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또 다른 라우르, 그는 강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와 라우르의 전투를 지켜보던 석찬은 그가 라우르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인마?”
라우르가 거세게 반문했지만, 솔직히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젠장. 영혼 조각 세 개분이라 그런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총량도, 투신으로서의 기술도 자신보다 많았다.
쿵!
때마침, 다시 한번 새로 보는 공격 기술에 석찬의 몸이 날아갔다.
“큭, 이번 건 또 뭐야? 젠장.”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라우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어?”
익숙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석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여인이었다.
“야, 너! 피해!”
화신의 연인인 만큼 최대한 다정(?)하게 경고한 라우르가 다시금 또 다른 자신을 향해 도약했다. 하지만 역시나 힘에 부쳤다.
“크윽…”
비록 이 몸은 전신의 가호가 있었기에 피로가 누적되지 않는다만.
“어디 계속해 보거라!”
저 녀석은 대체 어떤 녀석이란 말인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 화신이 궁금한가? 궁금해 미칠 지경인가?”
때마침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녀석에게 라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뭐 하는 괴물이야? 그리고 궁금하긴 한데 미칠 것 같지는 않…”
“마이클 로시난데. 이 녀석은 말 그대로 본능의 괴물이지.”
마이클, 그것이 남자의 이름인가 보다. 생각보다 평범한 이름이지만, 그 재능만큼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본능이라.’
본능.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의 효과와 위력을 뿜어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투와 관련된 본능이 뛰어나다면?
‘하지만, 녀석의 공격은 말 그대로 짐승의 본능. 전투의 본능이 아닌 그저 휘두르기식…’
“아까 놈이 마을에서 술을 진탕 퍼질러 마셔서 그런지 조금 맛탱이가 가서 제대로 못 보여준 것은… 뭐, 미안하다. 대신 내가 상대해주고 있지 않냐? 감사하도록 해라, 인간. 아니, 나.”
‘그런 거였나.’
그때, 또 다른 자신의 말에 라우르가 반문했다.
“눈이 낮군. 본능? 본능 좋지. 하지만, 기술은? 녀석의 기술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내 화신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못 되지.”
그 말에 또 다른 라우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맞긴 해. 이 녀석의 기술은 쓰레기지. 솔직히 어떻게 마력을 그렇게 단련했나 모를 정도라니까?”
하하 웃는 또 다른 라우르.
“그런데, 그게 뭐? 어차피 내가 강신을 하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닌가?”
이와 동시에, 그의 손 위로 수십 개의 신력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뭐, 대화는 이쯤 하고, 다시 해야지? 이제부터는 안 봐준다.”
그리고, 또 다른 라우르의 힘이 상승했다.
‘이런 미친.’
라우르와 석찬이 동시에 침음했다.
‘이대로는 밀린다.’
둘은 직감했다. 이대로는 자신들은 물론,
흘끔-
아래에 있는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거라고.
자신들의 싸움을 막기 위해 온 듯한 이브와 인간 무리는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방해되게…’
“당장 꺼져! 죽기 싫으면!”
“엇, 알았… 넵!”
라우르의 일갈에 모였던 인간 중 태반이 달아났다. 분명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명감과 퀘스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그들이었지만, 그야말로 천외천의 싸움에 감히 끼어들 재주도, 깡도 없었다.
이 와중에도 묵묵히 서서 싸움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브, 진현, 천무진, 엘리자베스, 렐, 이 다섯 명은 각자 무기를 들은 채 마력을 개방했다.
천무진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악마화를 사용했다. 붉게 변한 눈이 어둡게 빛났다.
이브와 진현은 새로운 지팡이와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었고, 렐은 제 키만 한 장궁을 꺼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고오오-
그녀의 기운이 미친 듯이 치솟기 시작했다.
공작급 악마의 힘이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호오? 저 악마는 꽤 훌륭하구나.”
또 다른 라우르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석찬을 만난 이후 한 번도 꺼내지 않던 무기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칼처럼 새빨간 지팡이였다.
“역시, 악마였나.”
“굉장한 힘이다.”
이브 일행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은 오펠리아와 비유도 흠칫했지만, 그들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파앗.
그들의 몸을 새하얀 신력이 감쌌다. 천사의 힘이었다. 이를 보고 비유가 오펠리아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오펠리아, 강신을 사용하지 않는 건가?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그렇다. 신의 화신인 오펠리아는 천사의 힘을 사용하는 것보다 강신을 하는 것이 더욱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심지어 저 위에서 싸우는 자들도 강신을 한 채 싸웠기에, 강신이 가능하다면 강신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오펠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용없다. 지금 해신께서 부름에 답하지 않고 있어.”
그 말에 비유가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한 층이 괴멸할 위긴데…”
“나도 잘 모르겠다. 계속해서 접신을 시도하고 있긴 한데…”
하지만 그들도 몰랐다. 지금 두 사람, 아니 신들의 싸움에 천계가 발칵 뒤집혔다는 것을 말이다.
“은발의 천사와 동료들, 보조해줄 수 있겠나?”
그 말에 진현이 씩 웃었다.
“보조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거 아닌가?”
그 말과 함께 먼저 움직인 쪽은 천무진과 진현이었다.
쐐애액-
빛과 같은 속도로 또 다른 라우르에게 도달한 그들이 주먹과 검을 날렸다. 하지만,
턱.
가볍게 양팔을 뻗어 공격을 막아낸 그가 웃었다.
“멀었다, 애송이들.”
후웅!
가볍게 손목을 흔들었을 뿐이건만, 두 사람의 몸이 뛰어올랐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바닥에 추락했다.
“커억!”
피를 토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며, 이브는 치료와 함께 거대 마법들을 발동했다.
렐 또한 장궁에 거대한 화살을 걸었다.
콰과광!
거대한 폭발 사이로 화살이 날아가 또 다른 라우르의 허벅지에 꽂혔다.
푹!
섬뜩한 소리가 공격이 적중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기뻐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허벅지에서 금방 새살이 돋아났다.
“급속 재생까지? 젠장. 영혼 맞아?”
그 모습을 본 라우르가 침음했다.
“어이, 나. 흥분되지 않느냐? 이런 싸움, 이런 고양감!”
쾅!
그의 몸에서 더욱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더 강해졌는데요?’
석찬의 예상이 맞았다. 지금 싸움에서, 또 다른 라우르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무슨 사이어인도 아니고.’
“사이어인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젠장.”
라우르가 신력을 가득 들이부어 신력 무기를 띄운 채 주먹을 쥐었다.
그의 뒤로 빛의 날개를 단 두 남자가 떠올랐다.
오펠리아와 비유. 순백의 장갑과 도포로 몸을 감싼 인간들이었다.
“호오? 천사의 졸개?”
또 다른 라우르는 흥미롭다는 듯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라우르 또한 양옆으로 선 두 사람을 흘끔 살폈다.
“뭐냐.”
“어느 신인지 모르겠다만은… 가세하겠습니다.”
“왜 날 도우려는 거지?”
“퀘스트를 받았거든요.”
두 신의 싸움을 멈추게 하는 퀘스트. 원래 저지라 한다면 싸움을 중재하는 게 맞는다만.
‘중재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명백한 약자와 강자의 싸움. 그렇기에 그들은 약자의 편에 붙었다. 게다가 강자 쪽은 누가 봐도 악했다. 이쪽이 지면 퀘스트가 어떻게 됐든 멸망 확정이었다.
‘젠장.’
두 사람의 가세에 아래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 동료들을 본 라우르가 욕을 내뱉었다.
‘내가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서 싸워본 것이 얼마 만이지?’
3천 년? 4천 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이 내가, 신들을 무릎 꿇렸던 내가 이런 취급이라니.’
스스로의 무능함에 치가 떨렸고, 이는 분노로 이어졌다.
콰과광!
그 때문일까? 라우르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이 기운… 어느 신인지 궁금하지만, 지금 여쭐 때는 아닌 것 같으니.”
오펠리아의 눈이 또 다른 라우르에게로 향했다. 더욱 진해진 녹안이 검게 빛났다.
“자, 그럼 준비 다 됐으면 시작해볼까?”
“아니, 잠깐만.”
“응?”
여전히 폭발적인 기운을 뿜어내면서도, 라우르는 차분히 석찬에게 말했다.
‘석찬아, 듣고 있지?’
‘예.’
‘지금부터 싸움은 네가 해라.’
‘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묻는 석찬. 강신을 해도 시원찮은 상대를 자신보고 처리하라니.
‘강신 상태는 유지될 거야. 그냥 조종하는 영혼만 바꾸는 거다.’
‘이유가 뭔데요.’
라우르는 강하다. 전투 센스 또한 탁월하고 뭘 해도 자신보단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라우르의 생각은 석찬과 달랐다.
‘지금 상황에서는 네가 더 유리해.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은 못 하지만, 날 믿어라.’
드물게 진지한 투로 말하는 라우르.
‘그걸 써라. 다크 엘프 킹을 쓰러트린 네 놈의 비기.’
‘그거라면…’
‘그래, 혹시 모르잖아? 그것이 먹힐지. 그리고 또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지.’
‘예, 한번 해보죠.’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석찬. 곧이어,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여전히 백발에 녹안이었지만, 동료들은 물론 또 다른 라우르조차 그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냐? 한창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실망한 듯한 그의 표정에 석찬이 씩 웃으며 그를 향해 중지를 치켜올렸다.
“싸워보지도 않고 그 말을 하는 건가? 네 놈도 그러다가 마이클인가 하는 놈을 부르게 될지도 모르는데?”
빠직-
도발은 먹힌 듯했지만, 상대도 괜히 신이 아니라는 양 바로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핏!
석찬의 목 끝에서 멈춘 손날에 피가 배어 나왔다.
‘이 속도는…’
‘이게 무슨…’
오펠리아와 비유는 쫓을 수 없는 속도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석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너, 생각보다 꽤 하는걸?”
또 다른 라우르는 자신의 배를 꿰뚫은 손날을 보며 물러섰다.
“그 힘은 뭐냐.”
석찬의 손에 흐르고 있는 힘.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기형적인 힘이었다.
“설마, 신력과 마력을 분리해서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냐?”
또 다른 라우르가 처음으로 놀란 듯이 물었다.
“그건 놀랍군. 왜 너처럼 하찮은 녀석이 ‘나’의 화신이 될 수 있었는지는 알겠어.”
그리고 배의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한 그가 순식간에 석찬의 뒤로 도약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넌 죽는다.”
쐐액-
“얌전히 내 영혼 조각이나 내놓아라!”
석찬의 심장을 향해 내지른 손.
촤악 하고 붉은 피가 비산했다. 하지만, 이것은 석찬의 피가 아니었다.
또 다른 라우르, 또 다른 라우르가 빙의한 마이클이란 놈의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우릴 빼놓으면 안 되지.”
그 뒤로, 어느새 채찍을 들고 있는 엘리자베스와 이브 파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조된 분위기 속,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운을 뗐다.
“지금부터 전, 당신을 질투합니다.”
그와 동시에, 사라진 엘리자베스의 몸. 또 다른 라우르 위에서 나타난 그녀가 냅다 그를 걷어찼다.
콰과과광!
“커헉!”
땅에 처박힌 그가 피를 뱉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엘리자베스의 적안이 싸늘하게 빛났다.
“감히 주인님보다 강한 힘이라니. 건방져요.”
질투의 권능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