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통칭 ‘오메데토 사건’ 이후, 진현은 퉁퉁 부은 얼굴을 문지르며 신음을 삼켰다.
“누님… 너무하십니다….”
“너무한 건 너지.”
“맞아요.”
“…커플들은 닥쳐. 아재, 아재는 어떻게 생각…”
급히 자신의 편을 찾아보려 했지만, 천무진 또한 이번에는 진현을 외면했다.
“아재….”
“그래도 너니까 살살 때린 거야, 알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진현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하긴 공작급 악마가 제대로 마음먹으면, 자신쯤이야 거뜬히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누님.”
“별말씀을.”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는 그녀를 보며, 석찬도 덩달아 웃었다.
“그나저나 식기 전에 둘 다 드세요.”
이브의 말에 두 남녀는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수십 접시의 음식을 들이켜듯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맛있냐?”
“응. 겁나 맛있다.”
맛있는 음식 덕분일까? 맞아서 시무룩했던 기운이 금세 사라졌다. 진현은 금세 스무 접시가량의 요리를 먹어 치운 뒤 석찬에게 물었다.
“맞다. 너, 이번에 뭐 받은 거 없어?”
“받은 거?”
“응. 그 뭐시기냐? 이번에 ‘세계수 타기’ 클리어했을 때 뭐 주지 않았어? 이런 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진현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저건?’
“맞다. 우리가 77층을 클리어한 당시에도 저걸 비롯해 꽤나 좋은 것들을 줬었지.”
천무진은 입가를 닦으며 허리에 찬 두 검 중 하나를 뽑았다.
“이건….”
그것은 특이하게도 검신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검?”
얼핏 보면 훈련실 같은 곳에 흔히 비치된 목검처럼 생겼지만, 그 안에 내재된 기운은 절대 목검의 그것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마력.’
세계수를 탈 때 느껴지던 특이한 마력, 목검에는 그것이 깃들어 있었다.
“마력을 주입할수록 검신이 더욱 단단해지더군. 무게도 무거워지고.”
단단함과 무게의 증가, 그것은 곧 공격력의 증강으로도 이루어졌다.
“제한은 있었어?”
“아니, 없었다. 마력을 무한정 공급하면 무한으로 강해질 수도 있는 모양이야. 뭐, 그런 놈이 있을까 싶지만…”
[여기 있는데.]
라우르의 딴지에도 석찬은 씩 웃었다.
마력 회복 속도가 무한인 데다가 이제는 주먹 말고도 다른 무기를 차근차근 배우는 그의 입장에서 저런 무기가 하나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만약 저 무기에 신마력을 더할 수 있다면?’
벌써부터 여러 가지 조합이 떠올랐다.
“잘 사용해봐.”
그래봤자 저것은 천무진의 무기이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해야겠지만, 저런 무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 해도 정말 큰 이득이었다.
“그나저나, 뭐 받았는지 빨리 확인해봐. 궁금해 죽겠으니까.”
“맞아요, 맞아요.”
두 사람의 재촉에 석찬은 알았다며 메시지 창을 켰다. 그러자 기절한 이후로 하루 넘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메시지들이 석찬의 눈앞 가득 펼쳐졌다.
[다크 엘프 킹 - 레이어드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우선 레벨이 꽤나 많이 올랐다. 총 열 개, 이걸로 석찬의 레벨은 301레벨, 드디어 300레벨을 넘어섰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최초로 세계수 타기를 전부 클리어했습니다.]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세계수 무기 세트’가 지급됩니다.]
[‘세계수의 힘이 깃든 검’을 획득하였습니다.]
[‘세계수의 힘이 깃든 활’을 획득하였습니다.]
[……]
검, 활, 단검, 창까지, 총 네 개의 무기가 지급되었다. 우선 검은 조금 전에 본 천무진의 것과 같았다. 석찬에게는 굉장한 호재였다.
[세계수의 힘이 깃든 검]
[등급 : 레전드]
[공격력 + 2500]
[내구도 : 2000/2000]
[높은 확률로 대상의 방어력을 관통합니다.]
[마력 및 신력을 주입할수록 내구도와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무기가 자동으로 수리됩니다.]
우선 등급이 높아서 그런지 공격력이 건틀릿보다 높았다.
옵션들이 하나같이 괴물 같았다. 게다가 자동 수리 기능이 들어 있는 무기는 탑 내에 몇 개 없다고 들었는데, 이 무기가 그랬다.
다른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옵션은 모든 무기에 동등하게 부여되어 있었고, 두 번째 옵션이 제각기 달랐는데, 활에는 마력을 주입하면 화살이 자동으로 생성되는 기능이 있었다.
“와, 아저씨. 이거 봐보세요.”
렐도 그것을 받았는지 나무로 된 활의 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마력으로 이루어진 빛의 화살이 생성되어 공중을 날았다.
그리고 창.
세계수의 힘이 깃든 창은 마력을 주입하면 창대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었다. 마치 손오공이 쓰는 여의봉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단검은 조금 특이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몬스터를 사냥할 시 얻는 경험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어찌 보면 현재 석찬에게 가장 필요한 옵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진현, 이브, 천무진은 이미 400레벨을 넘어선 데 비해, 석찬은 아직까지 300레벨 대, 그것도 갓 300레벨을 달성해 있는 상태.
레벨 업을 통해 얻는 포인트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앞으로 단검 연습 많이 해야겠네.”
“무기술도 익히게?”
진현이 묻자, 석찬은 어깨를 으쓱하며 단검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이미 검이랑 창은 대충 다룰 수 있어.”
그 말에 눈을 빛낸 것은 천무진이었다.
“방금, 검을 다룰 수 있다고 했나?”
“응? 어. 너처럼 완벽한 검술은 아니겠지만,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천무진은 더욱 눈을 빛내며 석찬에게 다가왔다.
“따라와라.”
“응?”
“대련이다.”
갑작스러운 대련 신청이었지만, 석찬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말을 꺼낼 때부터 이미 예상했다.
어차피 남은 보상은 장비 재료나 돈 정도였기에, 석찬은 메시지 창을 끄고 천무진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천무진을 쫓아가느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탓일까, 석찬은 마지막 메시지를 읽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알이 요동칩니다.]
0층의 랜덤 박스에서 얻었던 정체불명의 알. 지금껏 쭉 아공간 주머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그것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메세지창도 희미했고 그 움직임도 미세했기에, 아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 *
“후아!”
석찬은 이마에서 흘리는 피땀을 닦아내며, 옆에서 똑같이 대자로 뻗어 있는 천무진을 바라봤다.
“어때?”
“확실히… 정파 나부랭이들보다는 나아. 남궁의 유망주 정도는 되는군.”
“정파? 남궁?”
자신이 아는 그 남궁이 맞느냐는 질문에 천무진이 아마 맞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군.”
“혹시, 가르쳐줄 수 있어?”
천무진은 탑에 들어오기 전 천마로 이름을 떨치며, 특히 검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지녔다.
‘레이어드와 비교한다면…’
알 수 없었다. 만약 예전으로 친다면 레이어드의 손을 들어줬겠지만, 작금의 천무진의 검술은 더욱 발전해 있었다.
“…….”
석찬의 요구에 천무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매일 오전 5시. 장소는 이곳이다.”
“오케이. 고맙다.”
“네 녀석을 더 괴물로 만들까 두렵긴 하다만….”
‘같이 검을 섞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면, 그 편이 더 좋을 듯하군.’
천무진이 속으로 작게 웃었다.
“어이, 석찬이! 아재랑은 붙으면서 나랑은 안 하냐?”
이미 준비를 마친 채 주먹을 맞부딪치는 그의 모습에 천무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석찬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어디, 얼마나 강해졌나 볼까?”
“나야말로. 7년 동안 우리를 쌩까고 얻은 힘이 얼마나 센지 구경이나 해보자!”
그렇게 진현과도 한바탕 날뛴 석찬은 녹초가 되어 이브에게 치료 마법을 받았다.
이브에게도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녀의 마력이었다.
보랏빛 마력이 석찬의 상처를 덮었다.
“이브, 돌파했구나?”
“네. 2년 됐어요.”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인지 보라색 마력이 꽤나 안정되어 있었다. 랜스의 컨트롤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래도 훌륭한 숙련도였다.
“오빠도 곧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이지.”
남색 마력의 숙련도는 거의 정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했고, 이는 틀리지 않은 생각인지 슬슬 돌파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주? 아니지. 일주일 안에 돌파한다.’
그렇게 다짐하며 석찬은 돌아갔다.
이브네가 이번에 새로 장만했다는 집. 이야기를 들어보니 80층쯤 올라왔으니 제대로 된 거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큰맘 먹고 나온 매물 중 가장 좋은 곳을 골라 샀다고 했다. 어차피 돈은 차고 넘쳤으니 내린 판단이었다.
그리고.
풀썩.
그런 고급 집의 고급 매트리스에 드러누운 석찬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이어 이브 또한 그의 옆으로 다가와 침대에 누웠다.
“이브? 방 많은데 굳이?”
“헤헤. 이제 사귀는 사인데 남의 눈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옳소, 옳소.]
‘당신은 제발 조용히 있고.’
고백은 했어도 아직은 숙맥기가 달아나지 않은 석찬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는 이브의 표정을 보니 그녀를 내치기가 뭐했다.
“같이 자기만 하는 거다.”
그 말에,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설마 다른 생각 한 거예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역시, 네 녀석도 남자였던 거냐?]
‘닥치라고요, 제발.’
“아니니까, 빨리 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석찬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브 또한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았다.
* * *
89층, 화산 지대.
쿠구궁.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화산에서 마그마가 뿜어져 내린다.
터벅, 터벅.
그 사이로, 한 사내가 걸었다. 보기만 해도 듬직한 거구를 자랑하는 사내의 등 뒤에는 거대한 용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치직, 치익-
분출된 마그마가 사내의 몸을 덮었고, 옷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그마는 사내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사내는 귀찮다는 듯이 마그마를 털어내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후우, 여긴가.”
긴 금발을 뒤로 넘긴 그는 화산 사이에 난 동굴로 들어갔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듯 울퉁불퉁한 동굴 안을 걷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통로와는 달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역력한 공간은 여러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검과 창을 든 조각상들 사이로 하늘 높이 주먹을 뻗고 있는 거대한 남자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보석이 하나 놓여 있었다.
“찾았다.”
사내는 씩 웃으며 보석을 쥐었다. 그러자 찬란한 빛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꾸득, 꾸득-
사내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후, 흉흉한 마력에 주변 조각상들이 전부 무너지기 시작했다.
“푸하! 좋아, 아주 좋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 웃은 사내가 씩 웃으며 허공에 말했다.
“다음 조각 찾으러 가죠, 라우르.”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