이랑 서로 아는 사이였던가?”
알프레드의 물음에 미쉘이 초조한 목소리로 몇 달 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 동생한테 갔다 왔단 말이지?”
그는 분노한 듯 보였다.
“미안해요. 설명할 경황이 없었어요.”
“신경 안 쓴다. 이미 망가진 녀석이니. 그리고 드레이븐, 받아라.”
휙.
알프레드가 건네준 물건에 드레이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건… 이걸 왜.”
그가 받은 것은 알프레드가 내내 차고 있던 검이었다. 황금빛 손잡이와 검집, 중앙에 박힌 붉은 보석은 검을 더욱 고풍스럽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휘황찬란한 검의 외관이 아니었다.
마검 카세타쥬.
마력 운용자의 마력 저장소를 파괴한다는 역대 최강이자 최악의 마검. 그것이 알프레드가 건넨 검의 정체였다.
먼 옛날, 최강의 인간이었던 알렉산더를 내쫓을 수 있던 것도 이 검으로 마력 저장소를 박살 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용을 허가한다.”
그리고 알프레드가 이 검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실패는 용서하지 않는다.
드레이븐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대장,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그 주신이라는 녀석. 그리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알아서 한다.”
대화는 끝이었다. 알프레드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다른 이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어이, 드레이븐.”
마찬가지로 갈 길을 가려던 드레이븐을 랜스가 막아섰다.
“뭐냐, 랜스.”
여전히 무거운 표정의 그를 바라보며, 랜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진짜… 할 거냐?”
“메리와 같은 질문을 하는군. 설마 고작 일주일 가르쳤다고 사제지간의 정이라도 느끼는 건가?”
“그건 아닌데… 다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괜찮으니… 그보다, 대장이 걱정이다.”
“나도 그래.”
드레이븐의 말에 랜스가 동의했다.
“요즘 대장… 예전이랑 달라졌어.”
두 남자의 머릿속에 신념으로 불타오르던 알프레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신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만난 이후로 너무 많이 변했어.”
“아아. 그 빌어먹을 녀석. 이러면 ‘그날’의 일이 뭐가 되냐고, 젠장.”
랜스의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알프레드처럼 열망과 신념으로 불타올랐다. 착하고 유쾌했으며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나, 뜻이 달라 갈라질 수밖에 없던 비운의 사내.
몇 달 전 그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록 마력은 잃었을지언정 그는 예전과 같았다. 여전히 굳건했으며, 강했다.
“알렉산더… 젠장. 갑자기 그리워지는군.”
“동감이야.”
두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허공에 떠 있는 석찬의 모습을 응시하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알프레드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기를 갖춘 그들이 곧 다가올 거대한 싸움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 * *
고오오.
석찬의 몸에서 흰 증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완벽히 새하얗지는 않고 약간의 검은 빛이 가미된, 옅은 잿빛의 신마력이었다.
“그 힘은 무엇이냐, 인간.”
벨리아스는 그를 경계했다. 생전 처음 보는 힘에 저절로 손이 올라오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이 힘… 글쎄, 뭘까?”
석찬은 손 위로 떠 오른 잿빛 구를 보며 씩 웃었다.
‘굉장한데?’
컨트롤 실력이 늘고 피지컬도 월등히 상승해서 그런 것일까? 신마력의 사용이 더욱 자연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출력 또한 급격히 상승했다.
‘이 정도라면… 가능할 수도.’
석찬의 눈이 잿빛으로 빛났다.
“인간!”
순간 두려움을 느낀 벨리아스의 손안에 거대한 창이 생겨났다.
검붉은 창이 석찬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위력이 현저히 약해진 창은 손쉽게 막혔다. 그리고 왜 그런지 벨리아스는 잘 알고 있었다.
‘젠장, 이 내가 두려움을?’
두려움은 몸 안의 분노를 상쇄한다. 분노하면 할수록 힘이 늘어나는 권능의 카운터 격이었다.
‘젠장!’
그것을 깨달은 순간 벨리아스의 머릿속에 더 이상 두려움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감히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남은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그것을 양분 삼아 더더욱 거대한 힘을 얻게 된 그의 몸이 급격히 불어났다.
“오.”
그 모습을 본 라우르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저 새끼. 더 세졌는데?”
“죽어라, 인간.”
콰과광!
그 순간, 석찬과 라우르가 있던 자리가 폭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