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라우르와 18신의 싸움.
1 대 18, 단순히 쪽수로만 보면 절대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이었지만, 라우르는 달랐다.
콰직!
그가 휘두른 주먹에 세 명의 신이 동시에 허공을 날았다.
“라우르를 막아!”
“전력을 다해!”
그 모습에 신들도 반격을 개시했다.
쿠오오오.
한 신이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변화했고, 주변에서 불과 물의 폭포가 쏟아졌다.
파직!
‘이건….’
사지를 속박한 번개의 사슬에 라우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잔재주를.”
콰직, 간단하게 사슬을 풀어낸 라우르가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무언가가 쓰러졌다.
“어, 어떻게…!”
천천히 실루엣이 드러난 그것은 사람이었다.
‘은신 마법을 사용했던 건가.’
신이라서 그런지 숙련도가 어마어마했다. 석찬조차 구분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쉽게 잡아내다니.’
라우르가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허접한 놈들은 다 꺼지고, 들어와. 뒤에 놈들.”
라우르의 외침에 9명의 신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9명의 신들이 눈을 부라렸다.
“어딜 하찮은 인간 따위가.”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는 남자 신이 삼지창을 꼬나쥐었다.
“해신아, 계속 그렇게 입만 털지 말고 덤비기나 해라.”
빠직.
그 도발에, 해신이 있는 힘껏 삼지창을 집어던졌다.
후웅-
하지만 가볍게 삼지창을 치운 그가 씩 웃었다.
“눈을 어디다가 가져다 놓은 거냐?”
“자만하지 마라, 라우르.”
푹!
순간 벽에 꽂힌 삼지창이 다시 돌아오며 라우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큭.”
“어떠냐, 라우르. 이것이 신기다.”
‘신기?’
“지금껏 대련에서는 신기를 사용하지 못했기에 제대로 싸우지 못했지. 허나.”
주르륵.
옆구리에 박힌 삼지창에서 바다를 연상케 하는 방대한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쿠헉!”
내장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라우르가 피를 토했다.
“이제는 다르다. 우리의 진가는 신기를 사용해야 나타나니.”
“큭, 장비발인 놈이 말이 많아. 그리고…”
푸확!
옆구리에 꽂힌 삼지창을 뽑아낸 라우르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할 맛이 나겠어.”
그의 안광이 밝게 빛났다.
쾅!
또한 짙은 녹발이 새하얀 백발로 변모했다.
‘저 모습은….’
석찬도 잘 아는, 자신이나 마이클이 강신을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외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억 속에서 이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드디어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싸우시는 건가….’
라우르는 평상시 모습과 전투 시 모습이 달랐다.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일 때, 그는 석찬도 잘 아는 백발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그 모습의 라우르는.
‘강하다.’
콰직!
“커헉!”
어느샌가 해신 앞에 도달한 라우르가 그의 명치를 강타했다.
쾅!
벽에 날아가 박힌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흐아압!”
여러 신이 동시에 라우르에게 덤벼들었지만, 번번이 막히고 쓰러질 뿐이었다. 얼마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털어낸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신 무리를 보며 소리쳤다.
“야, 약한 새끼만 내보내지 말고, 니들이 와라.”
라우르는 그중에서도 가운데에 있는 신을 유독 노려봤다.
“…….”
파괴신, 그가 짧은 흑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라우르 앞으로 다가왔다.
“라우르, 더 강해졌군. 그 힘으로 절대신을 해한 건가?”
“아까부터 계속 개소리를 하는데, 난 그런 적 없다.”
“거짓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라우르는 입을 닫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는다.”
파괴신이 지팡이를 쥐었다.
“네 녀석도 신기냐?”
“신기는 모든 신이 가진 것. 사용하지 않는 놈이 멍청한 것이지. 너만 빼고 말이야.”
파괴신의 지팡이에서 검은 힘이 쏘아졌다.
피융, 콰광!
대련실 벽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바람에 휘날리는 백발 사이로, 시퍼런 녹안이 번뜩였다.
쾅!
“크억!”
파괴신의 목을 힘껏 움켜쥔 라우르가 자신을 둘러싼 신들을 보며 말했다.
“이 새끼 목 따이는 거 보고 싶으면, 계속해.”
꾸드득.
점점 안색이 옅어지는 파괴신을 보며 신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를 보며 라우르의 머리색이 다시금 녹색으로 돌아왔다.
“너희 고작 이 정도 힘으로 날 막아 세운 거냐?”
“큭….”
라우르가 내뿜은 압도적인 신력에 신들이 주춤한 사이, 그가 파괴신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큭.”
“야, 파괴신.”
“뭐냐….”
“뭐긴 뭐야,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을 말이냐?”
거듭된 물음에 라우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백발의 신을 불렀다.
“천신 너도 일로 와봐.”
염동력으로 천신을 끌어온 라우르가 두 신을 자기 앞에 앉혔다.
“큭….”
“솔직히 말해. 누구 짓이야.”
라우르는 여전히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고든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라우르가 힘을 불어넣자, 천신이 몸을 덜덜 떨었다.
“지…진짭니다! 이번 일의 배후는 저도 모르겠어요, 그저 구실 하나 잡아서 당신을… 헉.”
겁에 질려 계획을 발설하는 천신에, 다른 신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라우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들었지? 얘 죽인다? 감히 누명을 씌우려고 하고 있어.”
라우르의 팔 주위에 녹색 불길이 일었다.
“힉.”
천신이 몸을 떨었지만, 라우르는 자비 없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으려고 했다.
푹-
“엉…?”
자신의 가슴을 뚫고 올라온 날카로운 물체에, 라우르가 피를 토했다.
‘뭐야?’
석찬은 붉은 피로 칠해진 검은 송곳 그리고 이와 연결된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이야, 드디어 성공했네.”
한 남자가 검은 송곳을 회수하며 머리를 쓸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붉은 눈동자와 특유의 마력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마신.’
마신이 뿜어내는 힘은 엄청났다. 아니, 엄청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 새끼,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거냐?”
라우르가 반응하지 못했다. 물론 진심인 상태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충격은 컸다.
“마신….”
“어떻게 천계에.”
다른 신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남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거대한 전쟁을 치른 존재 아닌가? 그런 놈이 갑자기 본진 한가운데서 나타나니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이에 마신은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아아, 별거 아니야. 내 목표는 그저 이놈 하나뿐이니까, 다들 하던 거 마저 해.”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슬쩍 빠지는 마신. 그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피를 토하는 라우르를 바라봤다.
“참고로 내 송곳에는 나조차도 닿으면 죽을 정도의 극독이 발려 있으니까, 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이 거짓은 아닌지, 라우르의 입가에 맺힌 피가 점점 검게 변했다.
“이 자식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라우르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 모습에 모든 신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죽은 거야?”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18신 모두를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가져가던 신의 허망한 최후에 모두가 벙찐 가운데, 마신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왜, 하던 거 마저 하라니까?”
그가 송곳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얘 죽인 거? 솔직히 니들도 싫어했잖아. 아니야?”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천신이 비틀거리며 마신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지금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문제라고? 문제랄 것이 있나?”
난 그저 골칫덩어리 하나를 처리해줬을 뿐이고, 너희는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아까 다 들었어. 너도 저 녀석 묻으려고 했던데.”
“…….”
마신이 정곡을 찌르자, 천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여기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마셔. 서로 싫은 거 하나 없앴다고만 생각하자고, 오케이?”
“…절대신의 일에도 네 녀석이 관련된 건가?”
파괴신의 물음에 마신이 고개를 내저었다.
“난 관련 없어. 고든 님은 적이지만 존경할 만한 강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까. 그리고 한 가지 조언해주자면…”
그는 고든의 시체를 향해 말했다.
“고든 님의 죽음은… 파헤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뭐라고?”
“뭐, 내 말을 듣든 아니든 별 상관 없는데,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새겨듣는 것이 좋을 거야.”
“…….”
“뭐, 그럼 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만 가볼까? 다음에 만날 때 우리는 적이야.”
“…….”
“라우르에다가 고든 님도 없는데 너희들이 과연 버틸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일단 오늘은 이만!”
마신은 그렇게 말하며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쿵!
“어딜 가려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쓰러져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오우….”
마신이 일어난 남자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떻게 일어난 거지?”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것 아니야?”
라우르는 온몸에 핏줄을 곤두세웠다. 머리카락은 이미 백색이 되어 있었고, 다 죽어가던 안광이 사납게 타올랐다.
“뒤졌어.”
막강한 살기에 신들이 기절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와중에도 마신은 가만히 서서 그를 관찰했다.
잠시 후, 휘청이는 그를 보며 마신이 조소했다.
“음, 그럴 수 있겠어? 내가 볼 때는 움직이는 것도 힘든 것 같은데?”
“…….”
그 말이 사실인 듯, 라우르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대단하군. 나조차도 그 독을 맞으면 생사를 장담 못하는데….”
촥!
무언가가 날아갔다. 자세히 보니 라우르의 왼팔이었다.
“이런 것에도 반응하지 못하다니… 아쉬워라.”
촤좌좍!
마신의 무기들이 라우르의 몸을 난도질했다.
“크으윽….”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그를 보며 마신이 이마를 탁 쳤다.
“미친놈, 그래 이 정도로는 안 죽는다 이거지?”
마신이 아공간에서 검 하나를 뽑아 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영혼을 조각내는 검이야.”
“…….”
“한 여섯 개로 나누면 되겠지?”
촤좌좍!
검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라우르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그의 가슴 위로 여섯 개의 보석이 떠올랐다.
“후우….”
빗방울처럼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낸 마신이 검을 다시 아공간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뭐, 처리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 그럼 진짜 이만.”
마신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이후 장면은 다시 전환되어….
“……”
여섯 장의 날개를 단 천사가 보였다. 과거 라우르의 기억에서 몇 번 봤던 자였다.
아이테르.
아직 천사장이었던 그는 품속에서 작은 보석 여섯 개를 꺼내 들었다.
“어찌 이리되셨습니까?”
라우르의 영혼 조각을 쥔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위에서는 저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지만….”
그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저는 아직 당신을 떠나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이테르의 눈앞에 한 건축물이 생겨났다.
탑.
라우르가 그토록 완성되기를 원치 않던 그것이었다.
“당신이 없는 이상 탑의 완성은 시간 문제겠죠. 그렇다면…”
그가 탑을 향해 영혼 조각을 던졌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당신께 어울리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라우르의 기억이 완전히 종료되고, 석찬이 눈을 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