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에피르, 천계의 천사장이자 석찬의 담당 천사인 그녀는 석찬이 라우르의 화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라우르.
과거, 천계를 주름잡았다고 여겨지던 최강의 신이자 천계 최악의 배신자로 기록되어 있는 그가 석찬의 주신이었다니?
많은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오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은 역시 충격이었다.
충격과 공포, 지금 그녀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이것보다 좋은 단어가 없었다.
‘아니야, 거짓말일 거야. 그 라우르라니?’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기까지 할 정도로 그녀가 느낀 충격은 컸다.
그러는 와중, 그녀의 방 밖에서 소란이 났다.
“들었어? 에피르 님이 담당했다던 인간.”
“들었어. 강석찬이라고 했던가? 그 투신 라우르의 화신이라며?”
투신 라우르, 비록 추방당하긴 했어도 그가 만들어낸 파장은 지금껏 천계에 일어났던 그 어느 사건보다 컸다.
“에피르 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그랬겠어? 그랬으면 그 인간과 계약하지 않았겠지.”
그 말에 에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만약 석찬이 다른 신이 아닌 라우르의 화신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계약은커녕 그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내 불찰이다.’
하지만 그때,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아니야, 혹시 몰라.”
‘응?’
“에피르 님이 만약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무슨 소리야, 그게?”
“혹시 알아? 에피르 님이 강석찬이라는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데 미리 묵인하고 있었을 수도 있어.”
‘무슨 개소리를….’
“생각해봐, 천사장씩이나 되는 분이 신의 힘을 구분하지 못하셨을 리가 없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천사장이 신의 힘과 천사의 힘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니까. 하지만, 문제라고 한다면.
‘난 그게 파괴신인 줄 알았다고!’
솔직히 그 정도 신력을 보유할 만한 신으로 파괴신 말고 다른 신을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천사들 사이에서 한 가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에피르는 강석찬의 정체를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젠장.’
천계가 아무리 커도 몇천 명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소문이 퍼지는 데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급기야 몇몇 천사가 에피르의 방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에피르 님, 그게 정말 사실…”
“아니라고!”
결국 극에 달한 스트레스에 에피르는 방에서 탈출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런 그녀에게 한 천사가 다가왔다.
여덟 장의 날개,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색의 장발, 아이테르였다.
“아이테르 님.”
“에피르 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당신도 소문을 믿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 말에 에피르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사실입니다. 에피르 님께서 어찌 생각하셨겠습니까? 그분은 무려 3,000년 전에 이곳에서 추방당하고 기록이 말소되신 분이신데.”
“그러면 어째서 저를…”
“저와 다른 천사분들의 생각은 다른 법이니까요.”
아이테르는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반 강석찬 연합을 아시죠?”
“네…”
대천사를 필두로 강석찬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여 만든 조직.
지금 사태에서 그들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당신을 추방하려고 하더군요.”
“…….”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리 석찬이 라우르의 화신이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먼저 알지 못하고 성장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핑계는 충분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세력을 더욱 커질 거고.’
“젠장.”
낭패라는 듯 주먹을 꽉 쥐는 그녀에게, 아이테르가 말했다.
“하지만,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 * *
쾅!
플로네, 천사장 중에서 중상위권의 강함을 뽐내는 강자인 그녀를 내친 에피르가 이를 갈았다.
“그래,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그녀는 아이테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앞으로 당신의 입지는 계속해서 줄어들 겁니다. 아마 천사장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죠. 잘못하면 추방까지도 가능할 거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 상황에.’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석찬 님의 편이 되세요?’
‘뭐라고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에피르는 아이테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석찬의 편이 되라니?
‘날 이 꼴로 만든 녀석의 편을 들라고?’
그게 무슨 개뼈다귀 씹어 먹는 소리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아이테르가 말을 이었다.
‘천계에는 더 이상 당신의 편이 없습니다. 그걸 감안한다면 충분히 합당하지 않나요?’
‘그렇지만!’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번 고난을 잘 이겨낸다면… 석찬 님은 더더욱 성장할 겁니다.’
‘성장한다고요?’
‘만약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제껏 성장과는 격이 다를 겁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시길.’
솔직히 고민도 됐다. 만약 여기서 석찬의 편을 든다면? 헛소문들을 완전히 인정하는 꼴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아이테르의 말도 사실이었다. 만약 진실을 제대로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그사이에 자신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일이 끝났을 때는 재기 불능한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과감히 결단했다.
“에피르…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겁니까?”
원망 어린 플로네의 질문에 에피르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허공에 손을 뻗을 뿐이었다.
휘오오-
그러자, 바람이 그녀의 손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부름에 응답해라, 성창이여.”
시동어와 함께 순백의 창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성창 에피르, 천계에 단 10개 밖에 없다는 성스러운 무기의 등장에 플로네가 이를 갈았다.
“그건… 진정 싸우려는 겁니까?”
“나한테는 더 이상 뒤가 없어.”
에피르가 성창을 꼬나쥐었다.
“에피르!”
콰왕!
그렇게, 두 천사장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검은 공간.
‘싸움이 시작되었어.’
G는 진동하는 결계를 살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먼.’
석찬이 라우르의 화신이었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남자가 미간을 쓰다듬었다.
‘이 양반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그의 눈길이 쓰러진 석찬과 마이클의 시체로 향했다.
환한 빛이 일고 있는 두 남자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말이다.
‘뭘 하고 있든 빨리 끝나야 할 텐데 말이지.’
그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래야 이걸 주든 말든 하지.’
그의 품에 담긴 상자, 그 상자 안에 있는 무언가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 * *
라우르의 기억 속.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석찬은 여전히 라우르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아직도 있는 건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절대신 고든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는 당신도, 여전하네요.’
“뭐, 그렇지. 하하!”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며, 석찬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기억 속의 인물에 불과한데 어째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지, 또 대화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은 이미 알아내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절대신 고든.
그는 정말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우선, 압도적인 무력.
“젠장, 다음에 두고 보쇼!”
녹발의 중년, 투신 라우르가 이마에서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내며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저 시절의 라우르를 압도하는 힘이라니.’
이미 기억을 읽는 동안 천마 대전은 끝나 있었다. 라우르와 고든은 전장을 누비며 악마들을 학살했고, 마신과의 결투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둘의 승리로 끝나 있었다.
거대한 전장에서 그는 더더욱 강해졌고, 고든을 제외하고는 신계의 18신 중 그 누구도 그를 막아 세우지 못했다.
‘파괴신이라고 했던가?’
먼 옛날, 라우르가 언급한 적 있던 신계의 3인자. 천마대전에서 누구나 인정할 공을 세운 그조차도 라우르와의 대련에서 열 합을 채 못 버텼다.
하지만, 고든은 라우르를 5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손쉽게 제압했다.
“저 녀석도 참 끈질겨. 언제까지 달려들려는 건지 원.”
‘그나저나, 당신이 분명 적절한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 그 ‘때’가 오는 거야?’
그렇다. 고든은 분명 지금이 어떤 ‘때’라고 했다. 그리고, 그 ‘때’가 온다고 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체감상 그런 것이니 실제 시간은 더 흘렀을 것이 분명했다.
“기다려 보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
고든은 대련장 한 편에 걸린 거대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한 일주일만 더 기다리라는 거지?’
“그런 건가? 하하!”
그런데 잠시 후, 일이 터졌다.
‘어?’
전환된 시야 속, 석찬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건?’
석찬의 앞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석찬도 잘 아는 곳이었다.
라우르와 고든이 수십 번이나 대련을 나눴던 대련장 아닌가?
그래, 공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십자가에 걸린 존재라고 할까?
‘말도 안 돼.’
고든.
라우르를 간단하게 제압할 정도로 강력한 신이자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석찬과 살갑게 대화했던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그의 피부에는 생기가 돌지 않았다.
‘저게 무슨….’
그의 손과 발, 그리고 몸 이곳저곳은 수십 개의 병장기가 얽혀 있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고든?”
어느 때처럼 대련을 준비하며 대련장으로 들어서는 라우르였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고든을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기 누구 없냐! 빨리 와 보거라!”
하지만 라우르의 외침에 어떤 천사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한 무리의 남녀가 다가왔다.
20신 중 라우르와 고든을 제외한 18신 전체였다.
“라우르, 거기서 뭐 하냐? 엉…?”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신이 그를 지나치려다가 대련장 안의 처참한 상황을 보고 멈춰 섰다.
“저게 무슨….”
선두에 서 있던 남자, 파괴신이 싸늘한 시신이 된 고든과 라우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라우르, 이게 무슨.”
“파괴신? 갑자기 절대신이…”
파괴신의 옆에 붙어 있는 여인, 대지신이 말했다.
“절대신께서 어찌… 라우르, 설명하세요!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나도 몰라! 평소처럼 여기 왔는데 이런 상황이…”
그때, 파괴신이 입을 열었다.
“라우르, 설마.”
“응?”
“네 녀석이 절대신을 저리 만든 건가?”
“그게 뭔 개소리냐?”
“생각을 해봐라. 우리 중에 절대신을 상처 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만약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순간, 모든 신의 이목이 라우르에게로 집중되었다.
“너 아닐까?”
갑작스럽게 궤변을 늘어놓는 그에 라우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개소리 집어치워라. 내가 그럴 놈 같냐?”
“충분히 가능하죠.”
“응?”
백발의 미남자, 천신의 말에 라우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인간 출신으로서 우리 신들과 꽤나 큰 마찰을 자주 벌여 왔으니까요.”
“그거랑 그거가 무슨…”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당연히 관계가 있죠. 절대신께서는 저희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당신께서는 그런 분께 질투와 앙심을 품고 신계 최악의 반역을 벌인 겁니다.”
“뭐?”
라우르가 항변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천신의 말과 함께 모든 신이 라우르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