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80층에 도달했지만, 석찬 일행의 생활은 예전과 같았다. 수련과 사냥 그리고 적절한 휴식.
이브와 연인이 되었고, 전보다 휴식에 취하는 시간이 늘어났음에도, 훈련은 절대 빠지지 않는 석찬이었다.
“자세가 많이 좋아졌군.”
오늘도 어김없이 천무진과 오전 검술 훈련을 하고 있던 그. 옆에서는 진현이 두 눈을 가린 채 열심히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고, 이브와 엘리자베스는 명상에 빠져 있었다.
탓, 탁!
렐은 다 시든 나무를 이리저리 옮기며 나뭇가지에 매달린 표적을 조준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허리는 조금 더 틀고, 조금만 교정하면 완벽해지겠어.”
“그래?”
후웅-
석찬의 마력검이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남색 마력검은 사용을 거듭할수록 더욱 예리해졌고, 지금은 여느 보검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위력을 자랑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대련은?”
“당연한 걸 묻는군.”
천무진의 옷 주변이 자색으로 물든다.
“언제부터 그걸 쓸 수 있게 된 거야?”
분명 얼마 전에 봤을 때는 남색 마력을 사용하던 그였다.
“어제 어디 갔나 했더니, 그런 거였어?”
“그래, 요즘 네 녀석을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말이지. 나름의 결단이었다.”
“젠장.”
이제는 자신을 앞서 나가는 천무진을 보며, 석찬이 검을 꽉 잡았다.
아침 대련이 시작된 이후, 대련은 오로지 검으로 이루어졌기에 주먹은 사용이 불가했다. 모든 것이 석찬의 검술 증진을 위해서라고 한다만.
쾅!
‘이건 에바지!’
확연히 달라진 검격에 석찬이 혀를 찼다.
“굉장한데?”
“고작 이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천무진의 검에 둘러진 마력이 굳기 시작했다.
‘이런 씨.’
석찬도 빠르게 강마력으로 검을 굳혀 맞대응했다.
쾅!
‘큭!’
뼈를 찌르는 통증에 검을 놓칠 뻔했지만, 간신히 검을 붙잡은 석찬이 검을 휘둘렀다.
훙!
하지만 간단히 검을 피한 천무진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후웅- 쾅!
‘칫.’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연격에 석찬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빈틈을 찾아야 한다.’
번뜩, 눈이 녹빛으로 물들었다.
“호오? 그 눈인가? 약점 파악이라고 했지. 어디 한번 써봐라.”
“방심하지 마라. 그러다 다칠라!”
퍽!
냅다 천무진을 걷어찬 석찬이 검을 휘둘렀다.
텅!
어깻죽지를 향해 날아오는 일격을 막은 천무진이 물었다.
“어깨가 내 약점이었나?”
“…….”
“약점을 알려줘서 고맙군.”
아무래도 약점 파악을 사용했으니 공격한 곳이 자신의 약점인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씩.
작게 웃은 석찬이 그 틈을 타 그의 명치를 때렸다.
쿵!
“큭?”
천무진이 처음으로 물러났다.
“누가 거기가 약점이래? 그리고, 방심하지 말랬지?”
사실 진짜 약점으로 보인 곳은 어깨가 아닌 명치, 간단한 블러핑이었다.
“깜빡 속았군.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너도 진심을 다해라.”
“알았다.”
천무진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것이 석찬의 패인이었다.
털썩.
승부는 꽤나 질기게 이어졌지만, 결과는 천무진의 승이었다.
‘허어.’
목 끝에 닿은 칼날에 피가 한 방울 맺혔다.
“여기까지 하지.”
볼 아래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천무진이 검을 집어넣었다.
돌파를 끝마쳐 보라색 마력을 지닌 그는 강했다. 물론, 석찬도 강했다. 실제로 천무진은 대련 도중 몇 번이나 석찬의 수에 당할 뻔했으니.
“이틀 안에 해낸다, 돌파.”
‘요즘 실전을 경험하지 않았더니 몸이 굳었나… 조금 더 감각을 끌어내야겠군.’
서로 깨달음을 얻으며, 대련은 나름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전 일과가 끝난 후, 다섯 남녀는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어, 왔습니까?”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주방장이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들어보니 나름대로 자주 가는 곳이라 서로 얼굴이 익었다 하던가. 석찬도 한두 번 왔었기에 그를 알았다.
“아이고, 올킬러 님도 오셨습니까? 어째, 저번 음식은 입에 맞으셨는지…”
“아주 좋았습니다.”
그 말에 주방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섯 분, 주문은 어떻게….”
“항상 먹던 걸로요.”
이브의 말에 주방장은 다섯 사람을 방 안으로 안내한 뒤 음식을 하러 돌아갔다.
“후우…”
석찬이 이 식당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방이었다. 마치 지구의 고급 식당처럼, 이 식당은 방으로 나뉘어 있어 식사 도중 개인적이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물론 조심은 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방음 스킬이 걸려 있는 데다 추가로 마법까지 덧붙이면 안심할 정도는 됐다.
“할 말 있어요? 먼저 여길 오자는 소리를 다 하고?”
그렇기에 석찬이 이곳에 오는 경우는 단 한 가지, 바로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가 있을 때였다.
“요즘 라우르가 이상한 것 같아.”
“라우르 님이요?”
“무슨 일 생기셨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이브를 비롯한 석찬의 동료들은 전부 라우르의 정체를 알고 있다. 렐 또한 얼마 전에 저번에 이곳에서 비밀을 밝혔기에 그가 누군지 안다.
“투신 아저씨가 왜요?”
“얼마 전부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하네. 원래 삐지면 곧장 말을 안 하시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길지는 않았어.”
‘라우르, 대답 좀 해봐요.’
대화를 나누면서도 쭉 말을 걸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계시는 거 알아요, 라우르. 라우르?’
분명 그의 기운은 느껴진다. 하지만, 왜 이런 것인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다.
“지금도 그래요?”
“응. 그저께부터 쭉 이러네.”
내심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됐다. 뭐가 됐든 그는 신계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채 쫓기는 존재. 하지만,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일단 밥이나 먹자.”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 * *
천계, 대서재.
세상의 모든 기록이 담겨 있다는 대서재 중앙, 한 남자 천사가 책들을 뒤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얼마 전 수정구에서 한 인간을 본 이후, 그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화신으로 두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아이테르 그는 먼 옛날 라우르가 가장 총애하던 부하로 석찬을 보자마자 그가 라우르의 화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수정구에서 보았던 인간, 라우르의 신력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그 녀석은 석찬이 아니었다.
게다가 라우르의 느낌이 최대한 덜 나게 신력을 운용하는 석찬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라우르의 후계자라는 것을 드러내듯 대놓고 그의 신력을 사용했기에, 이미 대천사들 사이에서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건가?’
파괴신 이전에 존재했다는 사상 최강의 신, 라우르.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천사들도 있지만 그를 아는 천사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떨었다.
‘이러면 계획이 어긋나는데. 그나저나 도대체 뭐야? 왜 화신이 두 명이지?’
기본적으로 신은 한 명당 한 화신밖에 임명하지 못한다.
‘그 파괴신이랑 대지신도 한 명의 화신밖에 두지 않았거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서재에 왔다.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촤락, 촤라락.
하지만, 아무리 많은 자료를 들춰봐도 관련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을 대서재에 박혀 있었을까?
“찾았다!”
어찌나 기쁜 나머지 천사의 체통도 잊고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는 아이테르.
“정숙해 주시죠, 대천사님. 그리고, 아시죠…?”
사재는 아이테르의 주변에 널린 수십 권의 책을 보며 그를 흘겼다.
“아, 죄송합니다. 어지럽힌 자료들은 깨끗이 치우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빠르게 사과한 그가 찾아낸 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보았고.
‘이런.’
떨리는 눈빛을 최대한 감추며 아이테르는 문서를 품에 잘 집어넣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석찬 님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만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는 빠르게 대서재를 빠져나와 하늘을 날았다. 목적지는 석찬을 담당하는 천사인 에피르의 거처였다.
한편…,
“대천사님…? 아이테르 님? 치우고 가시라니까요!”
사재의 슬픈 비명만이 조용한 대서재에 울려 퍼졌다.
* * *
식사가 끝난 후, 이브와의 달달한 휴식 시간을 보낸 석찬은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화산 지대에 홀로 들어섰다.
“후우…”
그가 마력을 운용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남색 마력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했다.
‘이제는 때가 됐다.’
마력 등급 돌파. 오늘 천무진과의 대련에서 그것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석찬이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았다.
‘최대한 마음을 차분히.’
쿠구궁-
본격적으로 돌파를 시작하자,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땅 아래에서 마그마가 폭발하듯 요동쳤다.
우웅!
남색 마력에 옅은 자색이 돌았다. 처음에는 희끗희끗하던 보랏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해지더니, 본래의 남색을 덮고 일어섰다.
‘거의 다 왔다.’
여기까지 몇 시간이 흐른 지 모르겠지만, 앞으로가 가장 중요하다. 부서졌던 마력 저장소의 봉합. 이것에 실패하면 지금까지의 수고가 말짱 도루묵이었기에, 석찬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쾅!
돌파를 상징하는 보라색 빛기둥이 화산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았다.
쿠궁!
그 충격 때문인지, 지면 아래로 흐르던 마그마가 미칠 듯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화산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콰과광!
분화하기 시작하는 화산.
치익.
마그마의 비가 보호막을 뚫고 석찬의 옷을 태웠다.
‘이크, 따가워라.’
그렇게 스탯이 높아졌건만, 아직까지도 맨몸으로는 마그마의 열기를 완전히 버티는 것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빨리 벗어나야겠군.”
돌파의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석찬은 화산을 피해 마을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끄응… 결국 온 건가.]
드디어 라우르가 입을 열었다. 반가운 마음에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지만.
“라우르?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석찬아, 잘 들어라.]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는 라우르.
[당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몸을 피해라.]
“예? 그게 갑자기 무슨?”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 최대한 아래로 내려가. 녀석이 너를 감지할 수 없게…]
‘피해? 녀석? 녀석이 누구지?’
장난인가 싶었지만,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심각한 상황인 듯했다. 게다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만 늘여놓는 라우르.
그러던 그때.
휘오오-
마을 쪽으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크윽, 이건….”
분명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음에도 피부를 뚫고 들어올 것 같은 기운에 무의식적으로 석찬이 강마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강마력으로도 기운을 전부 막아낼 수 없었다.
‘누구지? 랜스? 드레이븐? 아니야… 기운이 달라.’
“크윽…”
더욱 거세지는 기운에 석찬이 결국 부분 강신으로 신력을 운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찾았다.]
섬뜩한 기운과 함께, 한 남자의 음성이 그의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