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잠재력 무한-181화 (181/200)

제181화

타르킨.

그도 처음부터 후작급 악마였던 것은 아니다. 태생에 그는 미천한 최하급 악마였다.

최하급 악마.

인간에게 악마는 최하급조차 재앙이 따로 없지만, 같은 악마들 사이에서는 달랐다.

말 그대로 먹이사슬의 최하위권에 위치한 그들에게 평안함나 안주 따위는 저 하늘 위의 별과도 같은 단어였다.

최하급 악마들은 성향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로는 자신의 위치에 수긍한 자들.

비단 최하급뿐만 아니라 힘이 전부이고 진리인 악마들의 세상에도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 자리에 머물기를 택한 자가 한둘은 아니었다.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최하급 악마는 특히 그 빈도가 더 높았다.

“물론, 대다수가 그런 것이지. 절대 모든 악마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교적 소수에 속하는 두 번째 부류의 악마들은 자신의 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재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한 가지 위대한 특권이 있었다.

“설마…”

석찬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시간. 마계는 다른 곳들에 비해 시간이 현저히 빠르게 흘러갑니다. 덕분에 이런 것들이 가능할 수 있었죠.”

재능이 없는 악마는 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단련했다. 그 와중에 본인도 모르던 재능을 깨우치는 악마가 있는 반면, 그러지 않고도 순전히 몇천 년간 쌓인 노력만으로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 자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제가 그런 사례 중 하나죠. 재능은 없지만 그저 수많은 시간을 수련해 후작급의 지위에 도달한 유일한 최하급 악마.”

타르킨이 순간 검은 마력을 방출했다.

콰아앙!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온 마력에 석찬의 몸이 움찔했고, 후작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막대한 양의 검은 마력이 허공을 부유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10만 년이 조금 넘게 걸렸습니다. 정말 힘들었죠.”

100,000년.

말로만 들어서는 잘 체감되지 않는 연수였다.

“뭐, 알았다. 근데, 우리가 궁금해하는 건 그게 아닐 텐데?”

라우르의 지적에 타르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라우르, 저는 예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천마대전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말이죠.”

“거짓말.”

“진짭니다?”

타르킨의 입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꺼져라, 우리를 그저 유흥거리로 생각하는 새끼들이, 어디 그 더러운 입을 놀리고 있어. 거기 비둘기 새끼들도 저리 꺼져.”

꽤나 매콤한 욕설이 이어졌고, 몇 번 헛기침한 그가 말을 이었다.

“바깥 시간으로 약 3,100년 전. 당신이 인간으로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신의 자격을 얻어 천계로 들어갔었을 때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기억 못 하는 건데?”

“말했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예상보다 훨씬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다고.”

“언제 그랬어. 천마대전보다 훨씬 전이라고만…”

“그게 그거죠.”

약간은 뻔뻔하게 나오며, 타르킨이 라우르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뭐야?”

“제게 있어서 당신은 위인, 영웅, 구원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말했다.

“저라고 10만 년 동안 포기하고 싶을 때가 없었겠습니까?”

솔직히 10만 년이 걸리는 수행이라면, 포기는 고사하고 정신이 붕괴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수준이었다.

“한 번은 정말 포기하고 싶어 미칠 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세계로 가 유흥이나 즐기려고 했었죠.”

최하급 악마는 어디까지나 악마 중에 최하급이지, 인간 사이에서는 세계적인 재앙이 따로 없다.

당장 7년의 수행을 거치기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루키라고 평가받던 석찬마저 최하급 악마에게 비참한 패배를 경험했던 전적이 있다.

“적당한 행성 하나 찾아서 깽판이나 부릴 심산이었죠.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행성 마누크.”

그 말에 라우르가 처음으로 흠칫했다.

“……”

“맞습니다. 당신의 고향이자 2,000년 전…”

“거기까지. 더 이상 얘기하면…”

라우르의 몸 주변으로 날카롭게 가다듬어진 신력이 피어올랐다.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군요.”

빠르게 사과한 그가 하던 설명을 이었다.

“그곳에서 저는 아직 인간이던 시절의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먼 옛날의 일이 떠올랐다.

가지런히 묶은 검은 장발, 그런 머리칼과는 전혀 딴판인 맑은 녹안. 그리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몸 구석구석 자리 잡은 근육까지.

도저히 인간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인간이었다.

“당신의 저는 약 1,000년간의 수련으로 최하급 악마 중 가장 강한 악마가 된 상태였죠. 그런 저도, 당신을 보자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악마가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는 힘의 소유자. 그것이 라우르였다.

“헌데,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망이 생기더라고요.”

한낱 인간도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왠지 욕하는 것 같다?”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죠.”

어쨌든, 라우르의 존재 하나만으로 행성 마루크의 침공을 멈춘 타르킨은 다시 수련에 매진했다.

“수련은 힘들었죠. 특히 몇천 년에 한 번씩 벽을 넘을 때마다 또다시 눈앞이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했습니다.”

타르킨은 그럴 때마다 라우르를 살폈다. 그는 역시 대단했다.

분명 바깥세상은 마계보다 30배는 빠르게 흐를 터인데, 그는 자신 이상의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다. 수백 년을 살아온 라우르는 이제 귀족급 악마들과 천사들도 예의주시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열등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타르킨은 다시금 수련에 열중했다.

수천 년 동안 끊임없는 수행을 거쳐 온 그는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해져, 악마라면 누구나 느끼는 열등감이나 자격지심 같은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경외, 존경, 그리고 라이벌 의식이 깃들었다.

“당신은 모르셨겠지만,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제게 굉장히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제가 최상급 악마로 인정받았을 때, 당신은 신이 되어 있었죠.”

신.

인간이 신이 된 전례가 없었기에, 천계는 물론 마계조차 혼란에 빠져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 최상급 악마만큼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역시 내가 인정한 인간이다! 크하하!”

당시의 자신을 회상하는 타르킨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아마, 천마대전이 발발한 즈음일 겁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의 라이벌 의식도 없었다.

존경.

적이지만, 말도 안 되는 무력을 내뿜는 그를 라이벌로 생각할 수 없었다.

최상급 악마로서 전쟁에 참여한 타르킨은 몇 번이고 라우르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적 진영에 함부로 갔다가 라우르에게 닿기도 전에 전에 천사들에게 찢겨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쉬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사이 전쟁은 끝나버렸다.

얼마 후 들린 소식은, 투신 라우르가 절대신 고든을 살해한 죄로 천계에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 뵙게 되네요.”

표정이 없었지만, 타르킨은 울먹이고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제 우상입니다. 부디 제 절을…”

“절은 개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시려는…”

“그냥 한번 바람이나 쐬려고, 안 되나?”

그 말에 타르킨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저택 내부라면 마음껏 돌아다니십시오. 일행분도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이에 석찬도 일어나 라우르와 함께 밖을 나섰다. 저택의 크기만큼 거대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출입 때 한 번 보긴 했지만, 다시 보니 정말 광활했다. 게다가 척박하고 붉기만 한 다른 곳과 다르게 이곳은 푸른 풀과 신기하게 생긴 나무 등이 자라나고 있었다.

“석찬아.”

한동안 말없이 정원을 거닐던 라우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예.”

“신기하지 않냐?”

“타르킨 후작이요?”

“그래.”

악마임에도 적대 세력인 신을 보고 자신의 영웅이자 우상이라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신이 되기 전부터 알아보고 지켜봤다고 한다.

“성정도 일반적인 악마 같지는 않고.”

태생적으로 성정이 잔혹하며 살육을 즐기는 족속이 바로 악마다. 하지만, 타르킨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아이와 같았다.

감정을 잘 감추지 못하며, 좋아하는 것을 보면 흥분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나쁘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석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답지 않은 솔직함. 솔직히 석찬도 그 점에서 타르킨을 좋게 봤다. 게다가, 그는 밑바닥부터 시작한 노력의 대가다.

어떻게든 배울 점이 있을 거다.

“좋았어. 그럼 결정 완료.”

“응? 뭐를요?”

“있어. 기다려.”

직후, 라우르는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 안에는 타르킨이 여전히 상석에 앉은 채 차우르와 석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왜, 더 나갔다 올까?”

“솔직히 아예 떠나실 거라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틀렸네.”

“그렇네요.”

“뭐, 잡담은 이쯤 하고, 용건을 말하지.”

“용건?”

타르킨의 새하얀 점이 부르르 떨렸다.

“왜? 싫…”

“물론입니다! 라우르 님의 용건이라니. 제 목숨을 내어달라는 것이 아니면 뭐든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머무를 곳이 필요하신 겁니까? 그럼 제 저택을…”

‘허.’

다시 라우르의 빠돌이 모습으로 돌아온 타르킨을 보며, 라우르는 그의 한결같은 면을 인정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오오…”

타르킨의 기대 속, 라우르가 막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석찬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을 가르쳐라. 타르킨.”

“예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타르킨의 입에서 맥 빠진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 앞으로 삼 주 동안만 이 녀석을 빡세게 굴려줬으면 좋겠어.”

“하, 하지만.”

타르킨이 빠르게 석찬의 몸을 스캔했다.

‘뭐야, 설마 인간?’

워낙 라우르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던 탓일까? 석찬이 인간이라는 것도 지금 확인한 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이라니… 게다가 이 힘은 대체… 어찌 인간이 이런 힘을…”

놀랍다는 듯 석찬의 몸을 계속 살피는 그를 보며, 라우르가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거, 헛짓거리는 그만하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그 말에 타르킨의 흰 점이 빙글 돌아 라우르 쪽을 향했다.

휙, 휙.

상하로 두세 번 왔다 갔다 한 흰 점이 다시금 석찬을 향했다.

“좋았어.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안다.”

그렇게, 악마 후작 타르킨이 석찬의 네 번째 스승이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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