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천계.
평소에는 한가롭기 그지없는 천사들의 세상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플로네 님이!”
“어째서 에피르 님께서… 설마 소문이 진짜인 거야?”
석찬 일당과 천사들의 싸움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천사들은 에피르의 배신과 일행의 선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설마, 저 남자는…”
“라우… 꺅!”
종국에는 완전히 부활한 투신(鬪神) 라우르를 보며 경악하며 달아나기 바빴다.
라우르.
과거, ‘공식적’으로 천계 최강자이자, 최고신으로 추앙받던 절대신 고든을 죽이고 천계에서 추방당한 희대의 배반자.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이미 예상했지만, 라우르는 모함을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와 비슷한 급의 강함을 지닌 마신의 개입까지 있었다.
안타까운 점이라고 한다면, 현재 천계에 거주하는 열 명의 신 말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
하지만 이 시점부터는 아니었다.
강석찬.
라우르의 화신이자, 그가 부활하는 것에 크나큰 일조를 한 인간의 이름이다.
물론 아직 천계 쪽에서는 석찬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모르지만, 이번 전투로 ‘강석찬’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지기에는 충분했다.
상급 천사를 홀로 처치할 수 있는 강함.
심지어 라우르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본연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성과다. 물론 천사의 신력을 빌리긴 했지만, 인간이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고작 90층도 가지 못한 녀석이…’
때문에 파괴신은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파괴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천신의 물음에 파괴신이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이 이상으로 개입하는 것은 탑에 허용된 영역을 넘어선다.”
이번 전투로 잃은 천사만 최소 500. 물론 쭉정이인 하급과 중급 천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상급 천사 열 그리고 천사장 하나를 잃은 것은 분명한 손해였다.
“안내자와 천사 하나도 저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조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G와 에피르, 그들도 문제였다. 우선 천사장인 에피르.
‘다음 대천사로 가장 유력했던 녀석이었건만…’
에피르는 특유의 압도적인 무력을 인정받아 대천사가 될 수도 있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G도 안내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뿜어내는 것이, 무언가 더 숨기는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내려가고 싶다만…”
파괴신은 의자 앞에 웅웅거리는 보랏빛 구슬을 바라보며 인상을 좁혔다.
“젠장…”
구슬의 정체는 바로 천계의 숙적, 마신의 동향을 감시하는 기구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렇게 울린다는 것은, 마신이 천계를 계속해서 눈독 들이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빌어먹을 마신 같으니라고…”
3천 년 전, 천계는 마신의 도움을 받아 눈엣가시 같았던 라우르를 처리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바로 천계를 침공할 터.’
이미 3천 년이나 지났고 천사와 악마의 갈등은 고조될 대로 되었기에, 언제든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기는 했다.
‘당장 악마 공작 년도 그렇고, 악마 새끼들이…’
그때 쭉 파괴신의 옆을 지키던 천신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쪽이 먼저 손을 쓰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천마대전, 다시금 일으키는 겁니다.”
그 말에 파괴신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얼마 안 가 든 생각에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그 공작 년.”
엘리자베스, 석찬 일행을 돕고 있는 그녀는 악마의 선봉장 중 하나.
그녀가 탑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별다른 소란은 피우지 않았기에 내버려 뒀을 뿐.
‘하지만, 이번에는 대놓고 탑에서 힘을 썼지.’
그 과정에서 천계 쪽 천사도 몇 죽고 말이다.
“이 정도면 꽤나 좋은 구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신들과 상의해 보도록 하지.”
“예.”
파괴신은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웅웅거리는 구슬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
“시끄럽게. 천신, 천계의 보호를 지금보다 세 배 강화하고, 나는 화신을 만나보고 올 테니, 그동안 자리를 부탁한다. 아, 강석찬 녀석이랑 라우르의 위치를 찾는 것도 잊지 말고.”
“옙. 믿고 다녀오십쇼.”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파괴신이 치렁치렁한 검은 로브를 걸치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으윽…”
“일어났냐?”
깨어난 석찬을 라우르가 반겼다.
그의 머리칼은 더 이상 금발이 아니었다. 치렁거리는 백발을 가지런히 묶은 그가 진한 녹안을 들이밀었다.
“라우르… 진짜 라우르 맞아요?”
“물론이지. 내가 라우르가 아니면 누구겠냐?”
말투를 보니 라우르가 맞았다.
“아까는 왜…”
“왜긴 왜야. 처음으로 네 녀석 실력 한번 체크해 보려고 그랬다.”
그렇다고 그렇게 과격하게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었지만.
“뭐, 조금 힘 조절을 안 하긴 했는데. 그렇게 안 하면 네 전부를 보지 못했을 것 같아서. 알지?”
이어지는 라우르의 말에 단박에 수긍한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예요?”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쓰러진 장소를 확인했다.
여기저기 흐르는 용암, 피처럼 새빨갛고 황폐한 대지와 산. 언뜻 보면 80층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절대 80층은 아니야.’
비록 겉모습은 같았지만.
‘이 냄새.’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역한 향기, 그리고 그보다 더 역한 마력.
‘이건 마치…’
끈적하면서도 농후한 마력. 석찬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마음이 생겨났고.
“감 좋네. 맞다, 이곳은 마계.”
라우르가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하지만 어떻게…”
애초에 인간이 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잠깐이다. 아마 여기 시간으로 하루 정도밖에 못 있을 거야.”
라우르는 계속해서 말했다.
“옛날에 공간 녀석한테 뜯은 기술인데, 어때? 하루 정도 탑 밖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아?”
여전히 수다쟁이인 그의 모습에 석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왜 웃냐? 설마 웃기냐?”
“아뇨, 그냥…”
“그냥 뭐.”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은 그대로인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석찬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뭔가 찜찜한…”
“끼에에엑!”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라우르는 하늘에서 들리는 비명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야?”
그곳에는 한 괴조가 있었다.
익룡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머리통과 주둥이. 사람 둘은 거뜬히 태울 수 있을 것 같은 몸집에 그보다 세 배는 큰 날개. 그리고 온몸에 솟아난 괴상한 가시까지.
그야말로 마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괴조가 석찬과 라우르를 향해 날아왔다.
“저 비둘기가 어딜…”
“제가 처리할게요.”
주먹을 쥐던 라우르를 막아 세운 석찬이 마력을 운용했다.
라우르가 완전히 부활하며 접신이 끊기고, 어째서인지 에피르와의 연결도 끊겨 신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는 곧 신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과 연결되었다.
‘신력을 만들어낼 수야 있긴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신력을 유지하는 데만 꽤나 큰 힘을 들여야 하기에 신마력을 유지할 수 없다.
“젠장.”
이렇게 생각하니 또 한계점이 명확히 보였다.
‘이러면 안 돼.’
석찬의 주먹에 강마력이 맺혔다. 강마력을 사용한 지 어느덧 15년이 다 되어가고 있기에, 컨트롤은 정확하다 못해 손발을 다루듯이 쉬웠다.
콰직!
강마력 뭉치가 괴조의 머리를 으깨버리고, 이어지는 마력 창이 날개를 꿰뚫는다.
콰광!
대지로 추락한 괴조를 빠르게 처리한 석찬.
‘다행히 그리 강한 녀석은 아니야.’
중급 악마 정도의 강함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조를 손쉽게 잡아낸 석찬. 그런 그에게 또 다른 괴조 무리가 다가왔다.
쿠오오.
다시금 강마력을 발현한 석찬이 도약하려는 순간이었다.
“라우르?”
잠시 후.
쾅!
하늘에서 추락하는 무언가와 함께 라우르가 다시 몸을 드러냈다.
“저건…”
추락한 것을 확인한 석찬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괴조 무리를 저렇게 간단하게…’
공중에서 괴조를 학살 중인 그를 바라보며, 석찬이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굉장해.’
아무리 석찬이 괴조를 손쉽게 제압했다 한들, 한 마리 한 마리가 무려 중급 악마만큼 센 녀석이다.
‘역시 라우르다.’
파스스.
그의 손에 맺힌 녹색 구에 닿은 괴조 한 마리가 산화해 흩어졌다.
‘파괴.’
신력이 있을 때는 석찬 또한 다룰 수 있는 기술이지만.
‘지금은 꿈도 못 꾸지.’
그사이 괴조 무리를 전멸한 라우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떠냐?”
“대단하시네요, 역시.”
“내가 누군데, 당연하지. 그나저나, 음… 아직 완벽하게 돌아온 것 같지는 않네.”
팔을 빙글빙글 돌린 그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현재 라우르는 갓 부활한 상태라 그런지 몸 상태를 전성기와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뭐, 그럼에도 강한 것은 여전했지만.
‘정말 궁금해지는군. 전성기 때 그의 모습은…’
기억 속에서도 몇 번 보았던 전성기의 라우르. 실제로 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단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뭐, 이쯤 되었으면 말해줘야겠지?”
“뭘요?”
“내가 널 여기 데려온 이유.”
그 말에 석찬이 눈을 밝혔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게요. 뜬금없이 마계로 온 이유가 뭐죠?”
“뭐긴 뭐 때문이야. 수련이지.”
“수련?”
“그래 인마. 너 강하긴 한데, 알지? 그 정도로는 녀석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거.”
녀석들, 라우르를 배신자로 몰고 간 신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특히 마신 놈. 예전에 한 번 봤겠지만, 녀석은 강해. 그 시절의 나와 비슷하게 강한 녀석이니까.”
전성기의 라우르와 동급의 강함. 하긴, 그런 이가 도왔으니 천계도 라우르를 추방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어. 녀석은 더 강해졌어.”
“……”
“일단 나는 개죽음을 당하기 싫거든. 너도 그렇지?”
“예. 수련이 필요한 이유는 알겠어요. 그런데 수련을 하는데 왜 굳이 이곳을…”
천계 소속 인간에게 주어지는 특혜 중 하나인 훈련 공간 제공. 물론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겠지만, 탑 내에서도 수련에 좋은 장소는 얼마든 있다.
하지만 라우르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마계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유라고 하면 어떤…”
“지금 말해줄 테니까 닥치고 들어.”
그렇게 말하며, 라우르가 마계로 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석찬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 그렇다고요?”
믿을 수 없겠다는 양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모습에 라우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맞는다니까? 내가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
“몇 번 본 것…”
“뭐, 인마?”
앞서 말한 대로, 석찬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짧은 순간 동안 라우르의 말을 여러 번 곱씹은 그가 생각했다.
‘정말 마계가 라우르가 말한 대로라면…’
아마 이곳에서 자신은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지평선 너머에서 작은 먼지구름이 몰려오고 있지만, 석찬과 라우르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