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라우르 부활 진행 속도]
[1%]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석찬은 주먹을 휘둘렀다.
‘저게 100%가 찰 때까지 버텨야 하는 건가?’
“죽어라, 올킬러!”
어느샌가 방어선을 뚫고 석찬에게 달려드는 상급 천사 하나.
강신을 사용할 수 없는 현시점, 석찬에게 있어 상급 천사는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존재였다.
하지만.
쾅!
석찬은 정면 대결을 택했다.
“석찬 님?”
“야, 괜찮겠냐?”
옆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보내왔지만, 석찬은 개의치 않았다.
‘강신 없이 이 정도에서 무너지면….’
그는 라우르의 기억 속에서 봐왔던 신들을 떠올렸다. 비록 라우르에게 힘없이 당하던 그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강했다.
“크합!”
콰직!
상급 천사를 밀쳐낸 석찬이 신력을 발동시켰다.
“어떻게 그 힘을…?”
현재 라우르는 석찬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통상적으로 신이나 천사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신력의 사용은 불가하다.
“쟤, 까먹은 거 아니지?”
석찬이 가리킨 곳에는 플로네라는 천사장과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에피르의 모습이 보였다.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누군 맘에 들었는지 알아?”
쾅! 쾅!
일격 하나하나에 대지가 붕괴되고 대기가 갈라졌다.
‘저게 천사장들의 싸움인가.’
일전에 엘리자베스와 겨룰 때는 둘 다 진심을 사용하지 않아 몰랐는데, 역시 에피르는 강했다.
“에피르! 신력 좀 빌린다!”
“알아서 해요!”
쾅! 콰직!
허락을 받고 다시 눈길을 돌린 석찬이 에피르에게서 끌어온 신력을 운용했다.
‘라우르의 것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뭐 이 정도라면…’
석찬이 자연스럽게 신력과 마력을 뒤섞었다.
신마력.
세계에서 가장 이질적인 힘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불경스러운 힘은 도대체…”
상급 천사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 들었다.
“덤벼.”
순간, 상급 천사의 손에 들린 도끼가 사라졌다. 어느새 코앞에 나타난 도끼.
픽!
종이 한 장 차이로 석찬의 눈을 비껴간 도끼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래도 신마력은 신마력이라는 걸까? 강신이 없음에도 상급 천사와 어느 정도 합을 겨루는 것이 가능했다.
“이… 고작 인간 주제에…”
인간 따위를 제압하지 못해서 그런지 천사가 얼굴을 붉히더니 더더욱 거센 힘으로 석찬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큭, 이건 조금 위험한데?’
쾅!
천사의 신력에 튕겨 난 석찬이 바닥을 굴렀다.
촤좌좍!
갑옷이 두부처럼 썰려 나가고, 피가 배어 나왔다.
‘위험해.’
아무리 신마력을 사용할 수 있어도, 강신이 없는 이상 큰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었다. 그럼에도, 석찬은 달렸다.
콰직!
팔을 맞고 튕겨 나온 도끼가 등을 향해 쇄도했다.
팍!
간신히 도끼를 쳐냈지만,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새어 나왔다.
“큭…”
“이것이 필멸자와 우리의 차이다, 강석찬. 순순히 목을 내놓아라.”
“어림없는 소리.”
콱!
천사를 저 멀리 걷어찬 석찬이 신마력으로 이루어진 구를 생성했다.
콰과광!
마법이 근접 전투처럼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꾸준히 그리고 틈틈이 연습해 수준급 이상은 사용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네 녀석…”
그을린 머리끝을 휘날리며, 천사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감…!”
쿠구궁!
이어지는 거대한 폭격이 천사를 덮쳤다. 틈을 타 석찬이 상황을 확인했다.
[47%]
꽤나 오래 버텼다고 생각했다만, 아직도 절반조차 차지 않은 게이지.
‘게다가 다른 곳 상황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이브, 진현, 천무진, 렐 그리고 누군지 모를 남자 두 명 모두 나름 잘 싸워주고 있었다.
하지만 수적 열세 때문인지 조금씩 밀리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엘리도 제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에피르는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그런 와중에서도 유일하게 제 몫을 해주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안내자 G.
촤좌좍! 콰광!
무자비하게 신력의 채찍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진짜 정체가 뭐야?’
G, 그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내였다. 라우르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렇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쿠구궁.
거대한 돌덩이들을 치우며 팔을 내미는 상급 천사를 향해 다시금 도약한 석찬이 주먹에 신마력을 가득 머금었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천사의 팔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그런데도 석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콰과과광!
맹렬한 연격을 가하는 석찬. 예상치 못한 공격 때문인지 천사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이윽고.
쿵-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뒤로하며, 석찬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49%]
남은 퍼센트는 51%.
그 안에 남은 천사들을 싹 다 족치고 레벨을 잔뜩 올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91%]
어느새 게이지는 90퍼센트대로 접어들었고, 석찬의 눈앞에 땅을 가득 메운 천사들의 시신이 보였다.
“헉, 헉.”
이브를 포함한 사람들이 하나둘 바닥에 주저앉는다.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이 흘렀지만, 수백의 천사를 상대하니 체력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휘유, 오랜만에 움직이니 힘들군요.”
G 또한 채찍을 거두며 석찬 쪽으로 다가왔고, 에피르는 치열한 혈전 끝에 천사장의 날개를 전부 뜯어내며 승리를 확정 지었다.
“에피르 님… 앞으로 천계가 당신을…”
“말했잖아, 플로네. 난 이제 돌이킬 수가 없어.”
푹-
성창으로 천사장의 가슴을 꿰뚫은 그녀가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석찬에게 향했다.
“에피르.”
“당신… 아닙니다. 말을 말아야지.”
말과는 다르게 할 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릴 왜 도와준 거야?”
솔직히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자신들을 도와줄 이유 따윈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게 있어요. 진짜… 울고 싶다.”
석찬의 얼굴을 보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친 그녀가 하늘을 바라봤다.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메시지로 봤을 테지만, 천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괜찮아.”
“괜찮기는 개뿔, 아까 상급 상대로도 쩔쩔맸으면서.”
훅 뼈를 때리는 그녀의 말에 석찬이 몸을 움츠렸다.
“그나저나… 라우르는 언제…”
[99%]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게이지는 빠르게 차올라.
[100%]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라우르의 부활’ 퀘스트가 완료되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변화가 일어난 중심은 바로 투신의 신위가 담긴 마이클의 시체.
휘오오-
그의 가슴에 박힌 신위를 향해 바람이 몰려오더니, 시체가 점점 공중으로 부양하기 시작했다.
‘저 기운은…’
마이클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신력에 석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라우르.’
어떻게 살아났는지 의문이 들기도 잠시, 석찬의 퀘스트의 제목과 내용을 상기했다.
‘부활.’
그렇다. 마이클의 시체 그리고 영혼이 담긴 투신의 신위를 매개로 그는 되살아나고 있었다.
파아앗.
마이클, 아니 라우르가 공중에 뜬 지 얼마나 지났을까?
스으윽,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원래의 벽안은 사라지고 녹안을 장착한 채 말이다.
“라우…르?”
석찬의 부름에, 라우르가 찰랑거리는 금발을 한번 쓱 훑더니 씩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 이 느낌.”
“라우르? 라우르 맞아요?”
재차 묻는 석찬.
“어디 보자, 힘은…”
하지만 여전히 그를 무시하며 몸 상태를 체크하는 라우르.
빠직-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석찬이 그에게 다가갔다.
쿵~
그러자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의 몸을 덮쳤다.
‘이건…’
라우르 특유의 녹색 기운과 신력이 섞인 위압감. 그의 기억에서 몇 번 봤었다.
‘그런데 이걸 왜?’
라우르는 이 위압감을 다른 신들, 특히 자신과 척진 자가 아니면 꺼내 들지 않았다.
그때 그의 녹안이 천천히 석찬을 향했다.
“라우르?”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석찬을 응시하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간 번뜩하는 살기에 석찬이 빠르게 양팔을 교차했고,
콰-앙!
동시에 거대한 폭음이 진동하며 석찬의 몸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큭!!”
뼈가 부러졌는지 덜렁거리는 팔을 뒤로하며, 석찬은 저 멀리서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라우르와 눈이 마주쳤다.
훙-
어느새 자신의 앞에 당도한 그를 보며, 석찬이 빠르게 팔을 회복시켰다.
“라우르, 왜…”
이번에도 그는 말없이 다시금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
이에 가만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석찬 또한 막 회복된 팔에 마력을 가득 들이부었다.
콰과광!
라우르의 안면에 닿은 주먹이 폭발하며, 그가 뒤로 주욱 밀려났다.
“…….”
나름 세게 때렸건만, 별 대미지는 없어 보였다.
주륵-
코에서 핏방울이 한 줄기 흘러내린 정도? 그것이 라우르가 입은 대미지의 전부였다.
“이게 전부냐?”
드디어 입을 연 라우르. 목소리는 달랐지만, 석찬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이 알던 라우르라는 것을 말이다.
“라우르, 갑자기 왜 공격을…”
“닥치고, 한 번 더 간다. 다치기 싫으면… 이 악물어라.”
그가 그렇게 말하며 전보다 더욱 거대한 힘을 실어 주먹을 날리려 하자 석찬이 경악하며 몸을 날렸다.
쿠콰과광!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게다가 그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깔끔하게 도려낸 듯한 절단면 사이사이에는 용암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 범위가 대충 봐도 수백 미터는 됐다.
‘이건 못 막아.’
강신을 사용했을 때의 마이클? 아니면 조금 전까지 한창 혈투를 벌이던 두 천사장? 장담할 수 있는 건 그 누구도 지금 라우르의 힘을 대적할 수 없다.
그것을 아는지 에피르도, 엘리자베스도,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석찬을 돕지 못하고 멀리서 둘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헉, 헉.”
라우르의 공격을 피한 석찬이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섰다.
전투에 대한 피로 따위가 아니었다. ‘신’을 상대한다는 정신적인 피로, 그것이 석찬의 속을 끊임없이 좀먹었다.
그런 상태를 정확히 아는 그는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100% 패배한다. 물론 상황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그래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쿠구궁.
그의 곁으로 막대한 양의 신력이 몰려들더니, 다시금 신마력을 형성해냈다.
“신마력, 드디어 쓰는 거냐?”
그것을 본 라우르 또한 제대로 자세를 잡고 받아칠 준비를 했다.
“…….”
“…….”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적막이 흐르고, 격돌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받아줄 것 같았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석찬이 빠르게 허리를 비틀어 공격하려고 했지만,
퍽!
너무나도 간단하게 공격을 허용한 석찬이 쓰러졌다.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오케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충 알겠군.”
무언가를 중얼거린 라우르가 석찬을 둘러메더니 이브가 있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얘 좀 잠깐만 빌린다! 한 하루면 될 거니까 걱정 말고!”
“예?”
“대충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우르는 사라졌다.
휘이잉.
“…….”
모든 것이 끝난 전장 위에는 적막만이 맴돌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