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마계, 악마들의 세상이자 마신이 거주 중인 그곳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윽…”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몬스터의 시체를 보며, 석찬이 혀를 찼다.
“굳이 저렇게 버려둔 이유가 있어요?”
그 물음에 조용히 걷고 있던 라우르가 답했다.
“모든 마족이 그렇지 않지만, 귀족급이 아닌 녀석들은 대부분 살육을 즐기는 놈들이거든. 그런 놈들의 짓일 거다.”
이런 시체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닌지라, 자연스럽게 악마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너무 심해.’
적을 죽이는 것은 상관없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싶었다.
“말했잖아? 녀석들은 살육을 즐긴다고. 저 시체들은 유흥거리에 불과하다.”
“예. 이해했어요.”
미후로 쭉 말없이 걷던 두 사람 앞에 한 마리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크르르….”
거대한 짐승 형태의 몬스터였는데, 외형은 여러 동물의 형상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마침 잘됐네.”
“저 녀석이 누구죠?”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천마대전에서 본 기억이 있는 녀석이다.”
심상치 않은 검은 기운과 라우르가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 쉬운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긴장한 석찬에게 라우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자, 녀석을 상대해 봐라.”
“혼자요?”
“그럼 혼자지, 둘이겠냐? 참고로 신력은 안 빌려줄 거니까 알아서 해야 된다?”
“알았습니다.”
우선, 간도 볼 겸 석찬이 가볍게 자색 마력을 둘렀다. 손발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마력이 몬스터를 위협했고.
“크륵!”
침을 질질 흘리던 녀석이 제 몸을 향한 위협에 기다란 두 팔을 휘둘렀다.
쾅!
굉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고 몬스터의 연격이 날아왔다.
후웅, 훙!
살을 가를 듯한 바람 소리에 석찬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녀석의 약점을 파악했다.
‘왼쪽 무릎, 명치 그리고… 인중인가.’
단 세 군데밖에 존재하지 않는 약점.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몬스터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한 석찬이 자신의 얼굴만 한 왼쪽 무릎을 강하게 때렸다.
쿵.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타격감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약점을 얻어맞은 덕분인지 녀석이 잠시 멈칫했고.
‘지금.’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석찬이 온 정신을 집중했다.
치직. 파직.
온몸을 뒤덮은 강마력 사이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스파앗.
순간, 왼팔의 강마력이 폭주하려고 했지만, 석찬은 가볍게 이를 통제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래, 신력 하나 없다고 궁상떨 수는 없지.’
생각해보니 지금껏 자신의 힘이 아닌 라우르의 힘으로 헤쳐 나온 역경들이 너무 많았다.
‘만약 라우르가 없었다면 몇 번이고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강해져야 한다. 라우르의 힘이 없어도 그런 것 따윈 가볍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말이다.
‘나는 여기서, 더더욱 강해진다.’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흑안이 짙게 빛났다.
‘그래, 그거다.’
그의 각오를 읽은 라우르가 가볍게 웃었다.
“크르르.”
그런 그에게 또 다른 녀석이 다가왔다. 개체는 똑같았지만, 덩치나 기운이 석찬이 상대하는 녀석보다 두어 배는 큰 녀석이었다.
하지만.
“싸물어.”
“끼깅…”
라우르의 한마디에, 기괴한 짐승의 형상을 한 몬스터가 그대로 꼬리를 말았다.
“지금 중요하니까, 뒤지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은은하게 뿜어내는 살기에 이름도 모를 몬스터는 제 동족을 버리고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리 강력한 마계의 몬스터라지만, 최강의 신이었던 라우르의 살기를 버텨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쾅!
그러는 사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석찬이 상대하고 있던 몬스터가 바닥에 누웠다.
정확히 명치와 인중을 한 대씩 얻어맞은 녀석은 죽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후우…”
물론 승리한 석찬도 멀끔하지는 않았다.
주륵.
몸 이곳저곳에 난 자잘한 상처뿐만 아니라 몇몇 군데는 빠르게 지혈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상처가 깊은 곳도 있었다.
‘갑옷은… 아.’
갑옷은 라우르의 힘을 받아들인 이후부터 완전히 넝마가 되었던 터라 그리 큰 방어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구도도 아마 0이겠지?’
계속되는 싸움에 수리도 못 하고, 지금 일어난 혈투에서도 처절하게 찢겨나갔으니, 아무리 강력한 레전더리 방어구라도 운명을 달리했겠다고 석찬은 예상했다.
그리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 간단했다.
‘시스템창이 보이지 않는다.’
탑 밖으로 나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10년 넘게 시야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던 시스템창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스탯이나 아이템 정보 등, 지금껏 편하게 누려왔던 것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탑에 들어가면 돌아오긴 하겠지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걸레짝이 다 됐네. 걸레짝이 다 됐어.”
“뭐, 이제 슬슬 보내줄 때도 됐… 언제 온 거예요?”
“시스템 없다고 투덜거릴 때부터.”
석찬은 조금 전까지 라우르가 머물던 자리를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살기와 몬스터 기운의 잔재.
“어떤 녀석이었어요?”
“네 놈이 상대한 것보다 센 거.”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대단한 양반이다.
“그렇게 보지 마. 나도 나 강한 거 아니까.”
“엄청나게 재수 없으신 거 아시죠?”
“내가 또 한 재수 하지. 하하!”
그렇게 말하며, 라우르가 갈기갈기 찢어진 몬스터의 시체를 바라봤다.
“그래도 나름 잘 싸웠다. 이 녀석은… 우리가 먹자.”
“이거…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석찬이 물끄러미 몬스터의 시체를 살폈다.
기괴한 형상은 그렇다 치고, 내부까지 꺼먼빛으로 가득한 저 고기를 과연 사람이 먹어도 된다는 말인가?
이에 라우르는 태연히 답했다.
“이거 맛있어. 예전에 먹어봤는데 별미가 따로 없었다.”
“그래요?”
그 라우르가 인정한 맛이라는 소리에 석찬의 귀가 솔깃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빠르게 몬스터를 해체한 둘은 한적한 동굴 안에 들어가 불을 피웠다.
탁!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사람 키만 한 거대한 화염이 장작을 깡그리 불태웠다.
“야야, 힘 조절.”
곧장 그들이 잘 알던 모닥불의 형태로 돌아온 불이 작게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본 석찬이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컨트롤이 잘 안되네요.”
탑에서 석찬은 마력 컨트롤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그의 스승 중 하나이자 탑의 최강자 중 하나인 랜스조차 힘을 컨트롤하는 실력만큼은 석찬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강마력이나 신마력도 아닌, 일반적인 마력을 컨트롤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모습에 라우르가 고기를 불 위에 올리며 말했다.
“말했잖아? 마계는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해 컨트롤이 굉장히 어려울 거라고.”
그렇다. 처음 라우르가 말한 마계의 특징, 바로 마력의 안정성이었다.
마력이 잔잔하게 흐르는 탑과는 다르게, 마계는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는 마력을 컨트롤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몇 시간 전에 몬스터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폭주 이후로도 싸움 도중 몇 번이나 강마력이 폭주하려고 해 그것을 통제하느라 유효타를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싸움에서 얻은 상처 중 절반 이상이 강마력 폭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만약 네 녀석이 여기서 마력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다면, 탑에 가서 볼만할 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마력 컨트롤이 어렵기 때문에 마계의 환경은 마력 컨트롤에 굉장히 큰 수련 효과를 주었다.
게다가 메리트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시간.’
어찌 보면 마계의 가장 큰 메리트라고도 할 수 있다.
마계에 대해 설명할 때 라우르는 말했다.
‘잘 들어라. 마계는 탑보다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흐른다.’
‘대충 어느 정도…’
‘한 30배?’
30배. 그 말인즉슨 마계에서의 한 달은 바깥에서의 하루와도 같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적당히 있어야 폭삭 늙지 않겠지만… 어차피 너 지금 나이 안 먹잖아?’
그렇다. 탑의 가호 때문인지 탑의 인간들은 절대 나이를 먹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마계에서 원하는 만큼 수련하다 보면 엄청난 힘을 얻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아쉽네요.”
그래서 석찬은 더더욱 아쉬웠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로지 한 달. 현실 시간으로는 하루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내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기도 하고, 신인 내가 너무 오래 머물렀다가는 귀족급이 아니라 마신이 오는 수가 있어. 그건 싫잖아?”
그렇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 한 달이라도 수련할 수 있는 게 어디야.’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석찬이 어느새 다 익어가는 검붉은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
라우르의 말대로, 몬스터의 고기는 꽤나 맛있었다. 아무런 간을 하지 않았음에도 짭짜름하면서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가득 사로잡았다.
“맛있네요.”
“그치? 캬.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네.”
게다가 라우르는 부활 후 처음으로 맛보는 음식이라 그런지 더더욱 리액션이 과하고 좋았다.
어느새 거대한 고기 더미를 전부 해치운 두 남자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아무렇게나 누웠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동감입니다.”
한동안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던 둘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고, 험난하고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빠르게 끝나갔다.
* * *
어느덧 마계에 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석찬은 빠르게 감을 잡아 안정적으로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강마력은 아직 조금의 폭주 위험이 있었지만, 그 가능성이 극히 희박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는 됐다.
“좋았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석찬이 마력으로 축축한 옷을 빠르게 말렸다.
그의 옷차림은 일주일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넝마가 된 갑옷은 잠시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두고, 몬스터를 잡고 남은 가죽으로 급조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워낙에 피부가 질기고 단단한지라 방어구로 쓰기 딱 좋았다.
‘나중에 탑에 돌아가면 이걸로 방어구나 만들어볼까? 과연 어떤 녀석이 나올까?’
행복한 상상을 하며, 석찬은 방금 막 잡은 몬스터를 둘러메고 첫날부터 쭉 머물던 동굴로 돌아왔다.
“라우르!”
텅!
고기를 내려놓자, 저 안쪽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녹빛이 그를 반겼다.
“명상 중이셨어요?”
“오냐. 거참, 좀 조용히 들어오면 안 되냐?”
가부좌를 틀고 있던 라우르가 그를 맞이해줬다.
“어디 오늘은… 오! 이 녀석은…”
라우르는 석찬이 잡아 온 몬스터를 보더니 반색하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노란색 괴조, 개체 수가 극히 드문 녀석이었는데 크기도 크고 맛도 좋아 라우르와 석찬이 가장 좋아하는 마계의 음식이었다.
“어디서 잡았냐? 이틀 전에도 겨우 본 놈 아니냐?”
하지만 개체 수가 드문 만큼, 일주일간 거주하며 단 두 번밖에 접해보지 못한 녀석이기도 했다.
그런 녀석을 잡아 오니, 라우르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았어요.”
두 사람은 당장 조리를 시작했다. 불로 겉을 바싹 익히면서도 속은 마력으로 보호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괴조 고기가 완성되었다.
돌로 만든 식탁 위에 앉은 두 사람이 산처럼 쌓인 괴조 고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잘 먹겠…”
그리고 한 조각을 집어 들어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동굴이 폭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